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감과 위로, 그리고 케미스트리의 지혜
힘들 때마다 나는 수많은 위로의 말을 들었다.
“힘내.”
“넌 잘할 거야.”
“그냥 넘겨. 다 지나간다”
그러나 그런 말들은 이상하게도 내 마음을 가볍게 하기는커녕, 더 무겁게 만들었다.
이런 위로를 전하는 나와 상대 사이의 거리는
더 가까워지기 보다는 오히려 멀어지는 느낌이었다.
터키의 시골 마을에서 만난 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그와의 만남은 내가 왜 이제껏 위로라 불리는 말들 속에서
진정한 공감을 느낄 수 없었는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진정한 공감은 말이 아니라 시선 속에서 피어났다.
나의 존재를 꿰뚫어 보는 따스한 눈빛과 정확한 이해
끝까지 서로의 말에 귀 기울여 주는 시간.
그렇게 이루어진 존재와 존재의 만남이,
비어 있던 마음을 천천히 채워주었다.
터키어를 못하는 이방인은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원하는 호텔에 도착했다. 그 호텔 소파에 그 선생님이 앉아계셨다.
그는 영어로 내게 물었다.
"어디서 왔어?"
나는 체크인 수속을 기다리며, 주인이 방 준비를 할 동안 조금은 기운 없이 대답했다.
"한국이요. 지금 여행중이에요."
지금까지 오게 된 경위, 그간 이스탄불에서의 여행 이야기 등을 가만히 듣고 있던 그는 별다른 말 없이 내 눈을 지그시 바라보며 살피더니, 나즈막이 중얼거리듯 이렇게 말했다.
"너는 지금 배터리가 완전 empty 상태구나.
지적이고 따뜻한 마음을 가졌지만, 아무도 네 가치를 알아주지 않았나보군.
그래서 다 소진돼 버린 거야. 그걸 채우러 여기까지 왔고."
마치 점쟁이의 말처럼 들렸지만, 사실은 정확한 공감이었다.
지쳐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봐주는 눈.
그것만으로 이미 내 안의 빈 자리가 조금씩 채워지는 기분이었다.
그의 말이라기보다는, 그의 나즈막한 목소리,
그리고 나를 따뜻하게 바라보는 그 시선에서
이상하게 나는 왠지 모를 힘을 얻고 있었다.
그는 내게 인사하고 돌아가며 말했다.
"괜찮아. 곧 채울 수 있을거야.
내일 네가 어디를 가보면 좋을지 알려줄께"
그 날 밤, 나는 꿈에서 며칠 전 만났던 다정한 부부에게 초콜릿을 선물 받는 기분 좋은 꿈을 꿨다.
다음날부터 나는 그가 제안해준 일정에 따라 부르사의 마을들을 혼자 천천히 돌았다.
오스만 시대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골목골목,
물소리를 들으며 앉아 있던 개울가,
분수가 넘치던 마을 한가운데 자미,
그리고 음악이 넘치던 저녁의 차이 바.
그 음악 바로 가는 동네 시장의 골목까지.
사람들은 손뼉을 치고 노래하며 누구든 함께 어울렸다.
그 자리에 오가면서 며칠 새 나도 모르게 얼굴이 풀렸고, 마음은 환해졌다.
음악이 흐르는 차이 바로 가는 활기찬 동네 시장길을 지나며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사람 사이에서 가장 중요한 건 세 가지야.
오픈 마인드, 커뮤니케이션, 그리고 케미스트리(화학반응).
네가 해야 하는 건, 열린 마음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소통하는거야.
그런데 아쉽게도 서로 케미스트리가 맞지 않으면, 아무리 애써도 서로를 채울 수 없어.
그러니 그런 경우는 너의 에너지를 채우는 게 아니라 빼앗는 게 되지."
처음 듣는 이야기였다.
나는 내가 잘해야 관계가 좋아지니, 참고 배려하고 이해하라는 말을 더 많이 듣고 자라왔다.
