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티제이 Feb 05. 2021

남편과 싸우는 이유를 깨달았다

너는 네 발 밑을 안 보기 때문이다

"어, 잠깐"

"으아아아아아악!! 어이 쒸 뭐야 이거"

"허허 고맙지?"

"와 씨 완전 이거 레트라 무서워 무서웠어 어우"


 어느 겨울 다롄에서, 나 아니었으면 신랑은 죽은 쥐를 정통으로 밟을 뻔했다. 그전까지는 내가 그를 멈춰 세울 때마다 어찌나 미간을 구겨대던지. 이제는 말없이 그를 툭 밀쳐내도 고분고분하다. 생각 없이 디딜 뻔 한 자리에는 어김없이 밟지 말아야 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발 디딜 자리 대신 너는 앞을 본다. 건물을 보고 랜드마크를 찾는다. 동서남북도 대략적으로나마 항상 염두에 두고 있다. 길치는 나만 잘 따라오면 된다며 승승장구다.

 나는 길치다. 동생이 많이 당했다. 언니 어디야? 근처에 뭐 있어?라는 전화에 나는 응, 자전거 타고 지나가는 사람이 보여, 라며 진짜 바로 눈 앞에 보이는 현장을 묘사하는 사람이다. 동생은 매 번 알았어 언니 그냥 가만히 있어, 내가 갈게,라고 하고, 길치는 응! 하고 고분고분 말도 잘 듣는다.

 미아가 되면 움직이지 말라고 배웠다. 모범생이니까.

시안(서안)에서. 근처에 뭐가 보여?라는 질문에 응, 흰 오토바이가 있어,라고 답해주는 것이 길치의 덕목이다.

 스스로 길눈이 어두운 걸 알기에, 여행을 앞두면 제일 먼저 지도부터 외웠다. 대학교 새내기 시절, 친구들과 유럽여행을 갔을 때도 그랬다. 스마트폰도 없었으니 인터넷에서 찾은 여행지도와 가이드북 부록 지도를 대조해가며 골목 이름까지 딸딸 외우면서 루트를 짰다.

 덕분에 길치는 용케도 길을 잃지 않았고, 친구들은 아직도 내가 길치라는 사실을 믿지 않는다. 극복 가능한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므로, 나는 여행이 두렵지 않다.

 남편은 그다지 동의하지 않는 듯 하지만.

현존하는 중국 내 회교사원, 즉 모스크 중 가장 오래된 '대청진사' 앞에서. 골목에서 헤매는가 싶었는데 어느새 도착했다.

 중국 여행하는 내내 폰에 지도를 띄워 놓고 이리저리 돌려 보는 나를 두고 신랑은 한숨을 쉬었다. 딱 보면 저쪽인 거 모르냐고. 지기 싫은 마음에 알아도 다시 한번 확인하는 것뿐이라는 대꾸가 저절로 나온다. 매 여행마다 똑같은 이유로 갈등을 빚는다.

야. (그리고 이름 석자). 말투 고치라고 내가 대체 몇 번이나 말했냐? 왜 '또' 화를 내고 그러냐고? 화를 내야 네가 듣는 척이라도 하잖아. 나 화 잘 내는 사람으로 생각하는 거 세상에 너밖에 없어. 야, 내 가족, 친구, 지인들 다 쫒아가서 물어봐.

 똑같은 레퍼토리 질리지도 않는지. 남들은 결혼하면 잘 먹어서 살찐다는데, 신혼 초에는 스트레스가 너무 심해서 연예인 몸무게 찍고 돌아왔다. 이유는 한결같다. 말투, 태도. 다른 누구도 아니고 배우자가, 그것도 가당찮은 이유로 나를 함부로 대하는 건 참을 수 없다.

 나의 요구사항도 한결같다.

 그러나 그는 발 밑을 보지 않는 사람이다. 대신 앞을 본다.

면산에서. 올라가자고 한 건 본인이면서(나는 분명 안 가도 된다고 했는데) 짜증은 나한테 낸다.

 내가 화를 내면 그는 애교를 부린다. 포옥 끌어안고 사랑한다고 왱알왱알, 다행히 같이 목청을 드높이지 않는다. 내가 성량이 워낙 좋으므로 제까짓게 들이대 봤자 소용없기도 하다.

 하지만 애교도 하루 이틀이다. 궁극적인 원인이 해소되지 않으면 같은 문제가 반복될 뿐이다. 들러붙는 신랑을 억지로 떼어 놓고 차분하게 말을 할라 치면, 못 들은 척 다른 화두로 말을 돌린다.

