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생 김지영(Kim Ji-Young, Born 1982, 2019)
페미니즘에 대해, 혹은 '페미니즘적으로' 말하는 것은 언제나 어려운 일이다. 여성으로서든 남성으로서든 언제나 너무 적게 말하거나, 너무 많이 말하게 된다. 여성으로서 내 경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지나치게 사적인 것이 되기 쉽고, 인간으로서 여성 일반에 관해 이야기하는 것은 아무것도 이야기하지 않는 것과 다를 바 없이 뜬구름 잡는 것이 되고 만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남주의 『82년생 김지영(2016, 민음사)』을 읽다 말았다. 사적이지도 뜬구름 잡는 느낌도 아니었기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섣불리 말하기 힘들지만, 내가 이전부터 읽었던 소설로서 갖추어야 할 '장르성'이라고 해야 할까, 정확히 꼬집을 수 없지만 기대했던 부분과 많이 다르다고 느꼈기 때문에 몇 장 읽지 못하고 내려놓았다.
영화를 보고나서도, 물론 많이 울었지만, 처음 든 생각은 그래서 이게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한참을 생각했다.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얼른 글로 쓰고 싶었지만, 생각이 쉽게 구체화되지 않았다. 다시 생각했다. 왜 나는 아무 의미도 없다고 느꼈는가. 영화 내에서 김지영(정유미)은 어떤 병을 앓고 있다. 대현(공유)은 이를 목격하고 놀라 지영을 하루 빨리 병원에 보내려고 하지만 그것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간헐적으로 드러나는 지영의 증상은 빙의처럼 보이고, 지영이 이에 대해 전혀 자각이 없다는 점에서 심각해 보인다. 빙의 증세를 보이는 첫 장면은 놀랍고 궁금증을 유발하지만, 그것이 거듭 반복되는 지점에서 나는 조금 몰입에 실패했다. 후반부에 이르러 내 옆자리에 있던 관객은 실소를 터뜨리기도 했다. 그래서 고민했다. 이런(조금 과하게 느껴지는) 설정은 왜 필요했는가. 고민하다가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와 같은 증상을 지영이 직접 겪었기 때문이라고. 이것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다. 82년생 김지영의 이야기다.
지영은 전업주부로 아이와 시간을 보내다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본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 지영은 무엇을 찾으려고 했을까. 때때로 우리는 문제에 부딪혔을 때, 자신의 잘못이나 원인을 찾기 위해 과거를 짚어본다. 그리고 원인 비슷한 것을 찾아내 가정해본다. 이때로 돌아간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어떻게 하는 것이 최선의 선택일까. 하지만 다시 벽에 부딪히고 마는 때가 있다. 내가 선택하지 않은 것이 문제의 가장 큰 뿌리일 때 그렇다. 젠더 문제가 민감하면서도 심각하고, 그럼에도 항상 한계에 부딪히는 이유는 사실상 우리가 생물학적 성을 선택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는 태어난다. 크게 이분화할 때, 여성 혹은 남성으로. 김지영이 보낸 여성으로서의 삶은 특별하거나 이상하지 않다. 영화에서 병으로서 드러난 증상의 원인을 따라가다 보니 지영이 겪은 사건의 나열은 다소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데, 이는 여성이라면 겪을 수 있는 일이기도 하면서, 여성이지만 겪을 수 없는 일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여성으로서의 삶에 크게 불만이나 불편을 느끼지 못하는 여성들도 많으며,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여성이라는 보통 명사로 묶이기에 우리는 너무 개별자다. 이것은 김지영의 이야기다. 다시 말하면 이것은 어떤 여성에 관한 이야기이고, 다시 쓰여진다 해도 어떤 '남성'에 관한 이야기는 될 수 없다.
지영이 더욱 고통스러운 이유는 주위의 남성들이 나쁘지 않은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남편도, 남동생도, 아버지마저도 그렇다. 그들은 먼저 행동하거나 알아주지 않지만 그래도 말을 하면 듣고, 자신이 해야 하는 행동을 한다. 하지만 확실히 그들은 좋은 사람이 아니다. 지영의 병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면 그들은 지영의 고통을 알았을까? 빙의 증세는 이것 때문에 필요했다. 말로는 잘 표현하지 않는 지영이 자신의 고통과 아픔을 겉으로 보여줄 수 있는 최선이지만 최악의 방식으로서. 지영은 감정을 뿜어내기보다는 감추고 파고드는, 자신을 이해시키려 하기보다는 타인을 생각하고 이해하려는 사람처럼 보인다. 고민하고 생각하다 지영은 그 사람이 되어본다. 자신의 엄마(김미경)도 되어보고, 엄마의 엄마(예수정)도 되어보고, 출산을 하다 죽은 대학 선배도 되어본다. 자신의 삶을, 지금의 자신을 이해하기 위해서.
하지만 이런 방법은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되기는커녕 병을 악화시킬 뿐이다. 지영은 지영의 엄마도, 엄마의 엄마도, 죽은 대학 선배도 아닌 지영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침내 지영은 자신에 관해 쓰기 시작한다. 최선은 아니지만 최악의 방식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지영은 지영에 대해 더욱 알아가야 한다.
당신이 82년생 김지영을 보면서(혹은 보지 않으면서) 무슨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다. 나는 미혼이며, 임신과 출산을 경험한 적이 없고, 인사상 불이익을 겪을만한 직업을 갖고 있지 않으며, 아직 경력 단절에 대해 고민할 나이가 아니다. 그래서 지영의 삶을 돌아보며 가슴 사무치게 공감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몰카에 대한 불안을 가지고 있고, 대중교통에서 성추행을 당해본 적 있으며, 명절이면 남성인 친척들이 앉아있는 상으로 음식을 나른다. 나는 김지영이 아니다. 그래서 김지영을 모른다.
나는 자주 인간의 공감 능력에 대해 회의하고 체념한다. 우리는 겪어본 적 없는 일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할 수 있을까. 그래서 여성들은 여성에 대해서도 잘 공감하지 못한다. 우리의 경험이 모두 같지 않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젠더 문제에서 남성이 군대 이야기를 빠뜨리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그것이 남성의 공통경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성에게는 이처럼 하나로 묶일 수 있는 교집합이 생각보다 많지 않다. 출산은 선택이며, 유리천장은 말 그대로 유리천장이라 직접 부딪혀보기 전에는 느끼지 못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야기를 나누고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그 사람이 될 수 없기 때문에, 그 사람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하고 되짚어보아야 한다. 나는 남성이 아니기 때문에 남성의 고통에 대해서 모른다. 그렇기에 쉽게 얘기하지 않겠다. 당신은 김지영을 아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