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편복지 기본소득
'이재명' 이름 석자가 아직 지금처럼 유명하지는 않았을 적에, 우연히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를 읽었다. 우선은 '저'와 '역'과 '역자'가 있는 걸 보면서 정치인 이재명이 손수 번역을 다 했을 리 없다는 얘기를 했던 것 같다. 그리고는,
취지도 좋고, 구체적인 수치를 들며 계산 해 놓은 대목도 현실성 있게 해 놨지만, 아직 우리나라 정서에 안 맞을 것 같다며 넘어갔던 것 같다. 그리고는,
불과 몇 년 만에
그 수당, 내가 받게 되었다.
혼인을 기점으로 나는 4대 보험이 보장되지 않는 비고용상태를 유지 중이다. 때때로 지난날의 경력을 바탕으로 다달이 얼마 안 되는 돈을 벌고는 있지만, 고정된 수입도 아닐뿐더러 기록이나 증명이 남지 않으니 나중에 오피셜 한 경력으로 써먹기에도 애매한 느낌이다. 나이는 쉴 틈 없이 먹어가는데 말이다.
그렇게 백수 n년차, 서른을 넘긴 지 n년차
서울시 청년수당을 받게 되었다.
서울시에서 운영 중인 [청년수당]은, "19세에서 34세 사이의 미취업 서울시민에게 제공되는 '구직활동 장려금'"이다. 하지만 [실업급여]와는 달리 내가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하고 있다는 증빙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 눈에 띈다.
즉, 심사받기를 요구하거나 노동을 조건으로 하는 기존의 사회보장제도와는 다르다. 조건이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나이, 지역, 2회에 걸친 기록 등) '돈을 주는 대신 뭘 해라' 또는 '~을 하지 않으면 돈을 줄 수 없다'는 식의 요구사항이 없다.
수많은 조건과 요구사항.
아버지가 그토록 짜증내고 결국엔 젊은이들을 이해하게 되어 버렸던,
그 수많은 조건과 요구사항.
https://www.ei.go.kr/ei/eih/eg/pb/pbPersonBnef/retrievePb0201Info.do
우리 집 유일한 남성이자 그 유명한 58년 개띠 아저씨는, 은퇴 후 퇴직연금이 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실업급여'를 받기로 했다.
실업급여는 사실 '구직급여'라, "적극적인 구직활동"을 선보여야만 적은 돈이라도 꾸준히 받을 수 있다. 온라인 교육, 오프라인 교육, 자소서, 각종 증빙 등을 제 때 기간 내에 해내지 않으면 적은 돈이라도 받을 수 없다.
아빠는 당신 자식보다 어린아이들과 함께 서류를 접수하고 OT를 받았다. 몇십 년 만에 써 보는 자소서에 머리가 아팠다. 반 백 년 세월 동안 나라와 사회, 가정을 위해 뼈 빠지게 일했는데, 왜 또 일을 하라고 등을 떠미는지. 무엇보다, 사회에 막 발을 들이거나 겨우겨우 발 들일 준비 중인 젊은이들과 동등한 취급을 받는다는 사실이 좀 답답했다.
아 귀찮아 죽겠다 야. 게다가 내가 젊은 세대의 기회를 뺏는 것 같잖아.
당장 취업이 절박한 이들에 비해 아빠는 솔직히 돈 한 푼이 급한 처지가 아님은 분명하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기능하고 싶을 뿐이다. 동시에, 성숙하고 풍요로운 은퇴생활을 꿈꿨는데, 만약 '노동'만이 사회 구성원으로서 기능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라면, 인간은 대체 언제쯤 쉴 수 있는 걸까.
언제까지 공부하고 노력하고 일하라는 걸까.
조금은 피곤해졌으므로, 그냥 젊은이들에게 이제는 양보하고 너무 나서지 말아야겠다는 푸념.
조금 이따가 덧붙이는 말이,
요즘 어린애들은 나 같은 늙은이들이랑도 경쟁해야 하느냐는 동정.
심사결과 발표가 나자마자 1시간 만에 온라인 OT를 끝내고(코로나19로 오프라인 OT를 하지 않는다) 계좌발급을 신청했다. 체크카드는 다음 날 배송이 시작되어 주말 지나고 바로 받았다. 대부분의 가입절차가 그러하듯이 약정은 대충 보고 다 '동의'에 체크했다.
[진로 정서 자가체크]는 요즘 SNS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심리테스트 시리즈처럼 부담 없이 체크하고 넘어가면 되는 거라 역시 후다닥 끝내 버렸다. '자가체크'이므로 성격장애가 있다고 나오던 말던 상관없다. 없어도 되는 단계지만, "구직활동을 촉진하는" 명목 때문에 넣었나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으로 다달이 급여를 받는 6개월 동안 2번 작성해야 하는 [자기활동기록서]는 '일기처럼 부담 없이 작성'하기를 권유하고 있다. 보고서가 아니라 기록서이기 때문에, 뭘 어떻게 썼는지 내용 평가로 사람을 가리거나 쳐내지 않는다. 최고다. 국민정서 때문에 '구직'이라는 용어를 갖다 붙이기는 했지만 역시 이건 기본소득을 향해 나아가는 정책이라는 나만의 확신이 들었다.
기본소득은 개인들이 충분한 자기 시간을 누릴 수 있게 하는 사회를 지향한다. 청년수당은 지금 청년에게 필요한 시간을 보장한다. 그렇기에 식비, 통신비, 교통비 등 '구직활동 간접비용'에 해당하는 활동에도 돈을 쓸 수 있고, 특수한 경우가 아니면 굳이 증빙하지 않아도 된다.
저축하거나 금융상품을 구매할 수는 없고 무조건 다 써야 하는 돈이라 [재난소득]과도 유사하다. 엄밀히 따지자면 가구 기준으로 급여했고 단발성으로 끝났으니 [재난지원금]이 더 맞는 말이기는 하지만, 이 또한 보편복지로 나아가는 과정 중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50만 원으로 뭘 할지 작게나마 잠이 번뜩 깨는 고민이 시작됐다.
재난기본소득을 받았을 땐 가족들과 함께 소고기를 사 먹었더랬다. 많은 사람들이 안경을 바꿨다는 얘기도 들었다. 술, 담배에 다 썼다는 사람들을 향한 비난도 있었지만, 외식이 줄어 주류업계도 비상이었을 텐데 뭐 어떠랴 싶었다. 게다가 담배를 잔뜩 샀다면 그만큼 국고로 환수(!)되는 거니까 진정한 애국자이기도 하고.
코로나19 때문에 받았던 돈은 급한 대로 대충 털어버렸지만, 이번에는 최장 6개월에 걸쳐 받을 수당이다 보니보다 계획적으로 쓰고 싶다. 저축 또는 금융상품에는 쓸 수 없지만, 그래도 타당한 이유가 있으면 이월도 가능하기 때문에 더더욱 기대가 된다.
할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