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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른, 문화라는 얼굴을 벗고 나를 보다

- 자아의 탄생

by 파랑새의숲
아이는 엄마와 둘이 있는 세계에서, 아버지라는 제3의 존재를 만남으로써 비로소 자아를 갖는다.
The child comes to possess a self only when, in the world shared with the mother, it encounters the third presence of the father.

— 자크 라캉(1901–1981), 프랑스 정신분석가이자 철학자


인간의 '심리적 탄생'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뒤를 잇는 프랑스 정신분석가 라캉은

아이가 처음에는 엄마와 한 몸처럼 존재한다고 말한다.

엄마가 곧 자기 자신인 것 같고,

세상은 온통 엄마의 얼굴로만 채워져 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아버지라는 제3의 존재가 개입한다.

그때 아이는 깨닫는다.


아, 나는 엄마와 다른 존재구나.


그 틈에서 비로소 자아가 태어난다.

영국 소아정신과 의사 도널드 위니콧 역시 이 과정을
‘분리와 자율성의 시작’이라 불렀다.


엄마의 전적인 보호 속에서 살던 아기가
처음으로 외부 세계와 마주하며,
자기만의 시선으로 세상을 보기 시작하는 순간.


그때 아이는 비로소 심리적 탄생을 맞는다.


문화라는 제3의 거울


심리학자들이 말하는 이 ‘심리적 탄생’은

아이와 부모 사이에서만 일어나는 사건이 아니다.
그 원리는 문화와 문화 사이에서도 유효하다.


내가 속한 문화 안에서는 너무나 당연했던 것들이,
다른 문화의 눈에 비춰질 때는 낯설고 어색하게 다가온다.
그리고 그 낯섦을 자각하는 순간,
나는 비로소 내 문화가 선악의 절대적 기준이 아니라
‘여러 가능성 중 하나의 선택일 뿐’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스위스 베른에서의 경험이 바로 그런 거울이었다.
현지에서 만난 한 커플이 던진 질문들은 낯설고 불편했지만,
그 순간 나는 처음으로 내가 너무도 당연하게 여겨온 것들을

차근차근 의심해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과정을 통해, ‘진짜 나의 것’이 무엇인가를 더 깊이 성찰하며
내 삶과 문화 속에서 무엇을 취하고 무엇을 내려놓을지

그제서야 스스로 선택하는 계기가 되었다.



베른, 낯선 커플의 질문들


스위스 베른에서 내 옆 테이블에 앉아 스테이크를 먹던

현지인 커플과의 대화가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들은 조심스럽게 내게 이렇게 물었다.

자신들도 베른에서 태어나 이곳에서만 자라서

한국인들을 보면 정말 궁금했던 것들이 있었는데,

혹시 대답해줄 수 있겠느냐고.


해변에서 긴 팔을 입고 양산을 쓰고 앉아있는 한국 사람들을 봤어. 우리는 태양을 보면 조금이라도 더 쬐고 싶어 난리인데, 왜 한국 사람들은 태양을 피하니? 물어보니, 다음주 회사 면접이 있다고 하던데.. 한국에서는 혹시 탄 피부를 차별하니?

한국에서는 1년에 몇일 못 쉰다고 하던데, 정말 그래?
왜 그렇게 공부와 일을 쉬지 않고 하니?

법적으로 휴가가 보장되어 있다면,
왜 긴 휴가를 못 쓰는 거야?


나는 처음에 농담처럼 대충 넘기려 했다.
하지만 웃어넘기기엔, 그 질문들이 너무 낯설고, 또 묘하게 아팠다.

또 그들도 나의 변명같은 대답을 듣고

아, 한국에서는 그럴 수 있겠구나 라며 어느 정도 이해하는 모습을 보였다.


내가 너무나 당연하다고 여겼던 것들이,
타인의 눈에는 도저히 이해되지 않는 모습으로 비친다는 것.

그것은 내게 새로운 충격이었다.


나는 우리가 그저 “꼭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라고 둘러댔지만,
내 안에서는 쓰라린 깨달음이 고개를 들었다.

제3자의 눈, 그리고 나


그 순간, 나는 마치 라캉이 말한 '동질감에 빠져 자아를 아직 찾지 못한 아이'처럼 느껴졌다.
‘엄마와 둘이 있는 세계’—즉, 내가 늘 살아온 한국 문화라는 세계 안에서는 너무나 자연스러웠던 것들이,
제3자의 시선—즉, 낯선 외국인의 눈을 통해 비추어지자,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온 것이다.


그들의 질문은 나를 '한국인'으로 만들면서, 동시에 내 시야를 넓혔다.
내가 속한 문화와 나 자신을 동일시하지 않고,
“나는 누구이고, 우리 문화는 무엇인가?”라는 물음을 처음으로 던지게 했다.

내면의 확장이 일어나기 시작한 것이다.


영국 소아정신과 도날드 위니콧은 아이가 엄마의 품에서 점차 떨어져 나와

‘홀로 있기’를 배우는 과정을 강조했다.

그 과정은 매우 불편하고 혼란스럽지만,

결국 아이를 다양성 속에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만든다.


베른에서의 그 커플과의 만남, 그 생경한 질문들에 답하던 경험이 내게 그랬다.


외국인의 눈에 비친 나의 문화는 낯설고 때로는 부끄럽기도 했지만,
그 질문들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내 삶을 이렇게 객관적으로 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사회적 편견에서 벗어나, 나의 시선을 세워가는 일.
그건 어쩌면 또 다른 의미의 나의 유예되었던 사춘기였다.


알프스의 청명한 공기가 내 안의 결핍을 보여주었다면,
베른에서의 대화는 외부의 눈이라는 거울 앞에 나를 세워 주었다.

그 거울 속에서 나는 다시 물었다.


나는 누구이며, 내가 속한 문화는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가?

다른 사회들과 어떻게 다르며, 나는 어떤 부분들을 융합해서 나의 문화로 만들 것인가.


그 물음은 불편했지만, 동시에 내 안을 확장시켰다.
그렇게 나는 또 한 걸음, 사춘기를 지나며 다시 태어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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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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