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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Mar 16. 2021

옌롄커의 창문

기억과 망각, 진실과 기억상실

 북경대에서 어학과정을 밟을 때였다. 성인을 대상으로 한 수업이다 보니 문법은 좀 단순해도 쓰이는 어휘만큼은 유치하지 않은 수준으로 배워야 했다. 각종 산업분야에서 쓰이는 용어들, 뉴스에서 왕왕 등장할 법 한 단어들은 간체자인데도 획수가 꽤 많았다. 

 예문을 만들 때, <중국은 공업국가입니다>라고 쓴 문장에 선생님은 맞지만 맞지 않다고 했다. 그리고는 <중국은 공업국가가 아닙니다. 중국은 농업국가입니다>라는 문장을 칠판에 새로 적었다. 

외국인들이 자주 틀립니다.
중국은 공업국가가 아닙니다. 이유는 대부분이 농업으로 살기 때문입니다. 공업은 대도시만 입니다.
외국인들은 생각합니다. 중국에 공장이 많습니다. 그러나 현재 대다수의 중국인은 농사를 짓습니다.  

 중국은 지금까지도 농업에 더 많이 의존하고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처음이었다. 그 이후로도 우리 담임선생님만이 중국은 공업국가가 아니라고 말한 마지막 중국사람이었다. 중국에서 사는 내내 충분히 많은 중국사람과 교류하지는 않았으므로 시간이 더 있었다면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담임은 만난 중 제일 진보적인 사람에 속했다. 북경대 방학기간 동안 동네 어학원에서 신문 읽기 수업 같은 걸 배웠는데, 중국의 사회문화는 물론 시사정보를 꽤 비판적인 시각으로 접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담임이 북경대에서 일하기 전 직장이었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있나.

태항산은 산시성과 허난성에 걸쳐 있는 긴 산맥이다. 옌롄커는 허난성 출신이다.

 담임을 '진보적인 사람'으로 정의한 이유는 현실을 왜곡하거나 외면하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흔들리지 않은 자신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았기에 때로는 고집스럽기도, 매사에 비판적이기도 했지만 근거 없는 비난이나 막연한 태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말하자면 제 색깔이 선명한 사람이었다. 

 담임이 매번 옳은 건 절대 아니었으나 나는 담임이 좋았다. 나와 결이 맞는 타입이 아니었는데도 그랬다. 성적도 엄청 좋았을 텐데 유학을 못 갔던 이유가 사상검증을 통과하지 못해서는 아닐까, 상상했다. 한국이었다면 빨갱이 소리를 들었을 거야. 

 중국에서는 '빨갱이'가 아니라 '우파' 소리를 듣는다는 걸, 옌롄커의 책을 읽고서야 깨달았다. 

베이징에 놀러 왔던 친구는 중국이 처음도 아닌데도 '정말 빨갛구나'하고 놀랐다.

 한국이 한창 빨갱이를 때려잡던 시절처럼 중국은 '반우파 투쟁'을 벌였다는 대목에서 생각했다. 그렇구나. 선생님은 그렇다면 여기서는 우파로 정의되겠구나. 한국에서 진보와 보수의 정의가 남다른 것처럼, 여기서도 좌익과 우익이라는 개념이 다르게 읽히는구나.

 외국인에게 중국어를 가르치는 우리 선생, 종종 개량한푸 같은 걸 입고 다녔고, 수업시간에 지루한 학생들을 위해 태극권도 한 번쯤 선보였다. 중국인으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부끄럽게 여기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나는 가끔 조마조마했다. 금서 작가로 유명한 옌롄커의 글을 읽기 전에도 그랬다. 

 눈에 보이는 폭력과 억압이 없었음에도 나는 불안했다. 누가 잡혀갔느니 돌아오지 않았느니, 소문만 무성했지 실체를 마주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하지만 이듬해 학교 내 마르크스 동아리가 더 이상 홍보물을 돌리지 않았고 낼모레 은퇴를 앞둔 선생님 중 한 명은 단 둘이 있을 때 우울한 이야기를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학생들은 아침 8시, 심지어 7시부터 오후 5시나 6시까지 수업 듣느라 밥 챙겨 먹기도 버거웠다. 수업에 누가 오는지 안 오는지, 선생이 바뀌던 말던 다음 주 쪽지시험이 더 중요했다. 홍콩에 대해 묻는 헐랭 한 한국인 아줌마에게 북경대는 그 어느 곳보다 자유롭게 얘기할 수 있는 곳이라고, 지식인들이 모여 허심탄회한 논쟁을 펼치곤 한다며 기분 나쁘다는 듯이 대꾸했다. 

