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사이 : 여보, 무거운 그 가방 당신 거 아니야

중립이란 이름 뒤에 숨은 책임감, 죄책감의 진짜 주인공 찾기

by 파랑새의숲


이제, 우리 그만하자

이 이상한 삼각관계


나는 결국 결심했다.
이 이상한 삼각관계를 끝내기로.


내 남편의 아내가 되기 위해

누군가와 평생 애정 경쟁을 벌여야 한다면,
이제 그런 사람 곁에 남아 있기 싫었다.


나의 자리를 두고 어머니와 은밀한 신경전을 하고,
그의 아내가 되려 그의 어머니까지 품어야 하는 삶

그래도 남편과 뭔가 연결되는 느낌이 없는 부부관계
더 이상 지속하기가 버거웠다.


나는 그의 삶의 동반자가 아니라,

그의 부속품일 뿐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심지어 내가,
그저 그 아들이 어머니의 ‘장성한 멋진 아들’이 되는데
이용당한 건가 라는 생각이 들어 슬퍼졌다.


차라리 혼자가 낫겠다고 생각했다.
누군가의 시선을 얻기 위해 애쓸 필요 없이,
내 자리에서 온전히 숨 쉴 수 있는 쪽이 나았다.


그 결심은 단순한 분노나 상처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제는, 내가 선택한 관계에서조차
내가 ‘선택받은 사람’이 아님을 분명히 깨달았기 때문이다.


혹자는 ‘아이 때문에 산다’고 말하지만,

오히려 아이 때문에 이 길을 지속할 수 없었다.


혹자는 그냥 아들이나 하숙생이라 생각하며 산다 했지만

나는 그런 무의미한 관계를 지속할 자신이 없었다.


나는 그 길이 오히려 아이에게 이 아픔을

가장 빠르게 전가하는 길이라는 걸 안다.
그 아이는 또다시 나의 대리배우자가 될 가능성이

아주 높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결심했다.
우리의 사랑을 지속하려면 감수해야 한다고 강요받아 온

극진한 모성애와 착한 아들이라는 가면을 쓰고 있는
그 이상한 삼각관계에서, 이제는 벗어나기로.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물에 빠지면

누구를 먼저 구할 건가요?


정신과 수련 초입,

면접이나 교육 현장에서 통과의례처럼 던져진다는 이 질문.


방송이나 여러 매체를 통해 많이 알려졌지만,
여전히 ‘애정의 크기를 재는 유치한 농담’쯤으로

오해되기 쉽다.


하지만 이 질문은 단순한 애정 테스트나 장난이 아니다.


정신적 독립의 문턱에서,

당신이 어디쯤 서 있는지를 가늠하는 질문이다.


성인으로서의 선택과 책임의 우선순위를 묻는,
꽤 철학적인 질문이다.


운명과 선택, 어머니와 아내


어머니는 태어날 때부터 주어진 운명적 관계다.
그래서 많은 이들이,

운명은 벗어날 수 없는 의무와 책임이라 여긴다.


아내는 성인이 되어 주체적으로 선택한 선택적 관계다.
그래서 어떤 이들은,

애정의 크기에 따라 책임도 선택할 수 있다고 착각한다.


그러나, 사실은 그 반대다.


운명은 나의 의지와 상관없이 주어진 것이기에,
원한다면 거리를 두거나 역할을 재정의할 수 있다.


하지만 선택은 나의 의지로 만든 것이기에,
그 순간부터 책임은 끝까지 따라붙는다.


내가 선택한 관계에 책임을 지는 것,

그것이 바로 어른의 자리다.


그리고 그 선택에 책임지지 못했을 때,
마땅히 따라와야 할 감정이 있다.
그것이 바로 죄책감이다.


문제는, 이 책임감과 죄책감의 화살표가

올바른 방향을 가리키느냐이다.


여전히 부모를 향해 있다면,

나는 아직 ‘아들’의 자리에 머물러 있는 것이다.
그 화살표는 내가 선택한 사람,
지금 내 곁에 있는 ‘나의 여자’에게 꽂혀야 한다.


유교적 집단주의에서 벗어나고 있는 요즘,

남편의 책임감과 죄책감이 향해야 할 곳은

자신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아내다.


