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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그냥 지금 그대로, 너무 예쁘다

존재를 향한 따스한 긍정

by 파랑새의숲


누군가의 시선은,

존재를 다듬는 조각의 손길이다.


돌이켜보면, 그때의 나는 정말 부끄러운 ‘민폐 여행자’였다.
터키에 도착했지만 내가 아는 터키어는 고작 두 마디 뿐.


“메르하바(안녕하세요)”와 “촉 규젤(정말 예쁘다)”.


‘메르하바’는 첫날 호스텔 주인에게 배운 인사말이었고,
‘촉 규젤’은 햇살이 따스하던 어느 날,

낯선 부부에게서 존재 전체로 배운 말이었다.


이스탄불에서는 그나마 몇 마디 영어가 통했지만,
낯선 시골 마을에서는 철저한 이방인이 될 수밖에 없었다.

어느 날, 목적 없이 걷던 부르사의 한 유적지에서

나는 그 부부를 만났다.


그들은 나를 보자마자

마치 오랜만에 반가운 친척을 만난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연신, 또박또박 나를 향해

“촉 규젤, 촉 규젤”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영어를 하지 못했고, 나는 터키어를 몰랐다.

도무지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었지만,
반복되는 제스처와 감탄 어린 표정을 보니
혹시 ‘예쁘다’는 뜻인가 짐작했다.

그리고, 한참을 반복해서 듣다 보니,

아, 나에 대한 감탄사구나. 예쁘다는 뜻이구나를

알아차리게 되었다.


마치 '예쁘다'라는 뜻을 처음 배우는 아기처럼

그 날, "촉 규젤" 이라는 터키어 말 뜻을 새로이 습득했다.

(나중에 터키인에게 물어보니, 예상대로 너무 예쁘다 라는 찬사가 맞다고 한다)



솔직히 말하면, 한국에서 나는 낯선 이들에게

이런 말을 거의 들어본 적이 없다.
평범한 외모를 가진, 눈에 크게 띄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게다가 긴 여행중이라

짧게 자른 머리에 기능성 운동복 운동화 차림,
썬크림조차 바르지 않은 맨 얼굴이었다.


한국에서 ‘예쁘다’는 말은 대개 화려하게 꾸미고 치장하여,
어떤 기준을 갖춘 뒤에야 받을 수 있는 평가였다.
칭찬과 긍정은 늘 조건을 달고 왔다.
그래서 처음엔 그들의 말이 더 낯설고, 조금은 헷갈렸다.


그 부부는 내 앞에 앉아도 되냐는 제스처를 보냈다.
이윽고 차를 한 잔 주문해 내게 건네며 미소 지었다.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시선은 너무도 따뜻했다.

터키 전통차 ‘차이’를 마시는 나를
그들은 마치 아기를 바라보듯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너의 존재 자체만으로 경이로워한다는 그들의 느낌이,

아무 말 없어도 내가 너무 사랑스럽다는 확신이 전해졌다.


그 순간, 문득 이런 생각이 스쳤다.


“내가 태어났을 때,

부모님도 이런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을까?”


이렇게 물 마시는 모습조차 신기하고,
숨 쉬는 것만으로 충분했던 온전한 존재로서의 나.
그 존재는 자라면서 대체 어디로 사라진 걸까.


헤어지기 전, 부부는 저만치 가던 발걸음을 멈추더니
다시 나를 불렀다.
부인으로 보이는 여자가 다가와
내 가방에 예쁜 브로치를 달아줬다.

터키 말은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너에게 잘 어울린다’는 의미는 충분히 느껴졌다.


그리고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고,
너무 사랑스럽다는 표정을 지으며

여행 중 몸 조심하라고 말했던 것 같다.

우리는 그 순간, 언어 없이도 완전히 서로를 이해했다.


아무런 조건 없이. 이유 없이. 그냥 있는 그대로.

“촉 규젤.”

내가 유일하게 알아들었던 그 아름다운 터키어는

그 날 이후로 내 존재를 관통하는 말이 되었다.


그 부부가 내게 보여준 시선은 평가가 아니었다.
변해야만, 성취해야만, 꾸며야만 받을 수 있었던

그런 어려운 시선이 아니었다.
그저 있음만으로 충분하다는 온전한 긍정이었다.


돌아오는 길,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내가 살아오면서, 그냥 지금 이 모습 그대로 인정받아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러나 기억나지 않았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 조차도 '나' 라는 존재를 그런 따스한 시선으로 보아 준 적이 없다는 것을.


나는 늘 무언가를 성취하고,

이뤄내도록 나를 밀어붙이며 살아왔다.
그래야만 가치 있는 사람이라,

나 스스로를 여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나를 사랑하기 위해서조차

항상 어떤 결과와 성취, 노력 등이 필요했다.
나 그 자체가 아닌 다른 무언가로

끊임없이 나를 증명해야 하는 삶이었다.


그러나 돌아보니,

그건 내 안에 ‘나’가 부재한 삶이었다.

나에 대한 존재의 의미를,

오로지 바깥에서 찾아야 하는 슬픈 삶이었다.



누군가의 시선은
한 존재를 새로이 조각해내는 힘이 있다.


그 힘은 너무도 커서,

눈빛 하나만으로 존재를 무너뜨리는 파괴가 될 수도,
완전히 새로 태어나게 하는 온전한 회복이 될 수도 있다.


그날, 부르사의 골목에서 만난 두 사람은
언어 대신 따스한 시선으로 나를 빚어주었다.
변하지 않아도, 있는 그대로 어여쁜 사람.
지금, 그대로 충분한 사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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