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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Oct 21. 2020

가을 설악산 등산기

물이 많은 시절엔 열매 대신 단풍이


 올 여름 난생 처음 다녀 온 설악산에 반해서, 


가을에 또 다녀왔다.

코로나 위기경보도 1단계로 내려갔다. 



 서울에서 속초까지 달리고 달리다 그 유명한 내린천휴게소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속초에 먼저 도착했다. 내비게이션에는 오색코스가 찍혀 있었지만, 주차장 들어가기 1.2km 전 부터 차가 꽉 들어 차 움직이지 않는 바람에 그대로 바다를 향해 유턴했다. 

 속초 앞바다를 가장 잘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가 바로 낙산사다. 우리 부부 모두 2000년대 중반 즈음 터졌던 대화재 후로는 처음이었는데, 정비가 엄청 잘 되어 있어서 놀라버렸다. 바다구경 후에는 곧바로 숙소에 체크인을 했다. 

 내일 아침 일찍 시작해야 하니까.

신흥사에서 출발할 때는 사람이 좀 많은가 싶었는데, 조금만 깊이 산 속으로 들어가자 한가해졌다.

 뉴스에서는 10월 중순 경이면 설악산 단풍이 절정일거라고 사진기사까지 떴더랬다. 도착하고 보니 왠걸, 차 끌고 시내를 돌아다니는 곳곳마다 온통 푸르러서, 딱 일주일만 더 있다가 올걸, 싶었다. 아침 일찍 순두부 한 사발 때리고 출발하는 내내 새파랬다. 

 "아빠, 근데 올 해 단풍이 잘 들까?"

 "그럼. 태풍이 많이 왔잖아."

 "태풍?"

 "어. 비가 많이 오면 씨앗은 다 떨어지는데, 대신 단풍은 잘 들어. 나뭇잎에 물이 많으니까."

 "물이 많으면 단풍이 잘 드는거야?"

 "그렇지, 아무래도"

 "그래서 계곡 단풍이 유명한거야?"

  아빠는 숲 해설사고, 아빠가 말 한 게 있으니까,


정말 기대했는데...


딱 천당폭포까지만 갔다가 돌아왔다. 천당처럼 찍은 척 하지만 실은 그냥 내가 사진을 잘 못 찍었다.

 단풍도 없는데 너무 추웠다. 계곡코스에 다다르기 전 까지는 나무도 우거지고 워낙 이른 아침이라 추워서 귀 속이 다 아팠다. 숲이 이토록 짙은 초록인데 이토록 춥다니, 단풍도 없이 춥기만 해서 억울하기까지 했다. 턱스크마저도 없이 목청을 자랑하는 산악회 무리가 괜히 더 거슬렸다. 

 여름에 내려왔던 길이 그 몇 달 사이에 벌써 아스팔트로 고르게 포장되어 있었다. 포장로가 끝나고 데크길이 시작되는 지점에서부터 인파가 조금 줄었다. 주말 단풍시즌 치고는 그렇게 많은 인파가 몰린 건 아었지만, 그래도 코로나때문에 신경이 쓰이던 참이었다.


 사람들이 잦아들자 그제야 단풍도 슬슬 고개를 내밀었다.

데크길에서. 태풍 때문에 통제되었던 구간도 이미 완벽하게 복구되어 있었다. 역시 코리안 스피드.

 신흥사에서 와선대를 지나 비선대를 찍고 귀면암을 향해 가는 길에 이미 우리 둘 밖에 없었다. 뭔가 기척이 느껴저서 돌아보면 다람쥐였다. 월동준비 중인지 돌아보면 다람쥐고 또 돌아보면 다람쥐였다. 코로나에 간식 던져주는 등산객이 적어져서인지 밥 내놓으라고 협박하는 쪼꼬미들도 없이, 그냥 그렇게 하염없이 부스럭거리고 다녔다. 

 부스럭 부스럭 단풍도 많아졌다. 노랗고 빨간 점들이 곳곳에 찍히기 시작했다. 날은 더 없이 맑아서 투명한 계곡물이 청록빛인데, 그 위에 낙엽이 켜켜이 메워가고 있었다. 여름철 계곡에 비하면 반에 반절 쯤 될까 말까한 물줄기도 그토록 반짝일 수가 없었다. 

 짜게 식었던 내 맘에도 금세 빛이 드는 바람에 재잘재잘 기분이 좋아졌다. 

여름에 비 온 바로 다음 날 왔을 땐 둥그렇게 한 가득 다 물이었는데, 가을이 되니 그 많던 물이 다 빠졌다.