그리고 이 자리에 온전히 서기 위해
반드시 선행되어야 할 것이 있다.


바로 부모로부터의 정신적, 정서적 독립이다.



잘못된 책임의식과 죄책감,

도대체 어디로부터 온 걸까.


근대 심리학의 기초를 세운 지그문트 프로이트(Sigmund Freud, 1856~1939)는,

인간의 마음을 의식·전의식·무의식으로 구분하고,

무의식 속에 억압된 욕망과 기억이

우리의 생각과 행동을 결정한다고 보았다.


그는 가족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 아들의 정신 발달과정을 설명하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pus Complex)라는 개념을 제시했는데, 여기서 아이들의 잘못된 죄책감의 근원을 일부 찾아볼 수 있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란 (여성의 경우 일렉트라 콤플렉스),

아들이 성장 과정에서

아버지를 무의식적으로 경쟁자로 여기고,

어머니를 정서적·애정적 대상으로 삼는 심리 구조를 뜻한다.


성장하면서 이 갈등이 건강하게 해소되지 않으면,

성인이 된 뒤에도 어머니에 대한 죄책감과 보호 본능이

배우자와의 관계보다 우선하게 된다.


여기에 또 하나의 층위가 있다.

외로운 어머니이다.


외로움을 해결하기 위해 자녀가 필요한 어머니가

아들을 성장하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의 정서적 부재로 정서적 과부가 된 어머니가,

한때 사랑했던 남편을 닮은 자식에게 애정을 쏟으면서,

그 애정 속에 은밀히

남편과 자신의 행동 결과에 대한 책임을

아이에게 떠넘기는 것이다.


“네가 내 편이 돼야 해.”
“네가 나를 이해해 줘야 해.”

"넌 내 자식이잖니"


그 순간부터 자식은 더 이상 ‘아이’가 아니라,
어머니의 감정을 받쳐주는 대리 배우자가 된다.


이 관계가 아이에게 계속 당연시되어 오래 지속되면,

그렇게 책임감과 죄책감의 화살표는

나의 배우자가 아닌 어머니 쪽으로 잘못 자리 잡는다.


그러나 우리가 불필요한 책임감과 죄책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이 있다.


아이는 독립된 몸을 가진 ‘남’이다.

내가 그를 나라고 생각할 때, 사랑은 폭력이 된다.


부모의 삶은 부모가 선택한 결과이며,

그것은 자녀의 책임이 아니다.
나와 배우자가 만나게 된 것은 아이의 선택이 아니고,
아이 역시 세상에 태어나기로 스스로 결정한 적이 없다.


마찬가지로,

나와 배우자의 관계가 틀어진 것, 지금 내가 외로운 것은

아이의 책임이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아이가 우리에게 되물어야 할

우리 부모의 책임이 될 것이다.


따라서 죄책감과 책임의 화살표는 부모가 아니라,

내가 선택한 배우자를 향해야 한다.


어머니는 ‘아버지의 여자’였고,

아내는 ‘나의 여자’다.


지금 우리가 성인으로서 책임져야 할 사람은,

나의 의지로 내가 선택한 사람, '나의 배우자'이다.


중립의 환상, 그리고 방관을 위한 변명들


“나는 중립이야.”
“그럼 우리 엄마는 어떻게 해?”
“나는 누구 편도 들지 않아.”


여기에 더해 어쩔 수 없는 중립에 대한 변명은 다양하다.

“아버지가 안 계신데, 그럼 내가 대신해야지.”
“아버지가 제 역할을 못하시니까 내가 챙겨야 해.”

"그럼 엄마와 싸우란 얘기야?"


그럴듯해 보이지만,

이 말들은 결국 아내와 어머니

두 사람 모두의 남편으로 남겠다는 선언이다.


그 순간, 남편은 자신의 자리를 포기하고,
아내를 관계 속에서 정서적 과부로 만든다.


그리고 그 고단함과 소외감은,
남편이 아닌 아이들을 향한

과도한 집착과 애정으로 발현될 수 있다.


세대마다 반복되어 온 바로 그 방식처럼.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는 잘못된 방식


많은 이들이 ‘아버지가 안 계시니,

내가 어머니의 그 옆자리를 메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정신적 독립의 기준은 존재의 유무가 아니라,

각자가 제 자리에 있느냐의 문제다.


