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은 무너짐을 직면하는 순간부터
터키 여행이 지금처럼 활성화되어 있지 않던 시절이지만,
그래도 대다수 한국 사람들이 밟는 여행 경로가 있었다.
나는 모두가 가는 그 버스를 뒤로 하고,
당시엔 낯선 동네 이름에 불과했던 시데(Side)로 향하는 티켓을 끊었다.
한국인은 나 혼자였다.
그 당시 그 도시로 가는 관광객은 통틀어 나 혼자였다.
왜였을까?
표면적인 이유라면,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언어가 없는 곳으로, 나를 철저히 이방인으로 만들어줄 낯선 곳에 가고 싶어서였다.
원래 나는 원래 주류와는 거리가 먼 사람이기도 하고,
아마도 나는 그 낯선 곳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은,
아주 새롭게 태어나야 하는 존재였을 테니까.
하지만, 진짜 이유는 종종 이런 표면적인 이유로 드러나지 않는 것 같다. 그 당시에도 뭔지는 모르겠지만 이 말이 떠올랐다.
"그곳에 가고 싶다면, 꼭 가봐. 분명 어떤 이유가 있을 거야."
첫 여행지의 이스탄불에서 만난 아저씨의 말. 그 말씀대로 나는 나의 직감을 믿기로 했다.
그렇게 올라탄 고속 버스는 밤새 달려 새벽 여섯 시,
낯선 도시 한복판에 나를 길가에 툭 뱉어놓고는 사라졌다.
안내판도, 지도를 건네줄 사람도, 물어볼 이도 없었다.
어스름이 아직 채 가시지 않은 새벽, 배낭을 멘 채 멍하니 길 위에 서 있었다.
방향을 잡을 수 없어 무작정 걷다가,
우연히 만난 한 아저씨에게 내가 가고자 하는 도시 이름, “시데”라는 말만 내뱉었다.
언어는 통하지 않았지만, 그는 손짓과 발짓, 그리고 흙바닥에 직접 그려낸 선으로 길을 알려주었다.
“여긴 시데가 아니야. 진짜 시데는 저쪽, 2킬로미터.”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통했다.
어느새 나는 사람의 말에 기대지 않고 눈빛을 읽고,
제스처로 대화하는 것에 익숙해지고 있었다.
생각해보니, 내가 언어가 통하지 않는 곳으로 가고 싶었던 이유도 여기에 있었는지 모른다.
나는 그동안 언어에 너무 많이 속아 살아오면서, 내 본능에서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사람의 눈동자, 표정, 몸짓 같은 비언어적 것들이
오히려 진심을 더 정확히 전해준다는 사실을,
그제야 비로소 깨닫고 새로 배우고 있었다.
그의 다정한 미소와 친절에 꾸벅 고개 숙여 인사하고,
다시 묵직한 배낭을 메고 걸음을 옮겼다.
시데는 굉장한 도시였다.
걷는 내내 곳곳에서 무너진 성벽 조각과 대리석 기둥이 불쑥불쑥 나타났다. 고대 도시에 나 혼자 시간여행을 온 기분, 꼭 유령도시에 들어선 듯했다.
아직 복원되지 못한 고대 건축물들, 새벽이라 인적조차 없는 거리.
그때, 저 멀리 희뿌옇게 커다란 구조물이 보였다.
“저건… 원형극장?”
눈이 휘둥그레졌다.
생전 처음 보는 관리되지 않은 유적들이 널려 있는 도시.
그것도 새벽의 고요 속에서 홀로 마주한 장면이었다.
가슴이 벅차올라, 홀린 듯 원형극장을 향해 발걸음을 재촉했다.
입장료도 받지 않는, 그저 버려진 옛 도시,
그 안에 심장같은 건축물, 원형극장.
나는 천천히 원형극장 안으로 들어갔다.
수천 년 동안 수많은 발길에 닳아버린 계단을 느끼며,
맨 윗칸으로 천천히 올라가 그 돌 위에 살포시 앉았다.
