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멈춤이 주는 시선의 깊이에 관하여
천천히 갈수록 더 많이 보인다.
The slower you go, the more you see.
이탈리아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
나는 그 작은 광장의 <사비나 여인의 약탈>
그 조각상 앞에 멈춰 서 있었다.
관광객들의 발걸음은 분주했지만,
내 발은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광장을 둘러싸고 있는 조각상들에게서
살아 있는 고통과 호흡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 표정, 손짓, 그리고 조각상의 크기.
거기에 어우러지는 클래식 버스킹과 잔잔한 노을.
나는 그곳에 조각상들과 함께
잠시 얼어붙은 듯 머물러 있었다.
로마가 거대한 힘과 무게로 나를 압도했다면,
피렌체는 다른 느낌의 깊이를 느끼게 한 도시였다.
작고 단정한 한 유명한 가문이 장악했던 도시.
이렇게 유명한 도시가 이렇게나 작아?라는 첫인상.
그러나 그 안에서 나는 ‘멈춤’이 주는 깊이를 배웠던 것 같다.
피렌체는 두오모라는 거대한 건축물이
도시의 중심이 되는 작은 중세 도시다.
시뇨리아 광장, 그 조각상들 앞에서
나는 발걸음이 자연히 멈추었다.
<사비나 여인의 약탈>, <페르세우스>, <다비드>….
그 앞을 떠나지 못한 채 몇 번이고 빙글빙글 돌며 바라봤다.
아주 작은 광장을 빙 둘러싼 조각상들을 보며,
나는 이상한 느낌에 사로잡혔다.
삶을 닮은 광장.
지나치고 빠르게 살아낼 때는 잘 모르다가
시간이 생겨 깊이 들여다볼 때
비로소 본질이 드러나지 않았나.
이 광장이 그런 느낌을 전달하고 있었다.
무엇이었을까. 말로 콕 집기 어려운 느낌.
크기나 화려함만이 아니라, 네 삶의 어떤 깊이가 있는가.
그것에 관해 내게 묻는 느낌이었다.
그 유명한 우피치 박물관 앞 광장에서는
거리의 악사들이 연주를 이어갔다.
많은 사람들은 멈추어 서서 그 음악에 몸을 맡기기도 하고
넋을 놓고 감상하기도 했다.
예술은 전시관 속에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일상의 공기나 햇살처럼,
누구나 누릴 수 있는 선물이 될 수 있다는 사실.
삶을 살아가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라,
일상 속 작은 감수성에 숨어 있었다.
석양이 질 무렵, 2차 세계 대전 당시 유일하게 살아남았다는 베키오 다리(오래된 다리라는 뜻).
그 위에 서 있던 나는 감동적인 장면을 만났다.
강물 위에 떠 있는 큰 해를 보고 나도 모르게 소리쳤다.
“해가 한국보다 두 배는 커!”
말하고 나니 정말 이상했다. 그럴 리가 없었다.
같은 해인데 한국의 해보다 두 배나 클 리가 없는 것이었다.
그저 석양이 너무도 아름다웠고,
다리 위 어우러지는 버스킹의 음악들이 감동적이어서
해가 두 배로까지 느껴진 것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한국에서는 석양을 본 적이 없었나?
어째서 한국에서 보는 해도 같은 해인데
여기서는 이렇게 다르게 느껴지지라고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는 이렇게 여유롭게 석양을 바라본 적이 없었다.
공부하느라 바빠서, 학원 가느라 바빠서,
연애하느라 바빠서, 취직하고 일하느라 바빠서..
내 삶은 그동안 항상 그렇게 바빠서
무언가를 멍하게 이렇게 감상할 시간이 없었구나..
나는 어쩌면 그리도 쉴 기회를 스스로 허락하지 않았을까.
그것을 깨닫고 나니 그동안 너무 바삐 사느라
제대로 된 석양도 감상하지 못했던 내가 참 안쓰러웠다.
나는 그제 꺼 무언가를 빨리 많이 봐야
다양한 것들을 많이 습득하고 받아들일 수 있다 생각했었다.
그러나, 피렌체라는 작은 도시에 머물면서
그 생각이 점점 바뀌었다.
피렌체는 크지 않았다.
그러나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늘 어제의 얼굴과 오늘의 얼굴이 달랐다.
작다고 빠르게 알 수 있는 도시가 아니었다.
뭔가 다 봤다고 생각했으나,
그다음 날 가면 또 다른 것이 보였다.
두오모의 벽면에 새겨 넣어진 조각들조차
하나하나 미세하게 다 달라서
평생을 봐도 그 차이점을 못 알아차릴 것만 같은
엄청난 디테일이었다.
겉만 보고 와 두오모 크다.라고 넘겨버릴 수도 있었지만,
매일 보면서도 그 디테일에 감탄할 수도 있는 곳.
즉, 그건 두오모의 크기 문제가 아닌,
나의 시선의 깊이 차이였다.
삶도 그렇지 않을까.
빠르게 스쳐 지나가면 모든 것을 다 본 듯 착각하지만,
정작 '다 본 것'이 의미하는 것이 무얼까?
멈추어 머물다 보면,
같은 풍경이 전혀 새로운 얼굴을 드러낼 때가 많다.
생각해 보면 그것들은 언제나 거기 있었으나,
내가 비로소 새롭게 발견한 것에 불과하다.
그리고 그 발견은 빠르게 지나갈 때가 아니라
천천히 머물며 시선을 깊게 둘 때 가능하다.
결국, 느림은 풍요로움에 관한 이야기가 아닐까.
피렌체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삶을 풍요롭게 하는 것은 더 멀리 가는 것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것을 깊고 넓게 바라보는 일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날 피렌체의 작은 광장은,
그 조각상과 음악과 석양은,
내게 그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 주었다.
#피렌체 #이탈리아여행 #세계여행기 #두오모 #시뇨리아광장 #베키오다리 #여행삽화 #미니멀드로잉 #석양여행 #여행자의시선 #천천히걷기 #여행에서배운것 #삶의지혜 #여행그림일기 #풍요로운삶 #성장기 #여행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