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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상과 현실 사이에서

- 인생은 숏폼이 아니라 롱테이크다.

by 파랑새의숲
영화란 삶에서 지루한 부분을 잘라낸 것이다.
Life is a drama from which the dull bits have been cut away.

– 알프레드 히치콕 (Alfred Hitchcock, 영화감독)


드디어, 대망의 그리스에 도착했다.


내게 그리스는 오랫동안 꿈꿔온 나라였다.
하얀 집과 푸른 지붕, 아크로폴리스와 신화 속 신전들.
파르테논 신전, 신비한 고대문명.


영화와 책, 사진 속에서 그리스라는 곳은

언제나 낭만과 미지의 공간으로 반짝였다.


그리스라는 고대문명, 나는 이곳을

그 누구보다도 오래, 간절히 꿈꿔왔다.
사실, 이 긴 여행의 출발점도 다른 어디가 아니라
‘그리스를 보기 위해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데 막상 도착한 현실은, 꿈꿔왔던 것과는 많이 달랐다.


산토리니, 엽서 속의 도시


포카리 스웨트 CF로 유명한 산토리니에 이르러서는
엽서 속 풍경과 똑같은 푸른 지붕과 하얀 집들을 만났다.
분명 눈부시게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곳에는 사람들의 숨결이 느껴지지 않았다.
'사람의 삶'이라는 일상의 흔적은 사라지고,
그저 관광객들과 '인생사진'을 위한 풍경만이 남아 있었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화려함 속에서
오히려 더 깊은 외로움을 느꼈다.

내가 원한 것은 이런 장면들이 아니었다.


내 앞에 펼쳐진 건,
엽서 속에서 이미 수없이 보아온 그것,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내가 이 여행에서 원한 것이 '휴양'이 아니라,

뭔가 풍성한 삶과 이야기가 있는 곳을 기대했기 때문일까.


알 수 없는 공허감에 휩싸여,
사진 찍기 좋은 공간들을 그저 헛헛한 마음으로 스쳐 지나갔다.



아테네, 환상과 무표정 사이


산토리니를 지나 아테네로 넘어가자,
분위기는 더 암울해졌다.

마침 그리스 국가부채 위기(그리스 사태)가 터졌던 시절이라
만나는 사람들의 표정마다 정말 어두웠다.


택시 기사는 외국인인 내게도
“망할 정치인들”이라며 욕을 쏟아냈다.

그 분노의 감정에 두려움이 몰려왔다.


숙소를 잡기 위해 들어간 호스텔에서는
손님과 주인이 서로 주먹다짐을 벌이고 있었다.


코피가 터진 주인은, 한 켠에서 멍하니 기다리던 나를 향해
“오늘은 손님을 못 받겠다”는 말을 남기고
경찰에 급히 전화를 걸고 있었다.


결국 한밤중 거리로 쫓겨난 나는
방을 잡기 위해 몇 군데 호스텔을 전전하다가
비싼 호텔방을 잡을 수밖에 없었다.


그 순간, 낭만의 그리스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린 듯했다.


다음날, 아테네 시내를 걸으며 찾아간 아카데미아 박물관은
하필 그날 휴관이었다.
길을 돌며 들른 곳곳의 유적들은
방치된 듯 흩어져 있었고,

하필 여름이라 태양은 가차 없이 내리쬐고 있었다.
돌바닥 위에서 반사된 열기는 몸을 짓눌렀고,
가슴 벅찬 감동 대신, 지침이 먼저 찾아왔다.


파르테논, 사진 속의 웅장함


무더위에 헉헉대며 아크로폴리스에 오르자,
교과서에서 늘 보아왔던 파르테논 신전이 눈앞에 펼쳐졌다.

여전히 웅장했지만, 아쉽게도 공사 중이었다.

나는 멋진 신전들 대신, 수많은 철근을 봐야만 했다.


그리고 내가 원하던 장면이 사진 한 장에 다 담겨버리는 순간,
내 안에서 부풀려졌던 기대가 조용히 가라앉았다.
그것은 내가 오래도록 상상해온

그 ‘사진 속의 샷’ 그대로였다.


