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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의 선택엔,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세상과 나에 대한 신뢰

by 파랑새의숲


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가 봐.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거야.


난생처음 혼자 떠난 해외여행.

새로 태어난 아기가 이런 느낌일까.

지금이야 인터넷이 생활화되어 있어,

비교적 익숙한 친숙한 도시지만

그 당시만 해도 내가 도착했던 그곳은,

마치 다른 행성인 것만 같았다.


언어도, 환경도, 심지어 건물들도,

내 주변 모든 것이 낯설던

자미의 기도 소리가 매시간 울려 퍼지는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문화, 이슬람의 도시

이스탄불이었다.


공항에서 내려 도심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옆자리 아저씨가 다행히 영어로 나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 가니? 몇 살이니?


짧은 커트머리 스타일에 체구가 조그마해서

어린아이로 생각했던 모양이었다.


터키 내에서의 여행 계획을 묻길래,

사실 동부 경계 지역까지 곳곳을 가보고 싶은데,

그곳은 여자 혼자 다니기엔 위험하다는 얘기를 들어서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 중이라 말하자

그 말이 살짝 못마땅한 듯, 아저씨의 인상이 살짝 찌푸려졌다.

아니, 아니, 위험하지 않아. 가고 싶으면 가봐.
네가 가고 싶다는 건, 분명 거기 가야 할 이유가 있는 거야.

어떤 경우에도 남의 말이 아닌, 자신을 믿어야 해.
꼭 가봐. 멋진 곳이야. 신도 널 보살필 테니 걱정 말고.

신이 나를 보살핀다고?

특별한 종교가 없었던 나였지만,

낯선 곳에서 만난 이에게서 들은 그 생경한 ‘신’이

왠지 다정하게 내 존재 옆에 걸어와 살며시 앉는 듯했다.


그가 덧붙였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다 똑같아.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이 비슷한 비율로 존재해.

중요한 건 위험을 피하는 게 아니라,
자신을 믿는 거야. 그러면 신도 널 보살필 거야.

그리고, 너의 선택에는 분명 이유가 있을 테니,
가고 싶다면 지나치지 말고 꼭 가봐.


그는 다음 역에서 내려야 한다며 일어섰다.

내게 눈을 찡끗하고, Gool Luck을 외치며

버스에서 내려 총총히 자기 갈 길 가는 그를

난 한참을 멍하니 보고 있었다.


낯선 곳에서 만난 첫 이방인.

이상하게 나를 세상 속으로 부드럽게 밀어 넣는 기분이었다.


그가 내 옆에 놓아준 '신'이라는 단어 또한,

특정 종교를 떠나, 너무 든든하고 낭만적이게 느껴졌다.


너의 선택에는 이유가 있을 테니,

다른 사람들 말보다는, 너 자신을 믿어봐.


새로운 '나'라는 존재를 향한 , 첫 번째 이방인의 수업이었다.



나는 이제까지 자라면서 이 말을 가장 많이 듣고 자랐다.


“위험해. 안돼."


그 한마디는 물론 연약했던 나를

세상으로부터 성공적으로 보호해 왔다.

그러나, 항상 그랬던 건 아니다.

새로운 세상으로의 내 발걸음을 차단하는 울타리기도 했다.


나를 어린 시절 보호했던 그 울타리는,

어느새 훌쩍 커버린 내게는 너무 비좁고 답답했다.

하지만 어째서인지 나는 이제는 넘어도 되는

그 작은 울타리를 넘을 시도조차 감히 하지 못했다.



그 울타리를 처음 넘어선 곳이 이스탄불,

그 버스 옆자리의 이방인의 따뜻한 말에 의해서다.


그 이방인은 부드럽게 그 울타리 한편을 내게 열어 보이며,

드넓은 세상으로 나가보라고 내게 손짓했다.


이젠 ‘멈춰라’가 아닌 ‘가도 된다’는 어떤 내면의 허락.

나를 자유롭게 하는 신뢰의 말이 내 존재를 붙들었다.


그 다정한 허락이 낯선 도시를 향해 나아가는 내 발걸음에

두려움이 아닌 호기심을 살포시 얹었다.


트램을 타고 이스탄불 술탄아흐멧 구시가지에 내리자
아야 소피아와 블루 모스크가 웅장하게 마주 서 있었다.


사진으로 수없이 봤던 그 풍경은,

실제로 마주하니 숨이 멎을 만큼 아름다웠고

그 둘의 사이는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가까웠다.


사진을 수없이 보며, 그것을 안다고 생각해 왔지만

나의 두 눈이 본 것을 다 담지 못한다는 것을 그때 알게 됐다.


천 년 넘게 종교와 제국의 부침을 견뎌온

웅장한 건축물 앞에 서서,

나는 묘한 전율과 함께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이 여행이 정말 나를 다시 빚어내겠구나’라고



그러나 나는 유명한 건축물 관광보다는,

그 세상 속을 살고 있는 사람들의 진짜 삶을 보고 싶었다.


그래서 이방인이 보이지 않는

그들의 진짜 골목골목과 상점들, 그리고 시장을 걸었다.


외국인은 한 명도 보이지 않는 터키의 시장에서
가게 앞에 모여 있던 사람들은

모두 내게 반갑게 함박웃음을 지으면서도

지나가는 동양의 젊은 여자를 신기하게 바라봤다.


이곳의 사람들은, 아이든 어른이든

동네의 이방인인 나를 보면 반가움을 먼저 내보였다.


묘하게 내 존재가 환영받는 느낌에,

말이 하나도 통하지 않는 그곳이

신기하게 편안해지고 있었다.


한 아이는 내가 염소를 구경하자
더 가까이 보라며 끌어다 주었고,
과일 장수는 체리를 맛보며 좋아하는 표정의 나를 보고

흐뭇해하며 정량보다 더 듬뿍 담아주었다.


혼자 이방인인 곳에서 두려움 반, 걱정 반으로

한껏 경직되어 있던 내 마음이

낯가림 없는 그들의 그 자연스러움으로 서서히 풀려갔다.


나는 ‘위험’이라는 단어의 의미가

내 안에서 서서히 변해가는 것을 느꼈다.


그동안의 ‘위험해’가 나를 움츠리게 했다면,
이곳에서의 ‘위험’은 근거 없는 경계심이 아니라
스스로를 믿고 용기를 내는 훈련의 토대가 되었다.


내 안에서 작게 움트던 어떤 변화가
낯선 도시의 공기와 사람들의 따스한 시선 속에서
조금씩 자라나고 있었다.

나는 여행 중이라기보다는,
정말로 다시 태어나고 있는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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