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파랑새의숲 Dec 24. 2023

내 마음 힐링 센터 - 페루자와 아씨씨

사람들은 피렌체 다음으로 보통 베네치아나 밀라노, 아니면 로마로 간다. 

'전 페루자 가려고요.'라고 하면 사람들 반응이 전부 '으.. 응? 거기 뭐가 있는데? 안정환 좋아해?' 

'.... 안정환 별론 데요. 글쎄요..? 꼭 뭐가 있어서 가나요? 그냥 관광지 말고 사람 사는 동네가 가고 싶어서요...'

그래도 뒤통수에 꽂히는 쟤 페루자엔 왜 간다니??라는 모두의 의아한 눈들을 뒤로하고, 난 페루자로 갔다.  

이탈리아어 한마디 못하면서, 빈 열차에 나 혼자 타고.... (초 극성수기 7월인데도 진짜 사람 없더라........) 


페루자, 아씨씨 지방은 이탈리아의 중부, 움브리아 지방이다. 이탈리아에서도 굉장히 특이한, 아주 평온하고 사람들이 온화한 지역으로 유명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순박한 강원도 지방에 비유할 수 있다는 말을 들었던 듯. 


정말 거칠디 거친 로마 사람들이나, 콧대 높은 피렌체 사람들과는 달리, 움브리아 지방 사람들은 정~ 말 친절하다. 


역 앞에 걸린 마을 지도를 보면 웃음이 나온다. 귀여워서. ^^ 



문제는... 로마나 피렌체처럼 관광도시가 아니다 보니, 영어를 할 수 있는 인구가 전무하다는 데 있었다. -_-; 

나는 손짓 발짓으로 내 숙소까지 데려다 달라고 버스기사에게 주소를 들이민다. 버스기사가 뭐라 뭐라 짜증 내 한다. 

나는 그냥... 바보처럼 응? 뭐라고? 나 여기 데려다 달라고! 이탈리아어 못한다고.. 만 되돌이표 반복한다. 

그러면... 버스기사가 한숨 쉬며 말 안 통한다고 답답해하다가..... 할 수 없이 숙소 앞까지 데려다준다. 

그럼 생글생글 감사하다고 인사하고 냉큼 내리면 된다. 냐하하하하하 ~ (미안하다. 이탈리아어 못해서..) 


페루자까지 흘러온 떼베레 강. 


초 극성수기에도 호스텔에 손님은 나 혼자였다. 그래서 그 큰 방을 나 혼자 통째로 쓰는 행운을 ^^v 

숙소에서 바라본 뒷마당... 


휘적휘적 밥을 먹으러 나간다. Beer를 달라고 했더니 , 아~ Bira? 라면서 들어간 웨이트리스가 맥주를 가져다준다. 서로 눈치만 있으면 주문도 쉽다. 꼭 말이 통해야만 여행을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조금 소통이 어렵긴 해도.. 


페루자에서 아씨씨는 15~20분밖에 걸리지 않는 가까운 거리. 성 프란체스코의 고향인 아씨씨로 기차 타고 또 혼자 출발. 기차에 내렸더니.. 이런 논밭이다. 아름다운 황금물결 들판... 



갑자기 어린 왕자와 여우가 생각이 났다. 


"네가 나를 길들인다면..... 네가 4시에 온다고 하면, 나는 3시부터 너를 기다릴 거야. 아마 황금 들판을 볼 때도 나는 네 금빛 머리칼을 떠올릴 거야."...  



멀리 보이는 게 당연히 이 씨씨겠지...? 혼자 추론하며 무작정 걸어간다. 어쩜 이 도시에 나밖에 없는 느낌일까. 다른 관광객들은 없는지 그 아름다운 들판을 나 혼자 구경하며 걸어갔다. 이런 한적한 느낌, 너무 좋은데.......... 


집들도 너무 평화롭고 예뻐 보여 슬금슬금 들여다보면서. 



황금들판 보면서 왜 황금들판- 어린 왕자와 여우 이야기 



와.... 이 도시는... 살고 싶은 곳이구나.. 라며 감탄에 감탄을 거듭한다.... 

나... 여기 살면 안 될까..... 저 테이블하며, 파랗고 보송한 잔디 하며, 아기 미끄럼틀하며.. 




