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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행복하면, 나도 행복해.

조건 없는 호의와 따뜻한 공명

by 파랑새의숲
삶의 진정한 충만함은 소유가 아니라,
서로에게 울림을 주고받는 공명 속에서 경험된다.

– 하르트무트 로자, 『공명(Resonanz)』, 독일 사회학자


길 위에서 마주한 두 청년


새벽부터 점심 무렵까지 시데의 유적지에 앉아

내 마음을 꼼꼼히 돌아본 뒤,
나는 다른 곳으로 떠날 준비가 되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알 수 없었지만,
경비원의 손짓과 발짓으로 겨우 얻은 정보는
“마나브갓에서 시외버스를 탈 수 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을 믿고 정처 없이 길을 나섰다.
영어가 통하지 않으니 중간에 물어볼 수도 없었고,
그저 내가 외친 “마나브갓?”이라는 말에
사람들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걷는 수밖에 없었다.


뜨거운 햇볕 아래, 검은 옷차림에 배낭을 멘 동양인 여행자는
그곳에서 꽤 눈에 띄는 존재였던 모양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힐끔힐끔 따라왔다.


그때 그들을 만났다.

슬리퍼를 질질 끌며 해바라기씨를 까먹던 두 청년이 있었다.
우리는 한참을 같은 길 위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처음엔 별 관심 없는 듯 서로 이야기를 나누던 그들이,
30분쯤 같은 거리를 걸었을까,

그들이 마침내 나를 의식하기 시작했다.

서로 뭔가를 상의하더니, 내게 툭 하고 말을 걸었다.


“혹시, 넌 어디 가니? 우리는 마나브갓 가는데.”


사진보다 마음에 남는 풍경


“나도 마나브갓을 가. 내가 너희 따라가면 되는 걸까?”
내 질문에 그 청년들이 난감한 듯 웃으며 말했다.


“우리는 시간이 많아서 산책 삼아 걷는 거야.
그런데 거기가 그렇게 가깝진 않아.

그 무거운 배낭 메고 가기엔 좀 많이 멀걸?
어쨌든 우리를 따라오면 도착할 수 있긴 해.”


그렇게 또 30분쯤 걸었을까.
우리 대화는 점점 편안해졌다.
내가 거쳐온 도시들, 나의 삶,

그들의 일상, 그들의 삶이 이어졌다
그리고 여행자의 조심해야 할 습관까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낯선 이방인이라는 경계가 조금씩 옅어졌다.


그러다 눈앞에 작고 예쁜 그림 같은 강이 펼쳐졌다.
햇빛에 반짝이는 물결 위로 너무도 평안하고 아름다운 풍경.

우리 잠시 쉬어갈까? 라며 우리 셋은 그늘에 앉았다.


세상에서 처음 보는 호기롭고 아름다운 그 풍경에

나는 연신 사진기 셔터를 눌렀다.
그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던 마이크가 나지막이 내게 말했다.


“넌 사진을 참 좋아하나 보구나.
그런데, 눈으로 찍어서 마음에도 담아.
가장 아름다운 장면은 사진기에 찍히지 않는 법이거든.

우리의 눈과 가슴이 사실 최고의 사진기야.”


순간, 셔터를 누르던 내 손이 멈췄다.
그 말은 이상하게도 오래도록 내 안에 남았다.


나는 문득 생각했다.
내 감각을 믿지 못하고,
그 순간에 머물지 못했던 건 아닐까.


좋은 풍경을 보면 사진기가 대신 기억해 주기를 바라고,
나중에 그 풍경을 다시 보며 감동을 느끼겠지,
짐작만 하며 현재의 감상을 유보해 온 건 아닐까.


내 눈으로 충분히 감상하고
온전히 그 순간을 느끼는 것을
애써 피해왔던 건 아닐까.


의심과 확신 사이


마나브갓에 도착한 우리는 함께 쇼핑을 하고,
커피숍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내게 시외버스 터미널 근처까지 데려다줄까 했으나

나는 왠지 떠나고 싶지가 않아 그들이 가는 이곳저곳을 따라다니고 있었다.


그들은 곧 개장할 호텔에서 막바지 일을 하고 있다며,

아직 호텔이 비어있고 개장 준비 중이니
혹시 이틀쯤 더 머물 생각이 있다면

빈 방을 내주겠다고 제안했다.