배우자가 부재한 자리를 자녀가 메우는 구조는,
성인 간의 관계 구멍을 세대 아래로 전이시키는 것일 뿐이다.

그 구멍 난 역할은 새로운 성인 관계에서 메워져야 한다.

그것이 바로 부모의 삶과 자녀의 삶을 구분 짓는 경계이자,
‘아들’에서 ‘남편’으로 넘어가는 핵심 관문이다.


아버지의 부재를 메우는 일은,
그 역할을 대신하는 쪽으로 가더라도

결코 우선순위가 바뀌어서는 안 된다.


어머니의 남편, 즉 아버지의 역할이
내 아내의 배우자, 남편으로서의 역할을 침범하지 않도록,
반드시 배우자와 충분히 합의한 뒤,
아내와 함께 합의된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할 일이다.


질문을 바꿔 던지기


어머니와 아내가

동시에 감정적으로 무너지고 있다면,

누구의 고통에 먼저 응답하겠는가?


이 질문에 주저 없이 “아내”라고 말할 수 있을 때,
당신은 더 이상 ‘누군가의 아들’이 아니라,

‘누군가의 남편’으로 서게 된다.
그 순간부터 삐뚤어졌던 관계들은

제 자리를 찾아가기 시작한다.


어머니의 대리배우자가 아닌,
장성하여 도움을 줄 수 있는 아들로 남는 것.


많은 남편들이 갈등 상황에서 “나는 중립이야”라고 말한다.


하지만 이 말은 사실,

“나는 계속 두 여자의 남편으로 살겠어”라는 선언으로

갈등을 푸는 것이 아니라, 보다 심연으로 끌고 들어간다.


아내 곁에 서지 않는 순간,

그녀는 부부 관계에서 정서적 과부가 된다.


그럼 어떻게 하면 좋을까?


어머니의 아들로 남되,

어머니의 남편 역할이 아닌 자녀 역할만 하면 된다.
어머니의 일생을 떠안고 책임감과 죄책감을 느끼는 것은,

아버지의 몫이지 자녀의 몫이 아니다.


자녀로서 어머니의 삶을 돌볼 수 있다.


정서적 지지를 계속해서 제공하더라도,
자신을 향한 끝없는 죄책감과 책임감이

원래 나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면,

보다 홀가분하고 건강하게 어머니 곁에서

경계를 세울 수 있다.


그리고 그렇게 서 있는 아버지 곁에서 자라는 아이는,
외롭지 않은 어머니를 보며 자란다.
그것만으로도 아이는,

부모 세대가 겪었던 고초를

반복하지 않을 가능성이 커진다.


정신적 독립은

단지 어머니에게서 떨어져 나오는 일이 아니다.

어머니를 배척하라는 의미가 아니다.


내가 선택한 사람의 곁에 서기로 결정하는 일이다.
그리고 그 선택이야말로,

내 삶을 건강하게 보살피고

아이들에게 건강한 관계의 자리를 물려주는

출발점이 될 것이다.



내가 그 익숙한 삼각관계에서 벗어나기로
굳은 결심을 한 그날,


나는 이제까지의 나의 태도와 반응을 바꾸었다.
그리고 남편에게 이 관계에서

더 이상 버티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나는 남편의 사랑에서 물러나고,
우리의 부부 관계에서 한 걸음 뒤로 물러섰다.


아이들에게 이 대물림을 남기지 않기 위해,
나는 나의 인생을 되찾겠다고 결심했다.


어머니의 남편으로 살아온 당신을
이제는 나와의 경계 밖으로 내보내기로 했다고 알렸다.


어머니와 아내 사이에서 더 이상 힘들어하지 않도록,
나는 백기를 들고

당신을 어머니의 옆 자리로 돌려보낸다고 말했다.

진심이었다.


나는 다시 한번 사랑을 포기하는 사람이 되었다.

남편의 사랑을, 시어머니의 관심을,

그대로 내려놓고 내 삶을 살고 싶었다.

그리고 정말 괜찮았다.


그러자, 평생 이어질 것만 같던 우리의 삼각관계도
조금씩 균열이 가기 시작했다.


이번에도, 나는

그렇게 익숙한 질서를 ‘흔드는’ 사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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