평화로운 도시구나.. 성 프란체스코가 동물을 사랑하고, 청렴하기로 유명했던 성인이었다는데, 그를 존경하는 동네답구나..


아씨씨는 진정 살고 싶은 동네였다.. 



혼자 걸어가는 1시간 반 동안, 쭉 뻗은 길 따라 나 혼자 걷는데도, 여기가 맞는 길인가? 왜 사람이 없지?라는 불안한 마음 없이 유유자적 너무 평화로웠다. 따스한 햇살이 나를 계속 따라오는 느낌.... 



이 길을 따라 걸으면 마을이야..라는 믿음이 전혀 흔들리지 않는 이상하게 평온했던 혼자만의 길. 



내가 찾던 곳이 이탈리아의 움브리아 지방에 있었구나. 따뜻하고 평화롭고 여유 있는 곳.. 

참.. 따뜻하고 평화로운 도시. Assisi.... 역에서 휘적휘적 천천히 두 시간 즈음을 걸어 마을에 도착했다




타임머신 타고 과거로 돌아온 느낌이다. 수녀님도 계시고, 관광객도 많지 않은.. 정말 중세도시 느낌. 



널찍한 느낌으로 설계되어 있는 성 프란체스코 성당... 마당이 너무 널찍하니 뭔가 여유로움이 느껴진다. 

구름과 하늘도 예술.. 



와우.. 제주도의 올레길에서 이런 비슷한 풍경을 봤더랬지.. 하늘에 뭉게뭉게 구름이 떠 있는 것도 예술. 그냥 우와 ~ 



하늘과 논밭을 합성해 놓은 것처럼 너무 아름답다. 내가 저 논밭을 쭈욱~ 걸어온 거였구나... 



살고 싶다. 살고 싶다... 이런 곳에서 정말 한 달만 살아봤으면 좋겠다.... 


너무 좋아서 불경스럽게 성당 난간에 누워있는 나를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사진 찍어주겠단다. ㅋㅎ

난 좋으면 왜 이렇게 드러눕고 싶은지... 저 자리가 너무 좋아서 떠날 수가 없더라.. 선글라스만 있었더라면 좀 더 오래 버티고 누워있었을지 모를 일. 



아기자기하고 평화가 절로 느껴지는 귀여운 성 프란체스코 성당. 마당에 PAX(평화)라는 나무 모양이 너무 잘 어울린다..... 


뒤편으로 돌아가는 길이 있길래, 무작정 또 올라간다. 뭉게뭉게 구름에 홀리듯이. 




이때만큼은 여행하면서 들었던 잡념 같은 것이 사악~ 사라졌다. 그저 평온한 기운이 감도는 땅. 사람과 지역에도 궁합이 있다고 하던데, 아씨씨에서는 고민 없이 평온하게 지낼 수 있을 것만 같다. 



조용하지만 지루하지 않고, 도시이지만 번잡하지 않다. 깔끔하지만 황량하지 않고, 인적이 드물지만 외롭지 않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혼자 이런 길을 걷다 보면 살짝 두려울 만도 한데,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이 그냥 땅이 나를 감싸안는 느낌이랄까. 


끝까지 걸어가다가 한 남자를 만났다. 



슬리퍼를 신고 걸어오고 있는 남자는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신부 준비생이라 했다. 영어가 통해서 너무 반가워서 이것저것 말을 시킨다. 어디 사니? 여기서 뭐 하니? - 페루자에 살아. 저기 위에 있는 성에 가보고 싶어서 지금 걷는 중이야. 아씨씨에 온 걸 보니 넌 가톨릭 신자인가 봐? 


아니, 그냥 구경 왔어. 이 동네 진짜 좋다....

 - 응, 움브리아 지방은 원래 이래. 그럼 난 이만 성으로 올라가 볼게. 여행 잘하고 조심하렴. 


정말 담백하고 친절한 신부 준비생. 슬리퍼를 신고 험한 산속으로 사라졌다... 


뭔가 비범한 사람을 스쳐 지나가듯 만난 기분? 슬리퍼 신고 저 산속으로?? 그 남자는 신기한 신부님이 될 것 같아.... 


내가 발견한 다음 목표. 산 꼭대기에 있는 요새로 추정되는 건물이다. 가는 길은 잘 모르겠으나 일단 올라간다. 열심히 기어 올라가다 뒤돌아보니..! 


