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상향, 그리고 전설이 현실이 될 때
10여 년 전, 유럽에서 교환학생을 마치고 인천공항으로 들어오면서 처음으로 내뱉은 말은 '미래도시'였다.
독일에서는 이름도 못 들어 본 한적한 시골마을에 머물렀고, 이탈리아에서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중세시대 성곽도시 내에서 살았다. 로미오와 줄리엣이 곧 튀어나올 것 같은 곳에서 살려니
너무 춥고, 좁고, 불편했다.
그러다가 오랜만에 다시 만난 서울은 도시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몇 백 년 된 건물들이 많이 안 남았다고? 역사의 단절? 철거? 재개발?
쥐도 안 나오고 깨끗하고 얼마나 편한가. 또 얼마나 높고 넓고 위대한가.
나는 서울에 살어리 살어리랏다
라고 역사와 고고학을 전공한 사람이 말했습니다...
전공이 무색하게도 나는 역사와 전통을 애지중지하는 편이 전혀 아니다.
겨우 몇 년 전 나와 지금의 나조차도 완판 다른 사람인데, 문헌과 흔적으로 남은 과거를 나 자신의 일부로 삼기엔 거리감이 너무 크다. 역사와 민족과 국가나 정치는 교집합은 있을지언정 동일한 개념으로 여겨지지 않는다.
중국이라는 국가에 오롯이 깃들어 살지 못했던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지 싶다. 분서갱유의 전통(?)을 높이 사 손수 과거와의 단절을 이뤄냈으면서, 역사를 자꾸 현재와 동일시한다. 맥이 끊겼느냐 안 끊겼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과거와 현재를 구분 짓지 못하기에 오류가 발생한다.
더 큰 문제는 현재와 동일시하는 과거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점이다.
역사 [명사] 인류 사회의 변천과 흥망의 과정. 또는 그 기록.
인간이 지구 상에 존재 한 이래로 일어난 모든 사건을 다 기록으로 남길 수는 없으므로, 역사는 본디 선택적이다. 인류에게 큰 의미가 있다고 여겨지는 사건들만이 여러 형태의 기록으로 남는다. 이때 '의미'란 사회나 문화권마다, 더 작게는 개개인마다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여러 관점이 존재하기 마련이다.
일제로부터 독립하지 못했더라면 우리나라 독립운동가들은 테러리스트로 기록되었을 것이라던가, 베트남전 참전용사가 베트남 입장에서는 침입자이자 민간인 학살을 자행한 장본인이라는 점 등이 역사를 바라보는 여러 관점의 예라고 할 수 있다.
프로파간다 담당 정부 관계부처가 실존하는 중국에서는 다양한 관점이 존재하기 어렵다. 무엇을 남길지 선택하는 기준에도 이데올로기가 작동한다. 안 그래도 남은 것도 많지 않은데, 거름망과 거름망을 거치다 보면 정말 남는 게 없다.
남은 것조차 입맛에 맞게 리터치를 거친다. 여러 카메라 어플에서 제공하는 필터 효과처럼 미화작업을 거쳐야만 대중에게 선보일 수 있다. 눈은 크게, 피부는 뽀얗게 상상 속 이상적인 미인의 모습에 맞춰 현실에 없는 얼굴을 만들어 내듯 더욱 웅장하고 '전통'스러운 모양으로 화려하게 재등장한다.
재등장시킬 만한 것도 없다면, 만들어낸다.
고고학은 물질자료를 기반으로 인간사를 연구하는 학문이다. 기록은 선택적으로 남겨지지만, 물질자료는 보다 보편적인 당대를 증명한다. 띄엄띄엄한 기록의 틈새를 메우거나 기록의 오류 여부를 밝힐 수도 있어 눈길을 사로잡기도 한다.
그 로망에 사로잡혀 스캔들도 몇 번 있었다. 가짜 유물을 만들어내거나 사전에 몰래 묻어 놓은 유물을 짜잔! 하고 발굴해내는 식이었다. 덤으로 말하자면 영국과 일본의 사기사건이 제일 유명하다. 이제는 한물 간 농담거리일 뿐이다.
한 때 중국도 유물을 만들어낸다는 비난을 받았다. 하지만 중국은 삽만 댔다 하면 유물이 쏟아져 나오는 화수분이어서, 차라리 기존에 있는 유물을 이러쿵저러쿵 입맛대로 해석해내는 편이 없는 걸 만들어내는 것보다 쉬워 보인다. 과거가 남긴 여러 흔적 중 이념에 맞는 놈만 골라 쓰면 된다.
'만들어'내는 쪽은 정치다. 발굴된 기단, 터, 몇몇 흔적을 토대로 상상의 나래를 펼쳐 건물을, 유적을 자꾸 지어 올린다. 지역 정부 입장에서 새로 지은 유적은 일종의 핵심산업이다. 지자체의 예산과도 관련이 깊고, 무엇보다 취업률이나 관광업 유치, 나아가 명예와도 관련이 깊기 때문이다.
베이징에 직접 와서 보니 자금성도 만리장성도 근대의 산물이다. 이 높다란 벽을 쌓기 위해 그 옛날 기술도 없는 사람들이 얼마나 착취당했을까 탄할 필요하 전혀 없다. 오늘날 우리 눈 앞에 보이는 벽돌 건물은 인민공들의 솜씨에 가깝다.
