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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네치아, 그 불투명한 정체

- 넌 어디서 왔어? 이름이 뭐야?

by 파랑새의숲
정체성은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만들어 가는 과정이다.
Identity is not given but forged continuously in the process of living.

— 에릭 에릭슨, 발달 심리학


여행을 하는 동안, 나는 수없이 같은 질문을 받았다.


Where are you from? 어디서 왔어?
What’s your name? 너 이름은 뭐야?
Why are you travelling alone? 왜 혼자 여행해?


처음에는 기계적으로 내가 해야 하는 정답을 말했다.


하지만 질문이 반복될수록,

틀에 박힌 대답은 점점 지겨워졌고,

내가 정답이라 생각했던 것들이 진짜인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질문을 받을 때마다,

나는 진짜 나 자신에 대해 생각해보기 시작했던 것 같다.


난 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내 진짜 이름은 무얼까?

나는 왜 지금 이렇게 혼자 여행하고 있을까?


곰곰이 돌아보니, 정작 깊이 생각해본 적도 없었고,
나 자신에게 솔직한 대답을 해본 적도 없었다는 걸 깨달았다.


그래서 반복되는 질문들에

너무 확실히 정답이 있다고 생각했던 나의 대답들을

하나씩 바꿔보기로 했다.


“넌, 어디서 왔니?”라는 물음에
“글쎄, 나도 잘 모르겠어. 지구에서 태어난 건 분명한데”라고 말해보았다.


그러면 상대방이 웃으며,
“오, 너도 그래? 안드로메다에서 왔나?

나도 가끔 내가 외계인이 아닐까 생각하거든.”
하고 농담으로 맞서는 낯선 이들과 함께 껄껄 웃어넘겼다.


또 어떤 때는,
“넌 왜 굳이 혼자 여행하니?”라는 질문에
“내 인생에서 소중한 것을 찾으러 왔는데, 그게 뭔지 모르겠네.”라고 대답했다.

한 사람은 내 대답에 갸우뚱거리다 이렇게 답했다.


그 소중한 걸 어디서 찾을 수 있는데?
제일 소중한 건 네 안에 있지 않나?
우리 동네에 밖에 그런 게 있나?


이런 대화들을 거듭하면서, 나는 서서히 알게 되었다.
여행은 단순히 새로운 풍경을 보는 일이 아니라,
나를 새롭게 소개하는 법을 배우고,

그를 통해 다시 나를 발견하는 과정이라는 것을.



베네치아, 불투명한 물에 비친 내 모습


베네치아는 화려한 가면을 쓰고 하는 파티인 '카니발 축제'로 유명하다.

기념품 샵에 들어가 화려한 모양들의 가면들을 보면서,

왠지 익숙하다는 생각을 했다.


나에 대해 잘 알 수 없다.

난 내가 누군지 잘 모른다.

사회가 부여한 국가, 이름, 성별..

내게 부여된 그런 정답 외에

정작 내 자신에 대해 내가 어떻게 정의해야할지

나의 언어가 부재하다는 것.


그 자각이 유난히 강렬하게 다가온 곳이 베네치아였다.
책에서 수없이 본, 낭만의 도시.


그러나 내가 처음 마주한 베네치아는 달랐다.

좁고 구불구불한 골목,
예상치 못한 순간 물 위에서 튀어나온 쥐,
그리고 바닷물도 강물도 아닌, 설명하기 힘든 퀴퀴한 냄새.


흐리고 비오는 날씨여서 더 그랬을테지만,

화려함 대신, 나는 불투명한 물의 도시를 만났다.

겉으론 가면을 쓰고 화려해 보이지만,
속은 알 수 없는 비밀을 숨기고 있는 도시.


그 순간 나는 생각했다.
“혹시 나도 그렇지 않았을까?”

세상을 카니발 축제처럼

세상 화려한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중은 아닌가 ..

그런 의심이 들었다.



보여지는 삶의 그림자


한 기념품 샵에 들어갔다.

정교하고 화려한 가면들이 서로 자신들의 대리 얼굴을 뽐내고 있었다.

다양한 페르소나의 상징물들을 쭉 둘러보며,

내가 살고 있는 세상이 '가면 무도회'의 파티장은 아닐까. 생각해봤다.


겉으로는 화려한 직장, 괜찮아 보이는 이력.

사람들에게는 늘 “괜찮다”는 모습으로 소개했지만,
정작 내 내밀한 감정은 들여다보지 못한 채 방치해두었다.


베네치아가 낭만의 도시이면서도 불편한 그림자를 지니고 있듯,
나 역시 보여지는 삶에 집착하며,
그 속에서 나 자신을 지키지 못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


물론, 그 도시를 비난할 필요는 없었다.
베네치아는 여전히 세계에서 가장 독특한 아름다움을 간직한 곳이다.
단지 그때의 나는, 그 도시의 불투명한 물에서
내 안의 불투명한 마음을 비춰 본 것뿐이었다.


불편함이 남긴 선물


그때는 냄새와 혼잡함에 실망하고 서둘러 떠났지만,
시간이 흘러 떠올리면 묘한 그리움이 남는다.

왜냐하면 베네치아는 내게 불편함을 주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 묻는 사춘기의 질문을 던져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아직도 나를 완전히 정의할 수 없다.
그러나 그 혼란과 불편함이야말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의 필연적인 한 장면임을,
베네치아에서 배웠다.

베네치아의 불투명한 물은 내 안의 불투명함을 비췄다.

가면 같은 도시의 얼굴을 보며, 나는 드디어 질문했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누구라고 소개할 것인가?


그 물음이야말로, 나를 새롭게 태어나게 하는 시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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