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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Oct 16. 2020

여성 없는 여성 백일장

그리고 폭주하는 채팅창

>이발소그림이 뭐에요?

>이발소?

>이발소그림 모르는 사람이 어딨어요?

>이발소에 빙빙 돌아가는거요

>이발소 안 가봤는데

>이발소그림은 이발소에 붙은 짝퉁 명화에요

>이발소그림이 뭔가요?

>이발소라닠ㅋㅋㅋㅋ

>이발소를 가봐야 알죠

>옛날에 이발소그림 추억이네요^^

>뭐에요

>이발소 한 번도 안 가봤는데

>분탕질하지 맙시다

>아니 이발소를 어떻게 알아요

>이발소그림 몰라요?

>ㅋㅋㅋㅋㅋ

>옛날엔 명화같은 걸 이발소에 꼭 걸었어요

>ㅠㅜㅠㅜㅠㅜㅠㅜ


 온라인으로 진행 된 개막식이 십 여 분 만에 끝났으니 망정이지.


 오늘 10월 16일 제38회 마로니에 여성 백일장이 열렸다. 


 고작가님의 소개로 학교 졸업한 뒤로 오랜만에 백일장에 도전하게 되었다. 걱정 반, 기대 반이어서, 한 달 전 부터 사전등록도 하고 원고지도 미리 받았다. 결국 온라인으로 제출하기는 했지만, 오랜만에 네모난 원고지 한 칸 한 칸 글자를 새겨 넣는 느낌이 썩 나쁘지 않았다. 

 덕분에 오프닝 때 맞이했던 찝찝함이 조금은 나아졌다. 

코로나 때문에 온라인으로 진행 된 마로니에 백일장. 유투브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개막식이 열렸다. 

 오전 10시 때마춰 시작 된 온라인 개막식에 채팅창에는 여러 사람들의 기대감이 계속 차올라갔다. 코로나 때문에 도전할 수 있었다는 사람은 아마 재택근무 중이리라. 저번 회차 때는 못 했는데 드디어 도전하게 되었다는 분도, 너무 기대된다며 모두모두 열심히 즐겁게 해보자는 응원도 줄을 이었다. 

 사회자가 개막을 알리고 주최측, 후원측 등등을 한 명 씩 소개하는데, 채팅창에 한 마디 쓰려다가 로그인 하기 귀찮아서 가만히 있었다. 이미 다른 사람들도 언급하고 있었다.

여성 백일장이라더니 다 남자밖에 없네요~

 갑론을박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사회자부터 대표로 나온 사람들 모두 남자라는 점을 지적했다. 틈틈이 괜히 갈등을 조장하지 말라는 의견도 올라왔으나, 비판도 못 하나요~ 라는 문장이 곧 뒤를 따랐다. 아닌게 아니라 '여성' 딱지가 붙은 자리에 여성이 한 명도 등장하지 않는 화면/개막식이라니, 구색이 영 아니기는 했다.

 문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자, 두 번 째 글제는, 이발소그림입니다.


 대표로 나온 세 명의 남성이 순서대로 돌돌말린 색지가 담긴 박스에서 종이를 랜덤으로 뽑아 올리는데, 두 번째로 뽑힌 종이를 펼치자 [이발소그림]이라는 단어가 나왔다. 화면 옆 채팅창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여성백일장이냐고, 글을 안 쓰겠다는 사람까지 나왔다. 

 미용실그림, 혹은 미장원그림이라고 썼으면 이렇게까지 분노를 사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발소라니. 여자는 이발소에 가지 않는다. 글제를 남자들이 골랐나보다고 채팅이 올라왔다. 충분히 그럴 만 하다. 심사위원들이 더 있는거죠, 심사위원들이 다 남자인 건 아니겠죠, 하고 채팅이 또 올라왔다. 충분히 의심할 만한 부분이다. 

 글제는 총 4가지므로, 그 중 자신이 쓰고 싶은 글제로 고르면 된다는 사회자의 말에는 무게가 실리려야 실릴 수 없었다. 누군가는 '이발소그림 싫으신 분은 머리카락 글제로 쓰면 되겠네요'라고 했다. 그러나 머리카락이고 자시고 이건 마로니에 백일장의 정체성을 향한 의심이었다. 

후원기업의 대표는 남자일 수 있지. 아무래도 유리천장이 있으니까. 그치만 여성 대리인을 보낼 수도 있었을텐데. 여자직원이 가기 싫다고 했을까? 혹은 대표가 나서서 출장 나가고 싶다고 했다던가?
 아니면 사회자는 또 왜 굳이 남자를 썼을까. 여성 사회자는 너무 식상해서? 

 홀로 생각에 생각의 꼬리를 물다보니, 심사위원들이 남자일 거라는, 여자가 한 두 명 있더래도 남성 심상위원의 입김이 더 셀지도 모르겠다는 확신이 들기 시작했다.  남성이 기획하고 남성이 구성하고 남성이 심사하는 여성 백일장이라면, 참가자는 어떤 종류의 글을 써야 당선될 수 있을까. 아저씨의 입맛에 맞는 글을 써야 될 것 같았다. 지하철 스크린도어에 붙은 시처럼 쓰면 뽑힐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다가, 그래도 될까, 고민했다.

 나는 지하철 스크린도어의 이를 모를 시들을 정말 싫어한다. 가부장제와 여성혐오를 감동과 서정인 냥 깔고 가는 몇몇 문장들이 너무 거슬린다. 그런데도 편승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고. 내가 그렇게까지 절실했나?

 그래, 절실했을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기분이 나빴다. 나, 절실했구나.


 막상 글을 쓰다보니 기분이 조금은 나아졌다. 혼자 감상이 차올라 괜시리 눈가가 촉촉해 지는 청승도 떨다가, 한글파일을 저장하고 이메일로 원고를 제출했다. 원고지 양식에 맞게 쓰는 과정이 새삼 재밌기까지 했다. 아마, 다음에도 마로니에 백일장에 도전하기는 할 것 같다.

 다음에도 나는 아마 절실할테니.  


 그 때는 마로니에 백일장이 지금보다는 좀 '여자다워'지기를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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