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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Oct 14. 2020

걱정인형의 먹고 사는 문제

나의 문제, 너의 취미

 아빠는 은퇴 후 한식조리사 자격증 코스에 도전했다. 두 자식들은 왜 굳이 제일 힘든 길을 가냐며 뭔가를 배우시려면 베이킹이나 양식코스로 가시라고 설득했지만, 아빠는 그저 "엄마가 밥 안 해주면 내가 알아서 차려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한식조리사를 고집했다. '자격증과정' 말고 취미로 이것 저것 배우는 한식 요리수업은 어떠냐고 꼬드겨도 봤으나 안 먹혔다.

 은퇴한 아저씨 핑계를 대기는 했지만, 아빠는 그저 파스타가 낯설었을 뿐일지도 모르겠다. 이름도 모르겠는 재료들을 만지작 거리는 것 보다는, 평생 보아 온 기름 살짝 둘러서 볶고 지져내는 한식이 훨씬 간단하다 여겼을거라는 생각도 든다. 

 손가락 몇 번 잘라먹을 실수 끝에 과정은 무사히 수료했고, 집에서도 오이소박이니 새우완자니 하는 요리들을 몇 번 인가 저녁식탁에 올렸고, 실기시험은 안 보셨던 것 같다. 요즘은 요리에서 손을 뗐다. 새로운 자격증 코스에 또 도전 중이기 때문이다. 

 


 아빠의 요리진척을 제일 궁금해 한 사람은 다름 아닌 내 배우자였다. 신랑은 나이 지긋한 아저씨가 뒤늦게 요리를 배워봤자 얼마나 배울 수 있을까 의심하는 한편으로, 자신은 훨씬 더 잘 해낼 수 있다는 은근한 자신감을 비쳤다. 

 그러더니 아빠가 한 번 해 준 갈비찜을 먹고는, 아무도 뭐라 한 적 없는데 제풀에 자존심에 좀 스크래치가 났다. 맛이 있느니 없느니 하더니만, 언제부터인가 집에서 뭐 밥을 할 때 마다 꼭 한 마디씩 붙이는 것이다.

장인어른은 이런 거 못하시지? 

 응, 아빤 당연히 못하지. 아빤 양식 몰라. 

신랑이 차려 준 무슨무슨 프랑스식 닭요리. 버섯크림소스와 버터향이 어우러진 맛이다.

 우리집은 신랑이 요리를 한다. 항상 그랬던 건 아닌데, 중국에서 기관지가 크게 약해 진 후로는 신랑이 주로 밥을 하려고 애쓴다. 한국에 돌아와서는 팔과 손을 연이어 크게 다치면서 부엌일은 더더욱 완벽하게 남편의 몫으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신랑은 맛있는 걸 먹지 못하면 한껏 우울해하는 사람이다. 귀찮아서 끼니를 거를 수는 있어도, 맛없는 걸로 배를 우는 건 용납하지 못한다. 그래서 심심하고 건강한 걸 먹느니, 스스로 요리하기를 훨씬 선호한다. 당연히 그의 요리는 많은 경우 굉장히 간이 세고 고기고기 한 편이다. 

 그리고 대부분 양식이다. 혹은 중식. 사람 손이 많이 닿을수록 본연의 맛을 잃어버린다며, 재료 손질에 많은 공이 드는 한식은 별로 취급하지 않는다. 그래놓고 비스크 소스를 만들 땐 새우대가리를 몇 시간이고 우려낸다. 그냥 본인이 한식을 별로 안 좋아할 뿐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외국에서 사는 동안 한식을 그리워했던 경험 때문에 양식이나 중식을 그렇게까지 선호하지 않는데, 내가 차리는 밥상이 아니니까 그냥 먹는다. 종종 오늘은 내가 차리겠다고 미리 통고를 하는 날이 있다. 그런 날이면 신랑은 강력한 의구심을 들이밀며 네가 차릴거라면 본인이 며칠 전에 준비 해 둔 소스로 파스타를 만들어 달라고 요청한다. 혹은 피자를 시켜달라던가.


 근데 난 피자도 별로 안 좋아한다. 

시부모님을 집에 초대해서 신랑이 차린 코스요리의 에피타이저. 이어서 소고기 스테이크와 파스타를 먹었다.

 제가 먹고 싶은 요리를 제 손으로 만들어 먹는 다는 건 꽤 즐겁고 만족스러운 일이라, 신랑에게 요리란 해야 할 일이라기 보다 퇴근 후의 소소한 취미생활 같은 존재다. 가끔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90%가 성공적이며, 맛있게 차린 음식을 사랑하는 사람이 먹고, 기뻐하는 것도 행복이다. 나는 그를 '행복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행복아, 뒷정리는? 

 나에게 요리란, 할 수는 있지만 기꺼이 하고 싶지는 않은 부류의 일이다. 다 벗겨진 손끝으로 마늘 다듬기부터 시작해서 상을 닦고 수저를 놓고 밥을 푸고 이따가 도마와 냄비 설거지까지, 먹는 건 한 순간이지만 그 앞, 뒤로 해야 할 일이 너무 많다. 설거지가 끝났으면 렌지와 인덕션과 싱크대도 치워야 한다. 배수구에 낀 찌꺼기도 비워야 진짜 마무리다.