사진 너머, 더 거대한 어떤 것을 기대했던 내 마음은

이상하게 충족되지 않았다.


“도대체 왜 이렇게 감흥이 없을까?”


나는 스스로에게 물었다.

터키에서 닳고 닳은 더 작은 원형극장을 보았을 때는
그 오래된 흔적이 주는 생생한 울림이 있었는데,
여기 잘 다듬어진 대리석 앞에서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그제야 알았다.
이 허전함은 도시나 유적의 잘못이 아니라,
내가 쌓아온 환상이 너무 크고 화려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숏폼의 환상, 롱테이크의 진실


현실은 언제나 축소되어 보일 수도 있고,
때로는 기대보다 담백하게 다가올 수도 있다.

사진이나 동영상은 실제를 얼마든지 부풀릴 수도 있고,
때로는 진실을 잘라내어 더 빈약하게 만들 수도 있다.


나는 그리스에 실망한 것이 아니라,
편집된 이미지에 현혹된 나 자신에게 실망했던 것이다.


요즘의 인스타그램 숏폼처럼,
짧고 화려한 장면들은 언제나 축소와 과장을 동시에 품고 있다.

내가 그려온 그리스의 환상도
결국은 그런 편집된 이미지였던 게 아닐까.


하지만 인생과 여행은 숏폼이 아니다.
그것은 긴 롱테이크다.


햇볕에 지쳐 걷는 순간,
사람들의 무표정을 마주하는 순간,
허전함과 공허함까지 온전히 감당하는 순간,
비로소 그 장면은 현실이 되고 나의 것이 된다.


환상과 현실의 간극에서


터키에서 만난 여행자 마이크가 떠올랐다.
좋은 장면을 보면 연신 카메라 셔터부터 누르던 나를 보며
그는 조용히 말했다.


정말 너무 아름다운 장면은

눈으로 찍어서 가슴에 담아.

그게 사진보다 더 오래 가.
사진은 우리의 감흥에 크게 도움이 되지 않아.


그의 말은 그리스에서야 비로소 와닿았다.

진짜 여행은 남의 눈에 담긴 장면이 아니라,
내가 직접 보고, 겪고, 느낀 긴 장면들의 연속이라는 것을.


사진 한 장이 담아낼 수 없는 것들 ―
사람들의 기운, 거리의 내음, 한낮의 햇살,
내 발에 닿던 돌바닥의 감촉 ―
그 모든 것이 함께 어우러져 하나의 공간의 합주를 이루고 있었다.


우리의 삶도 다르지 않다


사실 우리의 일상도 다르지 않다.
누군가의 인스타 속 반짝이는 순간들을 보며
나는 쉽게 부러움에 사로잡히고,
내 인생은 왜 이렇게 빈약하고 초라한가

하는 생각에 빠지곤 한다.


하지만 내 인생에도 빛나는 순간이 없는 것이 아니다.
다만, 우리는 타인의 빛나는 장면들만 모아 본 탓에
환상에 자꾸만 사로잡히는 게 아닐까.


숏폼의 환상은 그것이 전체인 것처럼 믿게 만든다.
그러나 타인의 삶 역시 결국은 나처럼 긴 롱테이크다.
반짝이는 순간 뒤에는 지루하고 버거운 장면들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모여 비로소 진짜 인생을 이룬다.


편집된 순간이 아닌, 나의 롱테이크


그리스 여행에서 나는 깨달았다.
실제는 언제든 과장될 수도, 담백해질 수도 있다.
오직 내가 직접 경험하는 것만이, 나의 실제가 된다.

그래서 다짐했다.

타인의 편집된 장면에 나를 비교하지 않겠다고.
내 눈과 내 마음으로 확인한 현실을,
내 인생의 진짜 이야기로 삼겠다고.

그리스에서 배운 교훈은 결국 이것이었다.


삶은 숏폼이 아니라 롱테이크라는 것.
그리고 그 긴 호흡 속에서만,
나의 진짜 이야기가 자라난다는 것.


그러므로 나는,

언제나 두 눈과 두 발, 그리고 온몸으로

현재를 살아내며 직접 느껴야 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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