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공존과 질서 안의 나
좋은 삶은 자유 속에 있고, 좋은 자유는 질서 속에 있다
The good life is found in freedom, and good freedom is found in order.
-아리스토텔레스, 그리스 철학자
1년에 한두 번, 각 가문을 대표하는 기수들이
안장 없는 말을 타고 경주를 벌인다.
수백 년 동안 중세의 방식 그대로 이어져 내려온 경기.
참석한다는 것만으로도
시간여행을 하는 기분이었다.
처음에는 고작 광장 세 바퀴를 도는 경주가
왜 그토록 유명한지 의아했다.
그러나 곧 알게 되었다.
안장을 씌우지 않은 말을 다룬다는 것은
상상 이상으로 위험한 일이었고,
이 경기는 단순한 경마가 아니라
공동체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응축된 의식에 가까웠다는 것을.
축제가 시작되면
각 가문들의 퍼레이드 행렬이 골목골목 시작된다.
가문들은 서로 길을 내주며,
각자의 색과 문양을 뽐낸다.
자신들이 최고라 자랑하는 자리지만,
반대 진영의 행렬에도 기꺼이 박수를 보낸다.
광란의 경쟁 속에, 묘한 평화가 깃들어 있었다.
시에나라는 도시의 심장, 캄포 광장.
그곳을 빈틈없이 메운 수많은 사람들 사이로
열 개의 가문이 깃발을 휘날리며 행진한다.
화려한 색채가 좁은 골목마다 나부끼고,
그 중세 시대 사람들은
도시의 중앙인 캄포 광장으로 모여든다.
현대의 옷차림이 오히려 이질적으로 느껴졌다.
나는 정말로 중세 한복판에 서 있는 듯했다.
발 디딜 틈 없이 사람으로 꽉 찬 광장.
서로의 몸이 밀착되어 부딪히는 극한의 소란이었다.
소란이 절정에 이른 순간,
저 앞쪽에서 누군가로부터 신호가 퍼져 나왔다.
“쉬잇–”
그 소리가 파도처럼 사람을 타고
전체로 퍼져나갔다.
수만 명의 사람들이 동시에 숨을 고르는,
기적 같은 정적이 찾아왔다.
나는 어떤 충격에 사로잡혔다.
방금 전까지 광란의 소란의 바다였던 그곳이
순식간에 쥐 죽은 듯 고요해지는 장면.
마이크와 확성기 이전의 고대 사회가 재연된 듯했다.
말이 아니라 숨결로 질서를 세우는,
눈부신 장관이었다.
잠시 후 경주는 시작됐다.
안장 없는 말의 경주는 단 세 바퀴.
걸린 시간은 단 3분.
한 기수가 떨어져 피를 흘렸지만,
관중은 혼란에 휩싸이지 않았다.
환호와 탄식이 뒤섞여 터져 나오다가도,
곧 다시 정돈되는 군중의 숨결.
축제가 끝나자, 믿기지 않을 만큼
질서 정연하게 흩어지는 인파.
광란과 질서, 자유와 평화가
동시에 공존할 수 있음을
시에나는 몸으로 증명하고 있었다.
시에나의 광장에서 본 질서는
한 사람 한 사람의 삶이 모여 이룬 것이었다.
그 장면은 이제까지 나 자신이라는
개인만 바라보고 살아온 나의 삶과
자연스럽게 대비되었다.
그 수많은 군중 속에서, 나는 내 삶을 돌아보았다.
시에나의 광장에서 본 시민들의 질서는
단순한 축제의 풍경이 아니었다.
오랜 세월, 시민 한 사람 한 사람의 삶과 배움이
쌓여 빚어낸 결과였을 것이었다.
그 축제가 끝난 후,
내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단어는 '공동체 의식과 질서'였다.
그 장면 앞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물었다.
나는 너무 개인의 삶에 매몰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제껏 나의 삶은
공부를 하고, 좋은 대학과 직장을 가져서
나의 삶을 편안하게 하는 것에만
집중되어 있었던 것은 아닌가.
이러한 공동체를 만들기 위한,
우리 사회의 일원으로서의 역할을
충분히 해 왔는가.
인파 속에서 질서 정연한 축제를 경험하고 나니,
그에 대한 생각은 더 확장되었다.
나는 이제까지 왜 공부를 했는가.
왜 대학을 가기 위해 애쓰고,
직업을 갖고, 글을 쓰며 살아왔는가.
그 모든 것이 단지 나 혼자의 성취로만
머물러 있었다면,
너무 작은 울타리에 갇힌 것이 아닐까.
한동일 교수 저서 『라틴어 수업』이라는 책에 나오던
'공부'에 대한 정의가 떠올랐다.
공부란 어제와는 또 다른 내가 되는 것,
그래서 남과 나누는 것이 목표가 되어야 한다.
시에나의 광장에서 본 시민들의 질서는
바로 그 말과 닿아 있었다.
개인의 자유가 공동의 질서와 함께할 때,
그것은 단순한 경쟁이나 축제를 넘어
우리 모두의 힘이 되는 것 아닐까.
그날, 시에나는 축제는 내게 이렇게 속삭였다.
삶은 혼자의 생기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공동의 질서를 세우는 순간,
자유는 가장 찬란히 빛난다.
#이탈리아여행
#시에나여행
#팔리오축제
#유럽여행기
#세계여행
#중세도시여행
#여행에세이
#여행글쓰기
#자유와질서
#여행에서배운것
#철학에세이
#인생에세이
#라틴어수업
#한동일교수
#아리스토텔레스명언
#브런치북
#다시태어나는중입니다
#여행의교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