바로 여기에 문제가 있다. 기억이나 망각과 관련된 중국식 국가 기억상실의 독특성이 바로 이처럼 반쯤 닫혀있고 반쯤 열려 있는 교묘함 속에 있는 것이다. 
                                                   [침묵과 한숨] 2장 '국가의 기억상실과 문학의 기억' 중에서 (41쪽)

 옌롄커는 80년대와 90년대에 태어나 '망각의 세대'로 정의된 이들은 스스로가 시골 출신에 농사짓는 부모를 두었음에도 중국의 거대한 부(富)를 정체성으로 삼았다. 새로 깔린 아스팔트와 그 위에 쭉쭉 자라나는 높다란 건물들로 국가의 경제적 성장을 목도했으며 인터넷에는 온갖 정보가 넘쳐났다. 그래서 그들은


 눈에 보이는 걸 믿기로 했다. 


강가의 아파트, 해 질 녘의 다리까지, 대도시의 모습은 어디나 비슷하다.

보이는 걸 믿고 

보이지 않는 걸 믿지 않는 건 

사실 이치에 꼭 들어맞는다. 눈 앞에 펼쳐진 경관을 부정하기란 오히려 상식적이지 못하다. 그래서 옌롄커는 '반쯤 열린 창문'으로 설명했다. 경제라는 창문이 열려 있으니 눈 앞에 보이는 햇살과 시원한 바람을 만끽하는 정도로 만족한다는 의미다. 

 모든 창문이 꼭 닫혀 어둠만 가득하던 시절에 비하면 반 만 열린 창문도 행복할 만하다. 하지만 인간이라면 이내 익숙해져 더 많은 빛과 더 깊은 소통을 바라기 마련이다. 반 남은 나머지 창문도 열고 싶고, 창문을 다 열고 나면 손을 뻗고 몸을 내밀어 이내 현관문을 열고 나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90년대생은 다르다. 

 중국이 앓고 있는 증상이 '국가적 기억상실'이라면, 90년대생은 망각의 상태를 넘어서 '기억의 식물인간'으로 전락했다.

 옌롄커나 담임 같은 비판적 지식인들이 빨갱이, 아니, 우파라 손가락질받는 상황은 동정의 대상이라기보다 자연스러운 역사적 정반합의 과정에 가깝다. 그러나 식물인간이라면, 가엽다고 할 수밖에.

 식물인간이 '식물'인 이유는 살아있되 움직일 수 없기 때문이다. 심장과 오장육부가 모두 멈춰 기기의 도움 없이는 숨도 쉴 수 없는 뇌사와는 다르다. 중국의 80~90년대생은 기억을 하도 많이 잃어 운동능력까지 상실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서 창문을 아무리 열어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욕구에 시달리지 않는다. 

 중국의 젊은 세대가 그 어느 세대보다도 보수적인, 아니 중국의 언어로 표현하자면 '빨간' 세대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모두 망각 덕분이다. 권위에 순응하여 경제적 안녕과 사회적 평안을 추구하는 젊은 중국은 꿈을 꾸고 있다.

 옌롄커는 묻는다. 정말로 망각의 세대냐고. 나는 답한다. 정말로 식물인간 같았다고. 누구 탓이냐고 또 물었다. 현장을 보고서도 모른 척 침묵한 사람들도 공범이라고, 옌롄커 스스로 답했다. 자신을 포함하여 기억을 갖고 있는 전 세대에게 책임이 있다고. 

 옌롄커는 강제적인 기억상실을 강간에 비유한다. 강한 남자의 폭행은 권력자가 자기 권력을 지키기 위해 흔히 취하는 조치라며 힘의 속성을 설명한다. 비참함은 옌롄커의 몫이다. 침통함을 느낄 수 없다면, 폭력의 원인을 피해자에서 찾는다면 지식인이라 하기 어렵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나는 한시도 가만히 있지를 못했던 것 같다. 툭하면 현관문을 박차고 나가 쏘다니고는 했다. 창문 밖 세상은 더없이 화창해서, 체력 닿는 데까지 밖에서 실컷 놀 수 있을 때 놀아 두었다. 요즘엔 따뜻한 커피 한 잔 손에 쥐고 긴 꼬리를 그리며 굴러내려 가는 빗방울을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한다. 

 창문틀에 소복소복 쌓여가는 눈 구경이 즐거운 이유는 자박자박 눈 밟는 소리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몸은 따땃한 담요 속에 있어도, 손 끝 발 끝이 얼다 못해 화끈화끈 가려워질 때까지 놀던 추억이 있기 때문이다. 

 창문을 여니 마니 할 것도 없이 수도 없이 안과 밖을 드나들었던 나로서는 식물인간을 불쌍하게 여길 수밖에.

이탈리아에서.

 중국의 젊은이들도 유학도 가고 여행도 가고 틱톡도 열심히 한다. 의식 없는 몸뚱이마냥 열심히 살아있다. 그래도 살아만 있다 보면 뇌사는 아니니 언젠가는 기적처럼 깨어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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