내게 네가 붙들 수 없는 관계는 놓으라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 그 때가 처음이었다.
모든 관계를 붙들려고 하며 스스로를 넘치게 소모하던 노력이 꼭 필요하지는 않다는 걸 배우며, 내가 어쩌지 못하는 관계도 있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 그것이 내 마음을 지키는 지혜라는 것 또한 새로이 배웠다.
그는 이어 내게 제안했다.
"내킨다면, 우리 학교에 한 번 와봐, 난 이 지역 고등학교의 교장인데, 우리 아이들은 정말 생기로 넘쳐. 한 번 와서 봐봐."
며칠 뒤 나는 길응 걷다가, 그의 고등학교가 정말로 궁금해졌다. 그래서 예고 없이 들어가 그를 찾았다.
한국에서 온 손님이라니, 학교 전체가 들썩였다.
쉬는 시간이 되자 학생들이 교장실로 우르르 몰려들었다.
교장 앞이라면 조심스러울 법도 한데, 아이들은 뒹굴고 장난치며 웃음을 터뜨렸다. 내겐 굉장히 낯선 풍경이었지만, 동시에 부러운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정말 그들의 얼굴에는 생기가 넘쳐 흘렀다.
“혹시, 터키식 커피 먹어봤어요?"
라며 나가서 부리나케 터키식 커피를 타 오는 학생, 한국에 대해 이것저것 묻는 학생, 어디는 가봤냐, 터키엔 뭐가 좋은데 해 봤냐며 끊임없이 '나에 대해' 질문을 던지던 그들의 호기심과 환대는 지쳐있던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었다.
학교 교내 신문에 실을 거라면서, 아이들은 연신 나와 사진을 찍어댔고, 급작스레 방문한 낯선 이방인이 마치 귀한 손님인 듯 둘러싸서 극진히 대접했다.
그 날 저녁, 선생님은 내게 저녁을 사주시며 따뜻한 밥을 먹였다. 그리고 내게 주위를 둘러보라 말씀하셨다.
해가 진 저녁, 사람들은 옹기 종기 테이블에 각자 앉아서 저녁을 기다리며 서로 함께 대화하고 웃고 떠들고 있었다. 둘러보며 사람들을 살피는 나를 지긋이 바라보시던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다.
“삶이 뭐 거창한 것 같겠지만, 결국 이거야.
케미스트리가 맞는 사람과 열린 마음으로 웃으며 대화하고, 노래하며 함께 충전되는 것. 우린 이걸 위해 사는 거야. 지금 텅 비어버린 네 배터리를 채우는 법도 다르지 않아. 네 베터리를 채우는 방법이야. 신나게 여행한 후, 한국에 돌아가서 이렇게 살면 되는거야."
그 말은 단순한 조언이 아니었다. 내가 스스로를 몰아붙이며 잊고 있던 진실이었다.
사람을 채우는 것은 스스로를 향한 따뜻한 허용과 진실된 좋은 만남이라는 것.
그렇게 나는 그에게서 삶의 중요한 가치를 몸으로 배웠다.
첫째, 상대를 바라봐주는 정확한 이해와 공감만으로도 사람은 다시 채워질 수 있다는 것.
둘째, 관계에는 열린 마음과 대화가 필요하지만,
케미스트리가 맞지 않는 관계는 억지로 끌고 갈 수 없다는 것
셋째, 결국 사람을 살리는 것은 나 자신을 부드럽게 허용하고
좋은 사람들과의 진정한 만남 안에서 충전되는 경험이라는 것.
이 깨달음 끝에 나는 비로소 알았다. 행복은 조건이 아니라 흐름이라는 것을.
내가 충만할 때, 그 넘쳐흐름이 다른 이들을 자연스럽게 채운다는 것을.
그 작은 터키 마을에서, 지쳐 있던 나의 배터리는 그렇게 조금씩 다시 충전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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