 그런데 우리집 행복이는 밥을 먹으면 일단 누워야 한다. 도무지 곧바로 설거지를 하는 법이 없다. 내가 콜록코록 기침하는 시늉이라도 하면 마지못해 궁뎅이를 들기는 하지만, 뭔가 하나씩 꼭 빼먹는다. 식탁 청소라던가, 전기밥솥이라던가, 인덕션 닦는 걸 깜박한다. 혹은 식기건조대를 비우지도 않고 설거지를 시작해서 마른 그릇이 다시 젖기도 한다.

 머리도 좋은 사람이 왜 자꾸 깜박하냐고, 행동하기 전에 생각을 좀 하라고 다그쳐도 보지만,

그래서 그가 행복한 거다.


 혹은 현명한 거라고 해야 하려나.

요리하겠다고 산 각종 치즈와 재료들. 본인이 사도 되는데 꼭 나한테 사달라고 조른다.

 나의 배우자는,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고 계속 생각하는 나와는 다르다. 최대한 노력해서 생각을 안 하려고 애쓴다. 이 그릇 저 그릇 다 꺼내 쓰다보면 설거지가 너무 많아질 거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센 불에 기름이 사방으로 튀면 벽이고 바닥이고 난리가 난다는 걱정, 하지 않는다. 그래서 그의 요리는 언제나 나의 요리보다 맛있다. 

 요리 뿐 아니라 삶을 대하는 태도 자체가 걱정이 없다. 여행을 갈 때도, 혹은 자산을 다룰 때도 그렇다. 어떤 실수, 무슨 사고를 쳐도 결국은 수습이 되었던 경험 때문일까. 나는 그런 그의 걱정없음이 부럽기도 하고, 때로는 답답하다가, 결국은 또 걱정스럽다. 행복이는 이런 나를 '걱정인형'이라고 부른다. 내가 제 몫까지 대신 걱정해준다며. 

 그의 걱정거리는 딱 한 가지, 내 건강 걱정 뿐이다. 그의 요리를 맛있게 먹고 탈이 난 적이 몇 번 있다. 한 번은 연어가 그랬고, 한 번은 고추가 그랬다. 그 후로는 반드시 불에 익힌 요리만 상에 올리고, 국이나 반찬도 좀 덜 매워졌다. 귀찮아 하는 기색 없이 무거운 생수도 하나하나 옮겨 놔 주고, 같이 장을 볼 때면 짐도 혼자 다 든다.

 물론


 설거지는 아직도

 너무 귀찮아서 울면서 한다.

남편의 밥 차리는 스킬이 점점 늘고 있다. 근데 다음부터는 밥도 조금만 더 예쁘게 담으면 좋겠다.

 우리집 행복이는 나와 결혼하기 전에도 행복이였다. 결혼 한 후에는 자기가 차린 밥을 맛있게 먹는 사람이 있어서, 밥 먹자마자 같이 누워서 뒹굴어주는 사람이 있어서 더욱 행복해졌다.

 행복이가 행복해졌다고 해서 내가 더욱 걱정인형의 본분에 충실해지지는 않았다. 치솟는 감정을 억누르고 먹자마자 같이 누워 봤더니 편하기는 편했다. 곧이어 체하는 바람에 조금 앓기는 했지만, 그의 게으름에 최대한 동참하는 느낌이 그렇게까지 나쁘지 않았다. 

 전에는 쉬는 날이면 오후 3시 까지 침대에 꼼짝않고 누워서 핸드폰만 하는 모습에 화가 치밀었는데, 요즘에는 방광 터지기 일보직전까지 꾸역꾸역 같이 침대에 누워 있는다. 아직은 내공이 부족해서 누운 지 10시간이 넘어갈라 치면 허리가 너무 아파 결국은 일어나야 하지만, 게으름 피우는 기쁨도 배워가고 있다. 


 뭐, 행복이도 사람인지라 취미로 하던 요리에도 슬슬 질려가고 있다. 본인은 인정하려는지 모르겠지만, 은근히 설거지도 줄여가고 밥을 하는 중간 중간 그릇도 대강 씻어 놓는다. 뒷일을 생각해서다. 미래를 고려하는 사람의 모습은 왠지 조금 덜 행복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내 속에 작은 악마는 행복이의 타락이 뭔가 통쾌하다.
그의 타락으로 조금 게을러 진 걱정인형은 전보다 약간 건강해졌다. 

 근데 마음과 달리 몸은 어째 행복이를 최대한 행복하게 유지하는 쪽으로 자꾸 움직인다. 그의 늦잠과 낮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살금살금 다닌다던가, 그가 양조절에 실패해서 잔뜩 만든 요리들을 틈틈이 먹어 치운다던가. 남았다고 버리면 슬퍼하니까, 그렇다고 남은 음식을 데워서 올리면 또 우울해하니까, 나 혼자 있을 때 끼니로 삼는 것이다. 남편 몰래 버려도 될텐데, 굳이 또 냉장고에 처박아 놨다가 혼자 먹는다. 

 그가 슬퍼하고 우울해할까봐 미리미리 걱정해서다. 밥하는 걱정을 잃은 걱정인형에게, 이제는 밥을 먹는 것도 걱정거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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