 이렇게 도망간다고? 그렇게는 안 되지.

 하지만 그는 앞을 보는 사람이다. 죽어라고 앞만 볼뿐, 밑을 보려 하지 않는다. 뒤는 더더욱.

반대편 끝에 절벽을 오르는 엘리베이터가 있었는데, 몰랐다. 내려올 때는 엘리베이터를 탔다.

 신랑은 겁이 많다.

 유툽에서 비행기 추락 영상을 한참 보더니 한 동안은 비행기를 탈 때마다 호흡이 가빠지고 식은땀을 엄청 흘렸다.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오를 때면 굴러 떨어질까 봐 잔뜩 긴장해서 아 좀 저리 좀 가라고!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어따 대고 성질이냐고 똑같이 버럭 해줬더니 요즘은 좀 나아졌지만, 태산의 그 유명한 계단을 오를 때 만 해도 아주 가관이 따로 없었다.

 발만 보고 올라와도 될 텐데, 아래를 내려다보기가 두려워서 시선을 떨구지를 못했다. 뒤를 돌아보는 건 말할 필요도 없다. 앞을 볼 줄 아는 눈에는 삐끗하는 순간 굴러 떨어지는 미래가 끊임없이 보였나 보다.  

 밑도, 뒤도 보지 않는 남편은 사실 무서워서 보지 못하는 거였다.

타이위안의 대불 앞에서. 계단을 '오른다'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하다 보니, 중국 관광지 중에는 이런 계단이 꽤 많다.

 그의 업무 환경에는 딱이다. 그는 문제 하나 터졌다고 어떡하지 어떡하지 발만 동동 구르는 사람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사고가 터지면 수습하고 발 빠르게 대안을 내놓는다. 향후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대책을 누구보다도 빨리 내놓을 줄 아는 사람, 뒤따를 차질, 적절한 대책을 그릴 줄 하는 사람임은 분명하다.

 이미 엎질러진 물일 때, 먼 앞 까지 볼 수 있는 시야가 빛을 발한다. 시선이 고정되어 있다 보니 바닥의 죽은 쥐나 개똥을 밟을 순 있겠지만, 어쨌든 길은 잃지 않으니 감수하고 간다. 비 온 뒤 잔뜩 기어 나온 달팽이도 다 밟고 간다. 벌레 안 밟으려다 계단에서 넘어지는 것보다는 낫다.

 10분 만에 갈 길 30분이 걸린다고 하더라도 나는 달팽이를 빠그작 빠그작 밟고 갈 수 없다. 계단에서 위험하게 이러지 말라고 너는 나를 다그치지만, 나는 내 발바닥 밑에서 다리를 타고 올라오는 벌레의 죽음에 소름이 끼쳐 미끄러질 사람이다.


 이미 화가 난 걸 없던 일로 할 수 없으므로, 너는 애교를 부린다. 나는 갈등의 밑바닥을 확인해야 한다고 너를 멈춰 세우지만 너는 지나간 일 보다 미래가 중요한 사람이다. 의미를 갖지 않는 과거는 발목을 잡지 못한다. 지나간 일들에 짓눌리지 않는 네가 부러우면서도 차마 닮지를 못해서, 여전히 길눈이 어둡다.

나는 여전히 화를 내고 너는 여전히 짜증을 내고 우린 또 서로를 답답해하지만,
그런대로 또 부부로 살아간다.

 서로의 다른 점이 서로의 모자란 부분을 보완한다고 생각해서는 아니다. 그건 이상적인 부부의 모습이라기보다는 상대에게 의지하고 싶은 마음에 가깝다고 믿는다. 세상에 내 부족함을 채워주기 위해 존재하는 사람은 없다.

 결혼은 불안하지 않을 때, 외롭지 않을 때, 흔들리지 않을 때 해야 실수하지 않는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 커플은 좀, 둘 다 자아가 '너무' 확고한 걸지도 모르겠다. 나도 슬슬 랜드마크를 보고 다니고 너도 가로수 밑 노오란 냄새를 풍기는 은행알을 확인하고 발을 디디니 어쩌면 우리는 서로에게 어떻게든 의지하지 않으려고 격하게 노력하는 중인 걸까.



커버 이미지 출처 : https://unsplash.com/photos/2qXNT7LMfpY

작가의 이전글 할머니와 로봇청소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