중국에 오기 직전까지 문화유산 복원 관련 분야에 종사했기에 이걸 어떻게 유적이라 할 수 있나 더욱 당황스러웠지만, 베이징의 유적들은 그나마 사정이 낫다. 폐허로 남았을지언정 근대에 '복원'을 거친 유적이라 역사적으로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에 9층짜리 목조탑을 축조할 기술이 없겠는가. 경주의 황룡사지 9층 목탑을 '복원'하지 않는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다. 원래대로 '회복'시킬 만한 그 무엇도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건강은 회복할 수 있어도 목숨은 회복할 수 없다. 이미 죽어 사라진 사람을 몇 가지 기록에 기반해 되살릴 수 없듯, 없어진 존재는 복원할 수 없다. 흔한 공상과학영화처럼 뛰어난 생명과학 기술력으로 인간을 복사해낸다 하더라도, 예의 영화에서처럼 복제와 원본은 동일한 존재냐는 근원적 질문에 부딪힌다.
완벽하게 복제해냈다 해도 윤리문제에 부딪힐지 언대, 유적을 다시 만드냐 마느냐는 더더욱 오리지널리티를 논하기 어렵다.
그 어려운 걸 중국이 해냈다. 죽은 동물의 사체로 박제를 만들듯 흩어져 사라진 역사와 전통의 부스러기를 찾아내어 유적으로 박제해냈다. 무형의 전통을 유형의 존재로 치환해낸 셈이다.
박제도 의미는 있다. 이미 멸종되어 없는 동물들의 박제를 감상하듯 과거를 감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시공간을 뛰어넘어 그럴싸해 보이는 걸 조각조각 모아 놓은 박제는 마치 일각돌고래의 뿔과 말의 사체를 짜깁기 해 만들어 낸 상상의 산물과 같다.
전설 속 유니콘을 만들어 전시해 놓은 듯 우아하게 비상하는 관광지들을 돌고 돌다 보니 옛이야기 속 도깨비나라가 딱 이렇지 않을까 싶다.
북쪽으로 옮겨 놓은 남녘의 수향 마을 고북수진은 현대 중국이 꿈꾸는 이상향 그 자체다. 현실은 지역 간 갈등과 혐오로 매 달 한 두 번씩은 뉴스가 오르내리지만 고북수진에서만큼은 조화롭기 그지없다. 중국이라 여겨지는 모든 요소가 다 모여 '대륙'스러운 규모와 자본력마저도 자랑거리다.
요동반도 펑라이시의 봉래각은 1980년대부터 시작해서 새로 지어 올린 건축물로 현판 빼고는 다 새 것이다. 옛이야기 속 모습에 꼭 들어맞는 풍광 끄트머리에는 여덟 신선이 날아올랐다는 절벽도 있다. 이 땅에서는 전설도 현실이 된다.
이런 유적은 실존한 적 없다. 북경대 선생님은 고북수진을 테마파크로 소개했지만, 헬스장 코치에게는 유니콘과 실제의 경계가 모호한 듯했다. 펑라이거를 가득 메운 시골서 올라온 단체 관광객들의 표정도 의심이 어리기엔 밝기만 하다.
고북수진의 원형인 오진도, 나름 뿌리 있는 가문 출신이라는 상하이 사람은 상하이 디즈니랜드 대신 갈 만한 놀이공원으로 소개했지만, 북경대에서 언어교환 파트너로 만난 학생의 눈빛은 달랐다.
언어교환 파트너의 경우 역사와 전통과 민족과 국가를 철저히 믿는 축에 속했다.
역사는 선택적 결과물이고
전통은 계통이 끊기면 의미를 상실하며
근대적 민족 개념은 상상의 산물이고
국가와 개인은 별개의 존재다.
우리는 가치관이 달라도 너무 달랐다. 서로에게, 특히 그 친구에게 더할 나위 없이 불편한 시간을 나누며 생각했다. 나의 사고방식이 보편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이 친구는 자신이 보통에서도 제일 보통이며 온건한 편이라고 했다.
그 말이 사실이라면 중국은 박제를 있음직 하게 참 잘 해낸 셈이다. 굳은 믿음은 현실이 되어 새로이 깃들었다. '이것이 우리의 전통입니다'하고 제시된 것을 그대로 수용했다는 의미이므로.
다시 태어났다고 해도 될까. 죽음 전과 이후의 존재가 '같다'는 기준은 뭘까. 외양이 닮으면 환생일까. 영혼일까. 영혼은 또 뭘까.
수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던 중국은 이미 없다. '중국특색사회주의'를 외치는 현대의 중국은 과거의 중국과 다른 중국이다.
사실 그래도 괜찮다. 프랑크 제국을 현대의 독일이나 프랑스로 여기지 않듯, 고려를 현대의 코리아와 동일하게 여기지 않듯, 과거가 어떤 흔적으로 남았는지 정도로도 충분하다.
문화유적을 턱턱 지어 올리고 있는 중국은 요즘 24절기를 명절로 되살리려는 노력 중이다. 중국에서는 그래서 봄이면 청명절을 센다.
춘분이며 추분이며, 동지섣달에 팥죽을 먹고 한식에 잡곡밥을 해 먹는 등의 문화는 한국에 더 잘 남아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24절기는 음력과 농경문화에 기반을 둔 문화다. 경제 형태가 바뀌면서 24절기는 흔적으로만 남았다.
자연스럽게 잊히고 새로이 생겨나는 문화가 24절기만은 아니다. 아쉬울 수도 있으나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게 있다면 모든 건 변한다는 사실뿐이다.
중국은 문화대혁명 때 많은 구태를 벗어버리면서 24절기뿐만 아니라 음력도 역사의 뒤꼍에 남기기를 선택했다. 때문에 우리가 구정이라 부르는 음력 설도 세지 않고 추석에 해당하는 중추절도 2008년에서야 국가 법정휴일로 지정했다.
이제 와 정책적으로 되살려낸 24절기가 무슨 의미가 있을지 모르겠지만, 레퍼토리만큼은 익숙하기 그지없다. 전시 할 박제가 하나 더 늘었다.
아마 중국은 다 계획이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