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왜 같이 살아?
나는 오늘 아침에 곰팡이를 먹었다.
비유가 아니라 진짜 곰팡이.
포크의 삼지창 안 쪽에 곰팡이가 피어 있었는데, 모르고 그냥 썼다. 어제 사 온 스콘을 커피와 함께 한참 먹다가, 부스러기의 일부가 까무잡잡 한 걸 발견했다. 하루만에 빵에 곰팡가 필 리 없으니, 처음에는 베이커리를 의심했다.
'유명한 베이커리라고 해서 잔뜩 사왔는데, 이게 뭐야'
이미 2/3는 먹어버렸는데, 투덜거리며 속을 아무리 헤집어봐도 더 이상의 곰팡이는 없었다. 다시금 안심하고 몇 점 집어먹는데, 또 거무튀튀한 부스러기가 툭 떨어졌다. 다시보니 곰팡이가 줄지어 세로로만 펴 있었다. 아주 균일하게. 스콘을 부숴보는 와중에도 입에 고이 물고 있었던 작은 포크 모양 그대로.
곰팡이가 핀 게 아니라 '어디선가' 묻었 던 것이다.
뒤늦게 부엌에 출몰한 신랑에게 최대한 차분하게 말했다. 포크 좀 꼼꼼하게 설거지 해야겠다고 하자, 잘 닦았다고 응대했다. 곰팡이를 빵에 고이 발라 맛있게 먹은 뒤였지만, 아침부터 화 내고 싶지는 않았다.
이리 와서 이거 스콘 좀 볼래? 포크 안 쪽에 곰팡이가 펴서 곰팡이가 포크 모양 그대로 묻어났어. 근데 나 이미 빵은 다 먹기는 했는데, 뭐 죽지는 않겠지.
곰팡이라는 소리에 남편의 눈빛이 흔들렸다. 이리 와서 네가 직접 확인해보라는 말에 '으아악, 치워~ 싫어, 보여주지 마!'라고 되도 않는 앙탈을 부리더니, 신랑은 그대로 쏙 안방으로 들어가버렸다.
날 위한답시고 요 며칠 설거지는 모두 신랑의 몫이었기 때문에, 그에게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여지가 없으므로 변명하지 않는다. 대신 사과도 하지 않는다.
먹고 죽을 실수도 아니니 손이 발이 되도록 사과하길 바란 건 아니지만, 이제는 '알았어 다음에는 잘 할게'라는 발랄한 반응 말고는 바라는 게 없다. 설거지 문제로 이미 고랫적부터 실갱이를 한 탓이다.
신랑의 설거지는 당신의 친엄마도 진저리를 쳤던 이력이 있을 정도로 대충이다. 딴에는 효도 한답시고 나서서 설거지를 했는데, 모든 그릇에 미끈미끈하게 기름이 남아서 다 다시 씻어야 했다. 뽀득뽀득 다시 해야 한다는 말에 되레 짜증을 내는 바람에 결국 어머님이 다시 하시나 했는데, 단호하게 네가 마무리 제대로 하라고 아들을 다그치셨다. 물론 두 번 째 설거지 역시 제 분에 못 이겨 대충 했으므로, 어머님은 다음 날 아침 상을 차리기 전에 그릇 몇 개를 다시 씻으셨다.
아버님은 종종 나에게 '네가 고른 애니까 네가 잘 가르쳐서 써야 한다'고 농담처럼 말씀하셨고, 나는 웃으며 낳아서 길러 준 어른 말도 안 듣는데 제 말은 더 안 듣는다고 답했다. 어머님은 부모 말은 안 들어도 아내 말은 듣겠지, 라고 거드셨지만, 나는 30년 넘게 서로 다른 방식으로 살아왔는데 어떻게 사람을 바꾸겠냐고 또 못을 박았다.
그건 이 사람을 이대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하고,
두 분이 못 해낸 걸 나에게 전가하지 말라는 의미일 수도 있겠다.
다 큰 성인을 내가 무슨 권리로 고쳐보겠다고 나서겠는가.
무엇보다,
잔소리는 너무 힘들다. 듣기도 힘들지만 잔소리 하는 것도 지친다.
잔소리가 '잔소리'인 이유는 아주 작은 일인데 끊임없이 반복되기 때문이다. 설거지를 꼼꼼히 하라는 얘기를 안 해 본 건 아니다. 구체적으로 기름기가 많을 땐 휴지로 먼저 닦아내고, 뜨거운 물을 쓰고, 상황에 따라선 애벌로 헹구고 또 닦아얀 한다고도 차근차근 설명 안 한 게 아니다.
그래도 또 얘기를 해야 한다. 칼을 닦을 땐 날만 비빈다고 될 일이 아니라 손잡이도 꼼꼼이 닦아야 하고, 날이 위험할 수 있으니 귀찮아도 고무장갑을 끼는 편이 안전하다고도 얘기했는데, 칼날에 엄지손가락을 푹 베이고 나서야 징징거리며 고무장갑을 끼기 시작했다. 말 해도 안 하지만 말 하지 않으면 당연하게 내 몫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나는 말 해야 한다.
그렇다고 그것봐라, 내가 뭐랬냐고 승승장구 한 것도 아니다. 딴에는 그의 기분을 한참 생각해서 아무 말 없이 손가락 걱정만 해 줬다. 그거 베인다고 손가락이 떨어져 나갈 일 없으니 호들갑 떨지 말라고는 했지만.
