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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티제이 Jan 22. 2021

비단잉어의 탈을 쓴 이데올로기

껍데기만 남은 중국의 미술관

 중국에서는 어디 고인 물만 있다 하면 물고기가 득실득실하다. 관광지일수록 더 그렇다. 역사 깊은 곳엔 내 몸집만 한 물고기가, 관리가 좀 된다 싶은 곳엔 척 보기에도 몸값 깨나 나가 보이는 화려한 잉어가 가득하다. 처음에는 너무 놀라 사진에 비디오에 잔뜩 찍었다. 몇 년 동안 방방곡곡에서 큼직한 놈들을 마주했으니 이제는 익숙해질 만도 하건만, 아직도 놀랍다.


 더욱 놀라운 건, 미술관에도 물고기 일색이라는 사실.


 아무리 비단잉어가 좋아도 그렇지 이렇게까지?


 잉어 그림이 좋은 뜻임은 안다. 성공, 승진, 다산, 부 등등 어떻게 무엇과 함께 그려졌느냐에 따라 상징하는 바가 다 다르다. 개중에 나쁜 의미는 없고,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가치라면 무엇이든 물고기로 나타낼 수 있으니, 지금까지도 많이 그려질 만하다.

 하지만 젊은 예술가들 까지도 물고기만 하염없이 재생산하는 건 아무래도 의미심장하다.

난징의 현대미술관에서. 그나마 베이징 미술관에 비하면 상황이 훨씬 나은 편이다.

 중국 어느 도시의 미술관이던 물고기 작품 없는 곳이 없다. 그만큼 형형색색의 잉어를 모티프로 한 작품이 흔하다. 잉어가 아니라면 수묵화 기법으로 그린 현대의 일상이라던가, 유화로 대표되는 서구의 화법으로 담아낸 기와지붕 또는 소수민족 던가.

 2000년대 후반부터 지금까지 제작된 작품일수록 '동서양의 조화'에 더욱 집착한다. 중국스럽다고 생각되는 요소가 단 하나라도 들어가 있어야만 한다. 그래서인지 추상계열의 작품을 찾아보기 힘들다.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작품은,

 아무래도 '허가'받기가 어렵다.

텐진의 미술관에서. 베이징에 가까울수록 '중국색'을 더욱 짙어진다.

 국립, 시립 등의 공영 미술관에서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신청 후 심사를 거쳐야 한다. 중국의 여느 시설과 마찬가지로 심사위원 중에는 반드시 당원이 있다. 그리고 중국에서는 국가와 정당, 그리고 정부가 구별되지 않으므로, 셋 중 어느 하나를 향한 비판도 용납되지 않는다.

중국에서는 정부를 비난할 수 없어. 정부를 향한 비판은 국가를 향한 비판이고, 나라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가 돼. 그래서 정치를 비판하지 않아.
너네는 정부와 정당이 다르다고 생각하지? 중국에서는 둘을 구분하지 않는다. 젊은 애들은 구분할 줄 몰라. 그래서 과거도 비판하면 안 돼. 계속 '공산당'이었으니까.


 낼모레 은퇴를 앞둔 선생님은 우습다는 듯이 말씀하셨다.


 그래서였구나. 그 어떤 명목으로도 비판되어서는 안 되니까, 아무리 예술이라 할지라도 허락된 범위 내에서 맴돌 수밖에 없었구나. 중국이 정의하는 중국에서 벗어나서는 안 된다.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사람도 있겠으나 심장부에 가까워질수록 더욱 어려운 일이다. 베이징 미술관은 온통 홍색(붉을 홍'紅' 자체가 공산당을 뜻한다) 일색이다.

https://www.mct.gov.cn/gywhb/jgsz/bjg_jgsz/

 중국의 모든 행정기구 내에는 '감찰국'과 '기관당위' 즉, '기관 내 공산당 위원회'가 필수로 갖춰져 있다. 해외교류 쪽에는 '프로파간다 선전'을 당당하게 공식 명칭으로 삼은 기구도 있다. 이러한 기관은 연구비 지원 여부 심사 등 돈 들어가는 일에 반드시 개입된다.

 예술에는 돈이 필요하다. 내 돈 들여 내가 알아서 하겠다고 한다면, 베이징 798처럼 당에서 돌아올 불이익을 두려워할 필요가 적은 외국인 소유 갤러리를 알아봐야 한다. 이마저도 옛 일이다. 798 예술구는 국가에서 지정한 '예술특구'가 된 뒤로 여느 공공미술관과 다름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많은 중국 현대미술의 거장들이 해외로 떠났다. 젊은 신진 예술가들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는다. 통제된 사회 속에서 나고 자란 90년대 생은 80년대, 70년대 생보 다도 보수적이다. 좋게 말해 보수적이지, 실상은 문제제기를 할 줄 모르는 것뿐이다. 문화대혁명 전후를 겪은 중장년 세대의 깊이와 폭을 따라잡기엔 난망해 보인다.

유적지 내 연못의 크고 작은 비단잉어. 빠져나갈 길도 없이 하염없이 같은 자리만 맴돈다.

 '사실적 사회주의'계의 거장인 쉬빙은 알파벳으로 한자를 만들고 한자로 한자를 만들고 돼지에 글자를 쓴 걸로 유명하다. 한자로 만든 체인에 묶인 양이나, 자이언트 판다로 꾸민 돼지 등은 모두 2000년 이전의 작품이다. 베이징의 고도성장 뒤에서 소외된 노동자들을 주제로 하는 작품 '불사조(pheonix)'는 모두 외국에 가있다.

 요즘의 중국의 미술관에서 접할 수 있는 작품이란 꽃, 새, 물고기, 그리고 다시 잉어, 기와지붕, 모란, 노동자, 도시, 가족, 미녀, 그리고 비단잉어 떼. 추상 모티프의 작품전이라도 말미에는 반드시 중국을 드러내는 요소가 하나쯤은 있어야 한다. 그것도 매우 밝고 긍정적인 방식으로.


 작가가 자신의 정체성을 작품에 녹여내는 한 중국인이 중국을 표현함은 당연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많고 많은 작가들이 이렇게도 천편일률적인 방식으로 자신이 중국인임을 드러내는 현장을 보고 있자면 약간 무섭다.

 큐레이터의 검열을 거른 결과일까? 아니면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는 걸까? 흙땀을 흘리는 노동자들의 미소는 아름답고, 거칠게 부르튼 농민들의 손은 따스하고, 중국의 유구한 역사는 자랑스럽다고? 찬란한 햇살이 부서지는 스캐필드 틈으로 비치는 도시에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 얽힌 착취와 비극을 그리는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음은 이해하기 어렵다.

검열이나 진심이나 둘 다 두렵기는 매한가지다.

 요즘 20대는 중국의 어두운 면을 다룬 영화를 찍은 감독을 면전에서 비판한다. 중국은 엄청나게 발전했는데, 왜 굳이 낙후된 부분만 강조해서 찍었냐고, 외국에서 중국을 어떻게 생각하겠냐고 따진다. 미술관에서 만난 작품 역시 진심일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이 또한 현대 중국을 반영하는 거니까, 진정성이 다분하다고 인정해야 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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