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과 책임의 경계에서, 희생 말고 선택
그렇게 그 이상한 삼각관계에서 벗어나기로 한 날,
남편에게 나는 처음 내 마음의 진실을 담담히 털어놓았다.
누군가를 비난할 힘도 없어
그저 담담히 나의 슬픔과 상처를
아무 기대없이 이야기하던 나의 긴 독백 같던 그 시간.
그동안 ‘나’ 없는 알맹이 빠진 삶이 너무 힘겨웠고,
‘역할’로만 사는 이 삶이 내겐 너무 큰 상처가 되어,
이제 이 관계에서 철회하겠노라고.
질책과 비난이 쏙 빠진 기운 없는 내 독백을,
웬일인지 남편은 가만히 듣고만 있었다.
처음으로 묵묵히 끝까지.
그 때가 처음이었다.
나의 ‘시댁’ 관련 이야기를 끝까지 들어준 것이.
생각해보면 언제나 그래왔다.
관계에서 변화를 일으키는 순간은
내가 상대에게 어떤 반응을 ‘포기했을 때’였다.
어떻게 반응해주길 바란다, 라는 마음을 내려놓고
아무런 기대도 없을 때,
신기하게도 나의 진심이 상대에게 가 닿았다.
조언이나 충고나 진실 그 어떤 것도
사람과 사람, 그 사이에 흐르는 큰 강을 건너지 못했다.
솔직하게 '나'라는 존재가 느끼는 감정,
그것만이 가 닿을 수 있는 힘이 있었다.
남을 향한 분노나 비난,
상황을 향한 질책이나 원망들은 매번
상대에게 가는 길 중간에 허공으로 흩어졌다.
이제 관계 속에서 ‘그 힘든사랑’을 포기하노라
결심하고 모든 기대를 내려놓은 순간,
예상치 못하게 남편이 진심을 꺼내놓았다.
힘 없이 읊조렸다.
나도 그동안 사실, 너무 힘들었다고.
나도 자유롭고 싶지만,
책임감과 죄책감이 나를 무겁게 짓눌러왔었다고.
그 때부터 우리는 다시 손을 잡고,
남편의 삶을 무겁게 했던
그 죄책감과 책임감이라는 것의 민낯을 살펴보기로 했다.
그 뒤에 있는 '모성애'의 의미까지.
남편이 말한 그 무게,
그건 내가 심리검사에서 익숙하게 봤던
바로 그 무거운 감정이었다.
상담심리학 레지던트 시절,
심리검사 중 하나인 문장완성검사(WZT)에는
이런 항목이 있었다.
“나의 어머니는 _______.”
대부분의 대답은 비슷했다.
“나의 어머니는 가족을 위해 희생하셨다.”
그리고 그 뒤에는 어김없이,
무겁게 깔린 죄책감이 있었다.
그런데 가끔 이런 답이 있었다.
“우리 엄마는 화려한 꽃무늬를 좋아하신다.”
“우리 엄마는 성깔이 좀 있으시다.”
이들의 대답 속 어머니는 ‘역할’이 아니라 ‘사람’이었다.
검사 결과도, 건강한 자아강도를 보이며 대체로 양호했고,
부모에 대한 과도한 죄책감이 없어 보였다.
생각해보면 희생이라는 무거운 단어는
늘 미안함을 부른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희생했다는 것은,
내 삶이 누군가의 삶에 빚졌다는 말이니까.
누군가의 삶을 포기한 대가로 자라난 자식은
쉽게 자신의 삶으로 가벼이 날아오르지 못한다.
그리고 잘못된 책임감은 세대를 이어 옮겨간다.
그것은 진짜 모성애가 아니다.
우린 그 의미부터 바로잡아야 했다.
남편 대용품으로서의 아들,
그리고 잘못된 책임감 부여로 인해
오랜 시간 고통받은 ‘사랑받는 자식’의 민낯.
사실 부모의 사랑이라기보다는,
정서적 학대의 얼굴에 가깝다.
그것은 ‘모성애’라는 가면을 쓰고,
남편의 어깨를 오래 짓눌러 왔다.
겉으로 보기엔 사랑과 헌신이었다.
그래서 더 벗기가 죄스러웠다.
“네가 있어 내가 버틸 수 있었다”는 말,
“넌 나의 전부야”라는 고백은 따뜻해 보인다.
하지만 그 안에는 ‘너 없으면 나는 무너진다’는
감정적 인질극이 숨어 있었다.
아들은 자라면서 어머니의 마음을 떠받치는 기둥이 되었고,
자신의 삶보다 ‘어머니의 안녕’을 우선시하는 법을 배웠다.
그 과정에서 책임감과 죄책감은 한 몸이 되었다.
아들은 어머니의 고단함을 덜어주기 위해 노력했고,
그 노력은 칭찬과 애정으로 보상받았다.
그러나 그 ‘사랑’의 대가는 무거웠다.
한 번이라도 기대를 저버리면,
자신이 어머니를 버린 나쁜 아들이 되는 것 같았다.
이렇게 길러진 책임감은 장성한 후에도 사라지지 않았다.
그래서 결혼 후에도 그는 두 관계를 모두 지키려 애썼다.
