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리함 너머, 나의 삶이 새로이 머물 집을 찾다
아파트는 내가 평생의 대부분의 시간 동안 살아왔던,
많은 장점을 가진 참 영리하고 편리한 공간이었다.
한 번도 다른 형태의 주거공간을 생각해본 적이 없을 정도로,
서울에 사는 내게 아파트는 너무도 익숙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그 익숙한 틀 안에서 편안하지 않은 나를 발견했다.
모두가 장점이라 말하는 그 부분들이,
이상하게 내겐 단점들처럼 느껴졌다.
효율적인 평면도, 넓게 확장된 거실, 시원한 뷰, 지하주차장, 경비실과 관리사무소, 공동 지역 사회같은 아파트 대단지가 주는 편리함과 안전함. 그 안에서 어쩐지 나는 편안하지 않고 숨이 막혀갔다.
윗집, 아랫집과 똑같이 설계된 평면도와
이미 구획된 용도가 분명한 방들은
나만의 공간을 상상하는 여지를 점점 좁히는 것 같았고,
뷰를 위해 넓게 트인 거실 통창은
세상과 나를 연결하는 창이 아니라,
절벽 위에 매달린 듯한 아찔한 불안과 답답함의 상징이었다.
가장 힘든 건 층간소음이었다.
서로의 생활 소리가 얇은 벽과 바닥을 타고 오가며
집 안에서도 편안함을 누릴 수 없었고,
우리의 발소리 또한 위아래로 전달될까 싶어,
매 순간 살벌한 감시자가 되어야 했다.
게다가 지하주차장에서 집으로 들어가는 길은
비를 피하는 안전한 통로가 아니라,
여러 단계를 거쳐야 하는 귀찮고 먼 여정이었다.
경비실, 차단기, 입구 비밀번호 등의 보안장치들에게
외부의 위험을 막아주니 고맙다는 마음보다는,
나를 깊은 성 안에 가두는 듯한 답답함이 먼저 느껴졌다.
아파트는 쾌적한 편리함으로 나를 보호했지만,
내게는 결코 편안한 공간이 아니었다.
그 보호막은 오히려 나를 높은 탑 위에 가두는 것 같았다.
환경심리학은 공간이 인간의 행동과 감정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빛이 드는 방향, 바람이 흐르는 길, 시야가 확장되는 정도,
그리고 타인과 나를 구분 짓는 경계의 유무가
우리의 심리 상태를 좌우한다.
개방감은 창의성과 정서적 안정감을 높이고,
프라이버시의 확보는 자율성과 회복력을 키운다.
반대로 시야가 좁거나 경계가 쉽게 침범되는 공간에서는
사소한 소음과 시선에도 예민해지고,
내적 에너지가 빠르게 소모된다.
하지만 반대로 사람의 내면 상태에 따라서
편안하게 느끼는 공간의 형태도 달라지게 마련이다.
나는 그 시절,
내 삶의 모든 면에서 '익숙한 그 틀과 규격' 밖으로
뛰쳐나가고자 활어처럼 몸부림 치던 때였다.
강하게 피어오른 이 내적 욕구는, 내 삶 전반으로 퍼져나가
현재 살고 있는 물리적 공간인 주거 형태까지 되돌아 보게 했다.
아파트는 많은 사람들에게 안전하고 효율적인 공간이지만,
내게는 그렇지 않았다.
아이들과 집에 머무는 시간이 긴 나에게,
그 구조와 환경은 숨을 가쁘게 만들었고
내 영혼을 가두는 감옥처럼 느껴졌다.
주말이면 집에서 편히 ‘힐링’하는 것이 아니라,
‘힐링’을 찾아 집 밖으로 떠도는 생활이 싫었다.
나는 더 많은 햇빛과 바람을 직접 느끼고,
나만의 경계와 리듬을 되찾는 삶을 원하고 있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결단과 모험이 필요했다.
결국, 나는 그 안전한 성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돌이켜보면, 내가 떠나려던 것은
단순히 ‘아파트’라는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었던 것 같다.
아파트는 세상이 내게 제시한 삶의 규격 같았다.
편리함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안전하게 감싸면서도,
동시에 내 삶의 변화와 상상의 가능성을 좁혀온
기존의 틀을 대변하는 상징이었다.
아파트 평면도 안에서 살던 나는
정해진 구조와 기준에 맞춰 살아가는 사람이었다.
물론 그 틀 안의 삶은 안전했지만,
‘살아있다’는 감각을 좀처럼 느낄 수 없어 답답하던 차에,
나는 내 숨을 여유롭게 품어줄,
나라는 사람의 독창성이 배어 있는
여백 있는 공간을 간절히 원하고 있었다.
그런 면에서, 평면도라는 주거형태를 떠나기로 한 결정은
단순한 이사 계획이 아닌,
‘지금까지 살아온 방식’과의 결별 선언이었을 것이다.
그 공간에서 살던 과거의 나를 떠나보내는 일.
다시 말해, 과거의 나와의 이별이었다.
내가 선택하지 않고 그저 물려받은 틀과 규격에서 벗어나,
이제부터는 ‘나’의 틀을 스스로 만들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
결국 내가 머물 공간을 새롭게 설계하는 일은
나의 삶을 다시 설계하는 일이었다.
그것도 주관식의 ‘비규격’으로.
그리고, 이건 결코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나를 닮은 공간을 만들기 위해서는
단순한 취향을 넘어서,
‘내가 어떤 사람인지’ 먼저 알아야 했다.
공간의 설계도란 결국 ‘나’라는 사람의 설계도이기에,
앞으로 내가 원하는 방식으로 존재하려면
무엇보다 현재의 나를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리고, 새로움과 비규격으로 나아가기 전
가장 먼저 이뤄져야 할 중요한 과정이 있었다.
바로, 기존 틀과의 이별.
그 이름은 ‘철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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