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라짐을 통해 더 선명해진 삶의 의미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단지 이 순간만이 우리에게 주어진 전부다.
– 에크하르트 톨레, 독일 작가
드디어 꿈에 그리던 로마에 도착했다.
그리스와 함께, 이 긴 여행을 시작하게 만든 가장 큰 이유이자 꼭 들러야 할 주요 경유지였다.
소매치기가 많다는 경고, 끝없는 관광객의 행렬.
하지만 그 모든 것을 압도하는 역사의 웅장함 앞에서는
사소한 걱정들이 모두 사라졌다.
도시 전체가 살아 있는 유적지였다.
몇 천 년 전의 숨결이 거리마다 남아 있었고,
콜로세움 앞에서는 절로 감탄이 터져 나왔다.
이미 사진으로 수없이 보았지만,
눈앞에서 마주하니 오히려 말이 막혔다.
로마 골목의 거리감,
판테온의 육중함,
카피톨리노 언덕의 여유로움,
바티칸의 화려함.
가장 찬란했던 문명의 흔적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숨 쉬고 있었고,
그 앞에 선 나는 단지 현재에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이상하게 벅차올랐다.
로마는 내게 그렇게 다가왔다.
한쪽에서는 수천 년 전 검투사들의 환호가 아직 메아리치는 듯했고,
다른 한쪽에서는 셀카봉을 든 관광객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판테온 앞 광장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순간에도,
머릿속에는 고대 로마인들이 같은 하늘을 올려다보았을 장면이 겹쳐졌다.
화려한 성당의 돔과 황금빛 모자이크는 현재의 것이지만,
그 벽돌 하나하나에는 과거의 숨결이 스며 있었다.
그래서일까.
나는 그곳에 서 있으면서 ‘지금’이 아니라 ‘시간 전체’ 속에 존재하는 기분이 들었다.
로마에서 느낀 감정은 단순한 경이로움이 아니라,
덧없음과 영속성, 화려함과 쓸쓸함이
동시에 한 공간에 존재하는 모순이었다.
과거가 완전히 사라지지 않고,
현재와 함께 살아 숨 쉬는 도시.
그래서 로마는 내게 이상하게도
‘시간의 진짜 얼굴’을 보여주는 듯했다.
그 찬란함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실제 세계에서는 사라지고, 우리의 상상 속에 남았다.
폐허로 남은 원형경기장은
더 이상 함성 소리를 품고 있지 않지만,
나는 그 속에서 여전히 생생한 울림을 듣는다.
나는 지금 '과거'에 서 있는 걸까, '현재'에 있는 걸까.
로마의 거리는 그 경계를 모호하게 만든다.
내 발은 지금 이 순간의 돌바닥 위를 딛고 있지만,
시선은 이미 수천 년 전으로 스며든다.
과거와 현재의 구분은 어떻게 지어지는 것일까.
눈앞의 풍경은 변했지만, 감탄과 두려움, 숭고함을 느끼는 인간의 마음은 예전부터 크게 다르지 않은 듯했다.
어쩌면 '과거'란 사라진 시간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살아 움직이고 있으며
우리 안에서 호흡하는 또 하나의 현재인지도 모른다.
로마에서 나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이상한 시간 감각을 맛보았다.
그리고 폼페이에 도착했을 때, 나는 한결 또 다른 시간의 얼굴과 마주했다.
이틀 뒤, 우리는 남부 투어로 폼페이에 도착했다.
차창 너머로 보이는 베수비오 산은 너무도 고요했다.
그러나 그 산 아래 도시가 단 한순간에 멈춰버렸다는 사실을 알고 나니, 풍경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거리는 놀랍도록 잘 보존되어 있었다.
음식을 팔던 바, 화려한 목욕탕, 마차 자국이 패인 돌길,
그리고 마지막 순간 그대로 굳어버린 사람들의 형상까지.
허리띠를 맨 남자의 모습은 사진으로 볼 때와는 전혀 달랐다.
그 생생함은 차라리 잔혹했다.
마치 내 눈앞에서 시간이 멈추어 버린 듯,
그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어 왔다.
폼페이는 과거가 현재로 살아 있는 도시가 아니라,
순간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도시였다.
사람들의 발자국, 식탁 위의 빵, 벽화의 색깔까지,
모든 것이 그날의 시간을 멈춘 채로 남아 있었다.
로마가 화려하게 과거와 현재를 잇는 다리였다면,
폼페이는 그 다리가 끊어진 자리에서
시간 자체가 멎어버린 듯한 곳이었다.
바람은 불고 태양은 빛나는데,
도시만은 여전히 79년 그날에 붙잡혀 있었다.
굳어버린 몸짓들은 고통을 드러내고,
무너진 벽들은 마지막 순간의 혼란을 증언했다.
그 잔혹한 정지화면 속에서 나는 묘한 침묵을 느꼈다.
말도, 웃음도, 일상의 소리도 사라진 자리.
살아 있는 현재가 아니라, 끝내 현재가 되지 못한 과거가 그대로 보존된 풍경.
그래서 폼페이는 화려함의 도시가 아니라 멈춤의 도시였다.
‘영원히 남는다’는 말이 주는 찬란함이 아니라,
‘결코 이어지지 못한다’는 진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도시.
그 앞에서 나는 비로소 깨달았다.
영원은 찬란한 환상이 아니라,
한순간의 덧없음 속에서만 빛난다는 것을.
그 순간, 나는 '삶'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음은 '멈추어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사는 것'이란 무엇일까.
제대로 산다는 건 도대체 무엇일까?
화려한 로마가 영원을 꿈꾸게 했다면,
폼페이는 영원이 없음을 각인시켰다.
언젠가 끝날 삶, 언제든 무너질 수 있는 인간의 모든 것.
그 앞에서 내가 붙잡아야 할 건 결국 ‘진짜 나의 삶’이었다.
'삶이 무언가?'라는 질문을 품은 채 도착한 이탈리아 남부 해안. 나의 질문에 삶은 그 자체로 대답하고 있었다.
소렌토, 아말피, 포지타노.
산자락에 매달린 듯 자리한 집들
알록달록한 골목, 눈부신 바다.
그 풍경 앞에서 설명할 수 없는 생기가 흘러넘쳤다.
햇살은 따스했고, 바람은 부드러웠다.
체리는 빨갛고 달콤했으며, 오렌지는 샛노랗게 빛났다.
코발트빛 바다와 맑고 흰 구름, 즐겁게 웃는 사람들.
그 모든 장면이 내 질문에 답하고 있었다.
“제대로 사는 게 뭐냐고?”
삶은 속삭였다. 이런 생기를 품고, 변화하며 살아가는 것.
죽음은 모든 것을 고정하고 멈추게 한다.
그러면 가장 먼저 사라지는 것이 바로 생기다.
숨, 호흡, 그리고 변화.
그러니 네 안의 생기를 품고 변화하며 살아가는 것,
그것이 제대로 사는 삶이 아닐까.
나는 터키에서 꽁꽁 싸매고 다녔던 옷을 벗어 던지고,
바람과 햇살을 온몸으로 받아들였다.
남의 시선에 구애받지 않고 나를 자유롭게 풀어놓는 경험.
그곳에서 나는 웃음을 되찾고, 내 몸으로 맘껏 놀기 시작했다.
로마에서 나는 빛나던 것들이 스러져,
현재와 함께 살아가는 모습을 보았다.
폼페이에서는 박제된 과거를 마주하며
삶이 무엇인가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남부 해안에 이르러, 나는 깨달았다.
삶은 영원을 붙드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 순간을 생기로 살아내는 일이라는 것을.
그 순간 나는, 조금씩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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