아내와 어머니,
두 여자를 같은 울타리 안에서
화목하게 지키려는 시도
그것이 그가 지키고 싶은 부부 관계를
냐금냐금 갉아먹는 원인이라는 것을
그는 정말 몰랐다.
중립을 지킨 것이 아니라,
어디로 갈지 몰라 제자리에 서 있었을 뿐이다.
정서적 학대는 반드시 폭언이나 폭력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타인의 결핍과 외로움을 평생 짊어지게 하는 것도,
아이의 마음을 자신의 감정 쓰레기통으로 쓰는 것도
엄연한 정서적 학대에 속한다.
아무리 그 의도가 사랑이었다 변명할지라도
그 사랑은 결국 자립의 날개를 꺾는다.
진정한 모성애는 소유가 아니다.
자식을 남편의 대체품으로 쓰지 않고,
자신의 감정의 빈자리를 메우는 도구로 삼지 않는다.
유명한 일화가 있다.
생선 살은 자식들에게 주고, 대가리만 먹던 엄마.
그 엄마 생신에 자식들이
생선 대가리만 모아 상을 차려줬단다.
“우리 엄마 이거 좋아하잖아~” 라며.
나도 비슷한 경험이 있다.
사과를 다 깎아주고 남은 부분을 늘 내가 먹었는데,
어느 날 막내가 사과 씨 부분을 나에게 내밀며 말했다.
“엄마 이거 좋아하지? 먹어.”
그 순간, 머리가 띵하고 울렸다.
아이는 엄마가 ‘좋아하는 것’을 건넸을 뿐이지만,
나는 내가 잘못된 사랑을 아이에게
희생이란 명목아래 전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아이에게 ‘엄마라는 존재’를 왜곡해 보여주고 있구나 싶었다.
그때부터 아이들 앞에서
일부러 남은 음식은 먹지 않는다.
“엄마도 맛있는 거 좋아해.
엄마도 사과 꼭다리 말고 사과 살 좋아해.
근데 너한테 양보할게. 내 예쁜 아가니까.”
나는 내 밥을 항상 따로 차리고,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담는다.
아이들 밥을 차려주고는,
가끔 내가 먹고 싶은 것을 따로 시켜 먹기도 한다.
그것이 바쁜 육아의 틈에서
나를 스스로 돌보는 방식이기도 하지만,
아이에게 엄마가 ‘희생의 아이콘’이 아니라
‘자기 취향과 감정이 선명한 사람’으로 남겨지길
바라고 있어서이기도 하다.
진짜 사랑은 언젠가 자식이 홀로 날아오를 수 있도록
마음을 놓아주는 힘이다.
아직 연약한 시절에의 보호,
혼자 날 수 있는 능력을 갖추는 양육,
그리고 때가 되면 놓아줄 수 있는 부모의 자립적인 마음.
모성애는 딱 거기까지다.
아이를 잘 키우는 목적에
부모로서 내가 누릴 어떤 이익이 포함되어 있다면,
그건 진정한 의미의 모성애가 아니라
거래이자 투자, 집착, 소유라는 다른 이름이다.
아이의 역할은 부모의 감정을 돌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주인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육아의 목표는 평생 함께 묶여 사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뛰어오를 수 있는 도약대를 만들어 주는 데 있다.
이제 우리는 알았다.
남편이 짊어지고 온 책임감의 일부는,
애초에 그가 짊어져서는 안 될 짐이었다는 것을.
그 무게를 내려놓는 일은 어머니에 대한 배신이 아니라
잘못된 역할을 내려놓고
진짜 어머니의 아들로 돌아가는 과정이라는 것을.
그것은 어머니를 떠나는 것이 아니라,
아들 그 자신으로서, 어머니와 다시 연결되는
모자 관계 회복의 출발점이 될 것이었다.
나는 ‘희생’ 대신 ‘선택’이라는 말을 하는 부모가 되고 싶다.
우리의 아이들이
“우리 엄마는, 또는 아빠는 늘 희생하셨어”라고 말하기보다,
“우리 엄마는 매콤한 떡볶이를 좋아했고,
아빠는 자전거를 좋아하셨다”고 기억되길 바란다.
부모로서의 나는 완벽하지 않다.
착하거나 편하기만 한 엄마도 아니다.
그래도 괜찮다.
아이들에게 사랑받지 않아도 된다.
어떤 엄마를 꿈꾸는가 하면,
스스로를 억누르지 않고 존재하는 엄마.
희생하기 보다는 선택하는 엄마.
그 선택한 삶을 책임지는 엄마.
그래서 아이들이 이렇게 말하길 원한다.
“우리 엄마는 그냥 놔둬도 명랑하게 잘 산다”
그들이 자신들의 인생을 찾아 훨훨 날아가려 할 때,
내 존재가 무거운 미안함이나 애틋함으로 그들을 묶지 않고
그저 그들 인생 한 켠의 아련한 추억으로 남기를 바란다.
난 너의 엄마가 되기로 내가 선택한 거야.
그리고 그 삶이 꽤 괜찮았다?
힘들 때도 많았지만, 아주 다이나믹하고 재밌었어.
그렇게 아이들과 예전 다이나믹한 추억을 그저 나누다,
각자 돌아 또 제 갈 길을 가는
그런 깃털처럼 가볍고 유쾌한 엄마가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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