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

자율성을 해치지 않는 도움

by 파랑새의숲


Do you need some help?

May I help you?


대책 없이 길 위를 떠돌던 시절의 어느 날,

갑자기 가장 낯설게 새롭게 들린 말이었다.


평소 생각 없이 듣던 익숙한 영어 표현이었다.
그런데 곱씹을수록, 희한하게 특이한 점이 있었다.


바로, 도움을 주기 전에 항상 내게 묻는다는 것이다.
내가 정말 도움이 필요한지,
그리고 도와도 되는지 나의 허락을 구한다는 점이었다.


도와주는데도 나의 허락을 받다니?
원래는 필요하다 싶으면 그냥 도와주는 게 아닌가?

나는 늘 나의 동의 없는 도움만 경험하며 자라왔다.

그래서 이 차이를 깨달은 순간, 신선한 충격이었다.


여행을 다니며 알게 되었다.

요청 없는 도움, 허락 없는 호의는

겉으로는 선의처럼 보여도

받는 이를 무시하는 방식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터키의 한 시골 마을.
내가 가고자 찍어둔 호텔을 찾아 헤매고 있었다.

영어도, 터키어도 통하지 않았다.

글도 읽을 수가 없었다. 모든 게 낯선 세계였다.

나의 질문을 받은 피시방 주인은

알아들을 수 없어 곤란하다는 표정만 지었고,
인터넷에도 호텔의 위치는 나오지 않았다.


아무도 답을 주지 못하던 너무나 난감한 순간,
멀리서 듣고 있던 한 청년이 다가와 내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Do you need some help? May I help you?”


그는 정중히 내 허락을 구한 뒤,
호텔 이름을 들여다보고 길가로 나가 택시를 잡았다.


그리고는 흥정을 나 대신해 주며 말했다.

“99리라만 내세요. 제가 흥정해 놨으니
더 달라고 해도 주지 마세요.
그리고 우체국에서 내려, 앞 슈퍼마켓으로 들어가
호텔 위치를 물으세요.”


마지막으로 “Good Luck!”이라는 말과 함께
환히 웃으며 다시 피시방으로 돌아갔다.


우체국 앞에서 내린 나는,
그가 알려준 대로 바로 앞 슈퍼마켓으로 들어갔다.

주인은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상황에서도
호텔로 가는 길을 설명해 주려 한동안 애썼다.

그러다 내가 영 모르겠다는 표정을 짓자,
결국 가게를 비워 두고 직접 안내를 시작했다.

좌회전, 우회전, 다시 좌회전, 또 우회전.


꽤 먼 길을 함께 구불구불 걸어가
마지막 코너를 돌자,
드디어 내가 찾던 호텔이 눈앞에 나타났다.


만족스러워하며 연거푸 감사해하는 나를 보며
그는 기분 좋게 활짝 웃었다.
그리고 나를 향해 손을 흔든 뒤,
우리가 걸어온 먼 길을 홀로 되돌아갔다.




나는 살면서 이제까지 많은 도움을 받아왔다.
그런데 어떤 도움은 나를 숨차게 했고,
어떤 도움은 나를 깊게 안도하게 했다.


왜일까? 무엇이 달랐을까?


곰곰이 생각해 보니,
내가 진심으로 감사했던 도움에는 공통점이 있었다.


언제나 나의 허락, 혹은 나의 요청 위에 있었다는 것.


내가 스스로 해결하려 애썼지만,
도저히 풀 수 없을 만큼 절박한 순간.
그때 찾아온 도움만이 평생 잊히지 않고,
감사의 마음을 저절로 불러일으켰다.


그 도움은 내 주도권을 빼앗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서둘러 대신하지 않았다.
먼저 내 상태를 면밀히 살피고,
정중히 도와도 되는지 허락을 구했다.
그리고는 도움의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았다.


그 순간, 문득

‘줄탁동시(啐啄同時)’라는 사자성어가 떠올랐다.


알 속에서 병아리가 작은 부리로 어둠을 두드린다(啐).
그 소리를 들은 어미닭이, 바깥에서 같은 자리의 껍질을 응답하듯 쪼아낸다(啄).



밖으로 나오려는 안에 있는 병아리와 밖에 있는 어미 닭,

그 두 생명체가 서로 한 곳을 쪼며 알을 깨기 시작한다.


중요한 건 타이밍과 협업이다.

병아리가 준비가 되었을 때,

안과 밖 두 박자가 서로 맞아떨어질 때만

새로운 생명을 세상으로 꺼낼 수 있다.


병아리가 두드리지 않았는데 바깥에서 먼저 깨뜨려 버리면,

그 생명은 빛을 보기도 전에 스러진다.
그러나 안과 밖이 동시에 서로의 신호를 알아보고

서로 응답하는 순간,

비로소 작은 숨이 세계를 향해 터져 나온다.


도움도 이와 같지 않을까.



돌이켜보면, 내가 숨 막혀하던 ‘도움과 사랑’의 방식은
결국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너는 이게 필요해. 넌 잘 몰라, 그러니 내가 대신해줄게.”

이런 말들 속에서 나는 늘 부족하고, 의존적인 존재가 되었다.

하지만 여행길에서 만난 도움은 달랐다.

그들은 내가 허락하기 전까지 기다렸다.
무엇을 원하는지 묻고, 내 요구를 정확히 파악하려 애썼다.

그렇게 나의 승인 아래, 내가 원하는 것을 끝까지 듣고,
자신이 해줄 수 있는 범위 안에서만 최선을 다했다.


그렇게 그들의 도움은

‘나’라는 존재를 지우지 않고 존중했다.
도움을 주는 사람이 아니라,

도움을 받는 ‘내‘가 중심이 되는 경험이었다.


그들의 반복된 질문으로부터,

진짜 도움은 상대를 작게 만들지 않는다는 것을 배웠다.
오히려 나를 스스로 설 수 있도록 곁에서 받쳐준다.


나를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빈 공간을 메꾸는 것, 그것이 도움이었다.


그날 이후, 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싶을 때면

꼭 이렇게 먼저 묻는 버릇이 생겼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세요?
제가 좀 도와드려도 될까요?


도움 요청하는 그 존재를

행여나 섣불리 깨뜨리지 않기를 바라면서.



#도움의의미

#내가자라는여행

#유럽여행기

#성장기

#진짜도움

#줄탁동시

#여행에서배운것

#터키여행기

#관계의본질

#호의와통제

#삶의통찰

#인간관계철학

#따뜻한이야기











keyword
수요일 연재
이전 03화넌 그냥 지금 그대로, 너무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