와아~ 경치 끝내준다.........


이렇게 논밭이 귀엽고 알록달록하다니..  오솔길 찾아 굽이굽이, 이쪽으로 가면 저 요새 성으로 갈 수 있을 거야. 청명한 숲 속을 지나가면서 마음이 설렌다.. 난... 꼭대기를 좋아하나 봐. 정상에서 내려다볼 마을 경치는 어떨지 상상하면서..  


요새 진입로 무사히 발견. 몇백 년이 훨씬 넘었다던데, 정말 견고하다.  


설레는 맘 진정시키며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이런 섬뜩한 마네킹들이 서 있어서 깜짝 놀랐다..  


당시 사람들의 저녁 만찬 풍경을 재현해 놓은 것.. 그런데 얼굴도 좀 그려 넣지.. 눈코입 없으니 정말 섬뜩하다.. 그들이 나를 모두 주시하는 것만 같아서 조금 무서웠지만, 그래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신기해서 기웃기웃.  



요새의 최고의 전망대로 향하는 길. 딱 내 키만큼의 통로다. 옛날에는 망보는 단 한 명만 지나갈 수 있도록 통로를 일부러 좁게 만들었다고 한다. 적들이 들어온다 해도 칼을 뺄 수 없도록, 여러 명이 한꺼번에 밀려들어올 수 없도록 하기 위해서다. 신기한 건.. 채광이었다. 밖에서 보면 구멍이 조금 나 있을 뿐인데, 안쪽으로 가면서 면적이 넓어지는 형태를 띠고 있어서 안은 햇빛이 있는 동안은 전혀 어둡지 않았다. 이 기나긴 통로를 지나는 동안... 옛날 사람들의 자취를 느끼느라 기분 야릇.  


긴 통로를 통과하고 요새 끝에 오르면, 이런 절경이 펼쳐진다. 앞으로는 마을이 한눈에 보이고.  

뒤로는 계곡으로 적이 침입해 오는지 살필 수 있도록 한눈에 계곡을 감시할 수 있는 시야 확보.  


바람이 거세도.. 나는 즐겁다. ^0^ 내가 망보는 고대 군인이 된 느낌. 마을 이상 무.   

뒷동네.. 산 계곡도 이상무. 적군 없음 오버.  


요새 잔디밭에 드러누워 일광욕하는 젊은이들도 아름답고, 나이 먹은 튼튼한 요새도 너무 아름다웠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돌아 내려오는 길. 다정한 할아버지 할머니가 서툰 영어로 내게 말을 거신다. 

이 바닥에 전 세계에서 보내온 사람들의 이름이 적힌 벽돌로 깔려 있는데, 봤느냐고. 

자세히 보니, 밀라노, 캐나다, 스위스, 독일 등.. 정말 전 세계 가톨릭 신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벽돌로 깔려 있었다. 다정한 할머니 할아버지.... 역시 난.. 움브리아 지방 스타일인가 봐.  


돌아오는 길. 날개를 다쳤는지 차가 다니는 길 위로 뒤뚱뒤뚱 걸어가고 있는 나비를 발견해서 허겁지겁 집어 왔다. 아직 건강하네? 예쁘고 신기해서 한참을 들여다봤다.. 

성 프란체스코는 동물을 사랑하셨다지.... 그 점으로 봐도 난 이 동네에 딱 맞는 것 같아.  



나비 날개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그래야 날아다니지. 

나비는 날개 근육을 되찾고, 사람인 나는.... 마음의  근육을 되찾고.  

날개 접고 뒤뚱뒤뚱 도로 한복판을 걸어가던 내가 살려준 나비... 

그때부터 나비가 너무 사랑스러워지기 시작했다.  

아씨씨... 평온함과 여유. 그리고.. 도시 전체에 감도는 사랑을 느끼고 풍만해졌다. 


지금도, 다시 한번 꼭 방문하고 싶은 곳을 꼽으라면 이탈리아, 그 아름다운 나라의 움브리아 지방 소도시들이다. 페루자, 아씨씨, 씨에나.. 


#유럽여행기

#퇴사여행기

#이탈리아여행기

#페루자여행기

#아씨씨여행기


이전 16화 세계 축제 속에 낯선 이방인, 이탈리아 씨에나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