한때 이 자리에 앉아 연극을 보던 고대인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상상의 나래를 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햇볕은 따갑게 내리쬐었지만, 이상하게 불편하지 않았다.
얼마나 그곳에 앉아 있었을까. 마음이 묘하게 평안해졌다.
평온하다 못해, 이상하게 언젠가 와본 것 같은 익숙함이 나를
감쌌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그저 그 깨진 돌들의 표면들을 눈으로 훑으며, 이 위로 지나갔을 수많은 사람들의 인생들과 시간들을 상상했다.
그러다 불현듯 깨달았다.
“아.... 여기는… 내 마음의 모양과 무척 닮아 있구나.”
황폐한 고대 도시, 그 위에 우뚝 솟은 인생들과 이야기들이 모이는 도시의 심장 같은 건축물, 원형 극장.
그 버려진 느낌의 고대 도시의 모습이 곧 내 마음, 내 심장인 것만 같았다.
그제야 알았다. 내가 이곳에 와야 했던 이유를.
그 순간, 억눌러온 감정이 터져 나오며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는 그동안 얼마나 힘들었는지,
얼마나 애쓰며 버텨오면서도 결국 내 마음을 이렇게 방치해왔는지, 그제야 비로소 보았다.
무너져버린 내 마음 속 안을, 낡고 닳아버린 성곽터에서, 흔적만 아련히 남은 신전 기둥에서, 그리고 닳아버린 원형극장에서 생생히 마주한 것이다.
얼마나 울었을까. 그 폐허 도시 속 원형극장이 내게 속삭이는 것 같았다.
괜찮아. 다시 지으면 돼. 뼈대만 있다면 복원은 가능해.
완전히 무너진 게 아니니까.
앞으로 천천히 복원하면 돼.
폐허는 단순히 절망의 장소가 아니었다.
오히려 내 마음을 다시 세울 수 있다는 희망의 공간이었다.
나는 한참 동안 흐르는 눈물을 멈추지 않은 채,
무너진 내 마음 속 공간을 구석 구석 잘 살펴보고 있었다.
때로는 공간이 나를 진심으로 치유하기도 한다.
시데는 그렇게 나를 진정으로 이해하게 만든 신기한 도시였다. 나를 대신해 은밀한 내 마음속을 온몸으로 보여주고, 내가 나 스스로를 위해 마음껏 울 수 있도록 허락한 도시였다.
그곳에서 나는 진정한 나와 마주했고, 한 도시가 자신의 존재를 다해 사람을 치유할 수 있다는 사실을 온몸으로 느꼈다. 바닷가에 서 있던 부서져 이제 두 개의 기둥만 남아 있던 고대 신전, 클레오파트라와 안토니우스가 석양을 보며 목욕했다던 그 아름다운 신전 앞에서도, 나는 오래도록 멈춰 앉아 바다를 바라보았다.
온 도시가 내게 말했다.
우린 참 닮았어. 폐허가 되긴 했지만, 있는 그대로 아름답지?
맘껏 울어도 괜찮아.
이렇게, 이 도시처럼 또 생기있게 살아가면 돼.
해가 서서히 떠오르자, 도시가 내게 속삭인대로 거리는 활기로 가득 차기 시작했다.
여행객들이 몰려오고, 가게들이 문을 열고, 해변에는 파라솔들이 꽃처럼 피어났다.
나는 그렇게 한참을 폐허 속에서 활기차게 피어나는 또다른 문명을 바라보며 왠지 모를 기운을 얻고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한참을 나를 토닥이다 일어나 발걸음을 옮겼을 때, 세상은 내게 또 하나의 선물을 준비해 두고 있었다.
평생 잊을 수 없는, 터키의 두 청년.
계획에도 없던 만남이었지만, 그들의 호의와 따뜻함 속에서 나는 알았다.
세상이 누군가를 보내 우리를 치유하는 방식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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