한 번은 네가 제대로 된 1인분을 하기 전 까지는 애를 낳을 생각이 없다고도 한탄했다. 다 큰 어른 기르는 것도 벅찬데, 핏덩이를 또 낳을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푸념을 신랑은 곧이 곧대로 받아들여서, 우리는 아이를 가지지 않는 것으로 합의를 봤다. 이런 걸 '나잘알'이라고 해야 하나.
실은 성격이 둥글둥글 한 인간이라고 해야 하나.
내가 모난 소리를 못 하는 사람도 아닌데 이렇게까지 버티고 있는 걸 보면 너도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조금씩 바뀌고는 있다. 어설프지만 이제는 그릇만 닦고 끝내지 않고 레인지도 닦고 식탁도 닦는다. 아직 바닥에 흘린 찌꺼기는 맨발로 다 밟고 다니고 하수구 청소는 몰래몰래 미루지만, 노력은 하고 있으니 다음에 다시 얘기하기로 마음 먹는다.
내가 다 해버리는 편이 빠르고 깔끔한데도 그럴 수는 없다. 몸소 치우는 것도, 잔소리도 참으려니 아주 살이 쭉쭉 빠져서, 아직도 결혼 전의 몸무게로 돌아가지 못 하고 있다. 배우자가 짜증내고 싫어할 걸 알면서도 해야 하는 상황도 스트레스다.
내가 다른 그 어떤 집안일보다 설거지를 하지 않게 된 그 동안 심하게 아팠기 때문이다.
우선은 팔꿈치의 안정성이 떨어졌다. 결혼 후 살림을 꾸리기 시작하면서 옛날에 테니스치다 다쳤던 팔이 다시 아프기 시작했다. 통증이 너무 심해져서 자다가 깰 정도가 되어서야 병원에 갔더니, 아직은 괜찮지만 심하면 팔꿈치가 덜걱, 빠져버리는 사람도 있다고 겁을 줬다. 5년 정도 혼자 살면서 운동하다 다쳤을 때도 이정도는 아니었는데, 애도 없는데 팔이 빠질 지경이다. 그리고 28cm 주물 후라이팬은 정말 무겁다.
습진도 심해졌다. 본래도 피부가 약한 편이라 많이 쓰는 왼손 엄지손가락은 툭하면 지문이 닳고는 했다. 결혼 후에는 아무리 장갑을 여러 겹 껴도 습진이 가실 날이 없었다. 오른손까지 습진이 번져서 마찰력이 없어 컵을 떨어뜨린 후에야 또 뒤늦게 병원에 갔다. 의사는 스테로이드를 처방해주면서 장갑 다 끼고 보습 잘 하신 거 안다고, 약 잘 먹고 잘 바르고, 무엇보다 스트레스가 많으면 피부질환은 계속 생기니까 좀 쉬라고 했다.
물론 꼼짝 못하고 끙끙 앓던 때의 얘기고 지금은 기싸움이 맞을지도.
결혼하지 않았다면 나는 잔소리하는 스트레스도 모르고 건강하게 하고 싶은 대로 하면서 살았을텐데, 결혼 하기 전에는 내가 이렇게까지 짜증이 가득한 사람인 줄 모르고 살았다. 아직도 나의 지인들은 내가 성격 좋은 대인배인 줄 안다. 네 앞에서만 밴댕이 소갈딱지가 된다.
결혼이 문제가 아니라 네가 문제인 걸 안다.
어떤 ex는 나의 설거지를 탐탁치 않아 할 정도로 깔끔쟁이었고, 또 다른 어떤 ex는 돌돌이로 바닥을 자주자주 쓸고 닦고는 했다. 그는 빨래도 자주 돌리고 개키기도 얼마나 잘 하는지, 굴러다니는 옷을 냄새로 상태를 파악해서 입는다던가 하지 않았다. 옷을 착착 걸어 놓는 ex도 있었는데 나는 왜 굳이 너와 결혼해서 팔뚝을 아작내고 있는건지.
그들과 결국 헤어졌던 이유를 하나하나 나열하자면 끝도 없는 리스트를 만들 수 있다. 이기적이었고, 차별적이었고, 자존감이 낮았고, 거칠었거나 의욕이 없었다. 그들은 나와 맞지 않았다.
그대는 나와 맞다.
유사한 성향의 사람을 '잘 맞는다'고 표현하기도 하고,
달라서 보완이 되는 사람을 '잘 맞는다'고 표현하기도 한다. 우리는 어느 쪽일까.
설거지 좀 못 해도, 그럭저럭 살 만 하다.
네가 나의 영혼의 반쪽까지는 아니어도 결혼생활은 충분히 지낼 만 하다. 우리의 결혼이 지낼 만 한 것 역시 네가 이유인 것 같다.
*유부의 이유
https://brunch.co.kr/@taejoung/17
다음 생의 나에게 '이 사람과 결혼하겠습니까'라고 묻는다면 뭐라 답할 지 모르겠지만, 일단 이번 생의 나는 이 사람과 결혼하는 마음이다. 그가 마음에 든다. 설.거.지.는.좀.못.하.지.만. 곰팡이 좀 먹었지만, 함께에 익숙해지고 있다. 곰팡이는 좀 먹었을 지언정 마음이 불편하지는 않다.
너도 나도 서로에게 대처해나가는 방법을 익혀가고 있다.
근데, 결혼 전에 미리 설거지 어떻게 하는지는 아는지 물어나 볼 걸 그랬다.
*결혼은 Fun하고 Cool하고 Sexy하게 대처해야한다
https://brunch.co.kr/@taejoung/9
**브런치 글 중 <결혼하는 마음>이 있었다! 작년에 올라 온 글인데, 앱에 대해 검색해보다가 우연히 만났다.
https://brunch.co.kr/@easyahn/1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