순간, 머릿속을 스친 건 의심과 두려움이었다.


‘왜 내게 이런 호의를 베푸는 거지?’


하지만 그런 머릿속 생각과는 달리

내 안에서 느껴지는 감각은 이상하게 편안했다.


'이들은 괜찮아. 진짜 호의인 것 같아'


반나절을 함께하며 쌓인 신뢰가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그러나, 그때까지만 해도 반신반의했던 것이 사실이다.

무모하게도, 나는 이번에는 내 이성적 판단이 아닌,

내 감각을 온전히 믿어보기로 했다.



이유를 묻자 돌아온 대답


"그래, 나도 시데를 좀 더 둘러보고 싶어."


나는 결국 고개를 끄덕였고,
그들은 내 무거운 배낭을 대신 짊어졌다.


그리고 동네 문구점에 들러
호텔 바를 꾸밀 장식품을 사며
자연스레 그들의 세계로 발걸음을 옮겼다.

동네 문구점, 동네 커피숍, 동네 마트...


잔뜩 장을 봐서 들어간 그들의 호텔은

생각보다 훨씬 더 단정하고 아름다웠다.


파란 풀장이 크게 네모나게 가운데 자리한 호텔에서,
그들은 내게 깨끗하고 단정한 방을 내어주었다.

그리고는 내게 저녁 식사를 정성껏 차려주었다.


“My special guest.”


지나칠 정도로 깍듯한 정말 손님을 접대하는 식사였다.

나는 돈을 내지 않고 이런 서비스를 받는 것이 내심 미안했고 의심스러웠다.

이해가 되지 않아 잠시 망설이다가 물었다.


“왜 나한테 이렇게 잘해주는 거야?”


나의 질문에 그들은 마치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이상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우리가 너희 나라에 가서 너처럼 길을 잃고 헤매고 있다면,
너나 너희 나라 사람들도 우리를 이렇게 대접해주지 않겠어?”


순간, 마음속 깊이 무언가가 울렸다.
호의는 특별한 이유에서 나오는 게 아니었다.
그저 사람과 사람이 서로를 향해
자연스럽게 건네는 따뜻함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행복은 공명한다


그날 밤, 나는 낯선 도시에서 처음으로
안도하며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그 드넓은 호텔에 손님은 나 혼자였는데도.


다음 날 아침, 발코니에 나서자
수영장을 정리하던 두 청년이 손을 흔들었다.


“일어났어? 빨리 내려와, 커피 마시자!”


마치 오래된 친구의 부름처럼 익숙하게 느껴졌다.

내려가 바에 앉아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나니,

"수영할래? 오늘은 혼자 이 큰 풀장을 누릴 수 있어."

웃으며 그들은 나를 위한 긴 튜브를 띄워준다.


그들의 권유대로 나 혼자만의 풀장에서 수영하며 햇살을 즐겼다.


튜브에 몸을 맡긴 채 부드럽게 물 위에 동동 떠다니는데,
마이크가 다가와 흐뭇한 표정으로 물었다.


“Are you happy?”
“응, 행복해.”
“Then I’m happy, too.”


“커피 줄까?”

“아냐 괜찮아.”


그렇게 얘기하고 그들은 또 수영장 주변을 청소하러 갔지만,

그들의 말은 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이상하게도 그 웃음 속에서,
그 따뜻한 눈빛 속에서, 그의 진심이 전해졌다.


그는 진짜 행복해하고 있구나,

나의 행복이 곧 그들의 행복이라는 공명.
그 감각이 뼛속까지 스며드는 순간이었다.


서로 연결된 울림


문득 이전 여행지에서 만났던

내가 '배터리가 다 닳은 소진 상태'라며

따뜻한 이해를 건넸던
터키인 교장 선생님의 말이 떠올랐다.


“배터리는 좀 채워졌니?

앞으로도 네가 너무 고갈되지 않길 바란다.
네가 행복해야, 나도 행복하거든.

잊지 마라. 너의 행복이, 곧 내 행복이야.

우리는 모두 연결되어 있어”


조건 없는 호의는 그렇게 파도처럼 사람을 타고 번져왔다.

어제 길 위에서 만난 두 청년에게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누군가의 미소 속에서도.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를 꿰뚫는 정확한 이해 속에서

우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강렬한 감각.

그것이 바로 행복의 공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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