삶, 여행, 그리고 요가
요가를 처음 시작한 건 대학교 2학년인가 3학년 때, 교양수업 때였다. 다른 친구들은 이중전공, 삼중 전공으로 남는 학점 최대한 털어 전공과목으로 알차게 시간표를 짜 내려갈 때, 나는 수영이며 영화며 하는 교양과목으로 학점을 낭비했다.
요가도 젊은 날의 뻔한 학점 낭비 중 하나였다.
요가는 호신술 같은 수업에 비하면 나름 인기가 많은 교양과목이었다. [요가1], [요가2] 하는 식으로 강좌가 꽤 많았는데도 마감이 엄청 빨랐다. 마침 아침 0교시 수업만 자리가 남아 간신히 수강신청에 성공했다.
내가 들어갔던 수업의 학생 수는 서른 안팎이었는데, 지금처럼 형형색색의 레깅스가 유행하던 때가 아니어서, 대부분 후줄그레 한 반팔티에 추리닝 차림이었다. 나도 헐렁헐렁한 회색 면바지에 면티를 입고 어설프게 매트 위를 굴러다니며 요가를 배우기 시작했다.
중고등 학창 시절 내내 나는 꽤 유연한 편이라는 자부심이 있었다. 그래서 요가도 두려움 없이 도전했는데, 웬걸, 모든 동작 하나하나가 다 힘들었다. 선생님은 너무 쉽게 발가락을 잡고 다리를 펴는데 나는 간신히 손만 닿는 것도 땀이 났다.
나는 유연했던 게 아니라 그냥 팔이 좀 길었던 거다.
그래서 요가를 시작했다. 생각만큼 잘 안 돼서, 잘해보려고 계속했다. 학기가 끝난 뒤에는 동네 구립종합체육센터나 주민센터 요가 수업을 들으러 다녔다. 공부하면서 망가진 허리와 어깨의 통증 때문에, 교정 차원에서도 계속 요가를 다녔다. 그때 나에게 요가는 운동과 체육, 스포츠의 일환이었다.
출근을 다니면서부터 내게 요가가 갖는 의미가 달라졌다. 많지는 않아도 그럭저럭 돈을 벌기 시작하자 삶이 꽤나 복잡해졌다. 최악에 비하면 상당히 원만한 직장이었으나, 국제교류라는 업무 특성상 긴장도가 없을 수는 없었다.
그제야 요가가 수련과 비움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동작의 완성이 아니라 자세가 만들어지는 그 과정에 집중하세요
선생님의 구령에 맞춰 땅을 디디고 호흡을 고르다 보면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르게 열중하고 있는 내가 있었다. 미처 확인하지 못한 이메일, 서 너 개 국가별 시차를 고려해서 전화를 돌리려면 오늘은 늦어도 몇 시까지 자료 정리를 마쳐야 한다는 체크리스트 따위는 잊고, 발 뒤꿈치와 골반, 배꼽, 어깨, 정수리까지, 오롯이 내 몸뚱이 하나만 남았다.
세상이 흑백으로 나뉘지 않듯, '나'라는 존재도 정신과 육체로 양분되지 않아서, 몸이 힘들면 마음도 힘들고, 마음이 좋지 않으면 몸에도 티가 나기 마련이다. 처음에는 복근 좀 기르고 척추기립근 강화하려고 시작했던 요가인데, 어느새 머릿속 잡다한 생각을 비우는 것만으로도 내일을 맞이할 힘을 얻고 있었다.
몸뚱이를 수레에 비유하던가.
'깨달음'을 얻고 싶은 수행자던, 그냥 평범하게 잘 먹고 잘 살고 싶은 범인이던, 목적에 도달하고 싶다면, 타고 있는 수레가 튼튼해야 한다. 바퀴가 흔들거리고 한쪽으로 기울어진 수레로는 웬만한 도인 아니고서야 멀리 가기 어렵다. 요가 수행자들에게는 더 깊은 행위의 이유들이 있겠지만, 나에게는 건강한 수레를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벅차고도 의미 있다.
자의로, 타의로 요가를 며칠이라도 쉬면, 신랑이 좀 피곤해진다. 내가 예민하게 굴기 때문이다. 급하게라도 요가 한 판 때리고 나면 그제야 우리 남편, 오늘도 고생했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배포가 작은 나는 수시로 그릇을 비워주지 않으면 마음에 여유가 없어 모난 소리를 너무 쉽게 모조리 토해내야만 버틸 수 있다. 그마저도 참으면 병이 나고.
요가가 만병통치약은 아니지만, 스트레스는 만병의 근원이니, 뭐랄까,
요가는 마치 호랑이연고 같은 존재다. 그래서 나는 다른 건 몰라도 요가는 절대 포기할 수 없다.
어깨나 특히 척추의 유연성을 타고났던 나에게, 후굴 종류의 자세는 쉬운 편이었다. 특히 일명 '아치 자세' 또는 '무지개 자세'라고 불리는 '우르드바다누라사나'는, 어렸을 때부터 그냥 뒤집고 놀던 자세라 별 어려움 없이 해까닥 해까닥 뒤집어 올리고는 했다.
자세의 완성이 아닌 과정이 중요함을 깨닫고 나서야 후굴이 어려워졌다. 어깨와 가슴을 열면서 견갑골은 조이지 않고, 동시에 흉곽은 닫기가 쉽지 않았다. 그 와중에 골반과 반다도 놓치지 않아야 하니 더욱 집중력이 필요했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아서 욕심 내다보면 부상 각이고, 부상을 겁내다가는 제자리걸음이라 발전하기 어렵다. 그렇게 과함과 모자람 사이에서 '적당히'를 찾아가는 과정이 하루, 한 주, 한 달, 일 년이 쌓여 어느새 10년이 넘었다.
요가는 목적, 또는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단이자 과정이지, 얼마나 괴이한 자세를 취하느냐에 매몰되어서는 안 된다. 요가를 하면서 과정의 중요성을 깨닫자, 삶의 여러 부분이 더욱 유연해졌다.
여행, 생각대로, 계획한 대로 안 되어도 괜찮다. 요가하면 되지.
갑자기 생긴 피부 트러블 때문에 바다까지 와서 정작 바닷물에 몸을 담그지 못해도 괜찮다. 모래사장에서 요가하면 되니까.
삶이란 그렇게도 괜찮은 거다.
*뙤약볕에도 열정적으로 사진을 찍어준 고 작가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