 귀면암을 꼴딱 넘어 계곡을 따라 계속 걷자 그제야 진경이 펼쳐졌다. 저 깊은 계곡 아래로는 옥빛 비단 같은 물이 흐르고, 맞은 편 벼랑엔 거짓말처럼 가을빛이 꽂혔다. 가을하늘이 파랗다 못해 너무 멀어서 더욱 거짓말 같았다. 신이 나서 쉬지도 않고 걸었다. 작은 가방 가득 챙겼던 간식에 손도 대지 않고는, 계속 걸었다.

 가물어서 비리비리한 오련폭포마저도 단풍과 맑은 날씨 덕에 한껏 그럴싸해 보였다. 양폭까지 도착해서야 휴게소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조금만 더 가면 오늘의 목적지인 천당폭포라, 한 번 쉬었다 갈 겸 시계를 보니, 시작한 지 두 어 시간이 조금 넘었다. 

 미쳤다고 아주 그냥 신나서 엄청 빨리 걸은 것이다.

 더 가도 좋았으련만, 나 말고는 운전 할 사람이 없는 관계로 이번에는 체력을 좀 아끼기로 했다. 

아무 필터 없이 똥손으로 찍어도 여기저기 다 아름다웠던 설악산 단풍.

 아빠 말이 맞았다.

 단풍은 유난히 아름다웠고, 굽이굽이 물이 흐르는 계곡의 단풍은 더더욱 아름다웠다. 비바람에, 태풍에, 도토리는 유난히 없을 예정이라 다람쥐들만 쬐끔 불쌍해졌다. 탁 트인 계곡을 따라 가을볕이 들자 내 몸도 단풍 들 것 같았다. 더위를 많이 타는 신랑은 종내 반팔만 입고 돌아다녔다. 

 아쉬움을 뒤로 하고 돌아서 내려오려는데 시원한 바람이 불더니 낙엽이 흩날리기 시작했다. 날이 흐렸으면 거추장스럽다고 성냈을지도 모르겠지만, 엄청 들뜬 나머지 구름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나비처럼 날리는 낙엽을 잡아보겠답시고 빈 주먹을 허우적거렸다. 

요즘은 별의 별 게 다 미니사이즈로 나온다. 참크래커에 올리브로 간단하지만 든든하게 먹었다.

  돌아 내려오는 길은 오전 10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라 등산객이 점점 많아졌다. 길막하는 꼴불견 산악회를 마주치는 빈도도 늘었는데, 이미 마음이 한결 여유로워진 뒤라 '아휴 그래, 기쁘겠지. 얼마나 즐겁겠어' 하며 미소 지을 수 있었다. 

 오히려 하산길엔 신랑이 조바심을 내다가 발을 헛디딜 뻔 했다. 헛디뎌서 나만 다치면 모르는데, 낯선 아저씨를 벼랑 밖으로 밀어낼 뻔 했다. 너무 죄송해서 눈도 못 마주치고 간신히 사과만 하고는 부끄러움에 냅다 자리를 피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도 아찔하다.


 남편이 하산길을 서둘렀던 이유는 주차 때문이었다.

 주말이라 주차장이 꽉 차서 차 안에 키를 놔두고 2중주차를 했는데, 지금쯤이면 3중주차가 되어 있을지도 모르고, 그마저도 차 뺄라는 사람들이 몰리면 주차장에서 하루종일 시간낭비만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반대편 계곡의 능선. 이 라인 따라 눈이 쌓여도 멋질 것 같았는데, 겨울에는 위험하다고 안 오기로 했다.

 다행히 워낙 산행이 빨랐던 나머지 나가는 차량이 우리 밖에 없었다. 

 주차장에 진입하려는 줄은 이미 한참 길어진 뒤여서, 우리차만 유유히 빠져나가는 길이 즐거웠다. 빨리 와서 빨리 해치웠군! 기분이 좋았다. 

 행복한 기분으로 일찌감치 숙소로 돌아와 씻고 쉬는 것 만큼 짜릿한 게 또 없다. 중청, 대청까지 찍고 돌아왔으면 당연히 성취감은 어마어마했겠지만, 저녁에 밤바다 구경에 회 한사발까지 때릴 기운은 없었겠지. 다음날이면 곧바로 서울에 돌아와 일상으로 복귀 할 여력도 남겨야 하니까.

 요번엔 딱 요기까지. 

난생 처음 그 누구의 도움도 없이 시장에서 '이거 이거 주세요'해서 회를 먹었는데, 성공했다.

 서울은 아직 단풍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더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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