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어디 앉지?"
가려진 커튼 틈 사이로 햇살이 내려와 포근하게 나의 눈을 감싼다. 침대에서 뒤척이며 몽롱한 정신을 가까스로 잡아보니 저 멀리서 파도가 부서지는 소리가 조용히 들려온다. 혹시나 바깥바람이 차갑지 않을까 두터운 외투를 집어 밖으로 나갔으나 따듯한 햇살은 넓게 드리우며 되려 나의 하루를 반겨준다. 숙소 옆 카페에선 기분 좋은 커피 향이 밀려와 나의 잠을 깨워줬고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나는 한동안 숙소 앞 모래사장을 걸으며 생각을 정리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느긋하게 숙소로 돌아와 노트북을 챙겨 옆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긴다. 그리고는 파도가 보이는 창가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노트북을 열어본다.
별일 없었지? 회의 시작할까?
허세 가득한 윗글의 대부분은 실제로 필자가 휴가로 찾았던 양양에서의 아침이었다. 그 당시 정말 오랜만에 강제적인 휴가를 다녀왔는데, 그 아침의 한가로움을 느끼면서 이런 곳에서 일할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라는 재밌는 상상을 한 적 있다. 그리고 그 상상은 현재 디지털 노마드라는 이름과 함께 우리 주변에서도 조금씩 나타나고 있다. "디지털 노마드". 유목민이라는 단어를 뜻하는 노마드 (nomad)에 디지털이 접목시킨 단어로 인터넷과 업무에 필요한 기기, 공간만 있다면 시간과 장소에 구애받지 않고 일할 수 있는 사람들을 일컫는다. 때론 재택근무를 하고 해외여행 중 일이 있다면 해당 국가에서 근무하는 것이다. 자유로운 환경은 직원들의 창의력 증진에 많은 도움을 준다는 스터디 결과가 나오면서 국내 모기업 역시 "발리에서 1달간 원격 근무해보기" 등의 프로그램들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그만큼 사무실 공간이 설 곳이 많이 줄어들고 있는 지금. 과연 그 공간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
첫 직장, 필자에게 "일은 회사에서" 하는 것이었다.
그 당시 필자는 하드웨어 연구개발 직군이었다. 그렇다 보니 제품을 개발할 수 있는 공정 옆에서 일을 하는 것이 당연했고, 자연스럽게 회사가 아닌 다른 장소에서 근무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삼성 같은 경우 보안에 굉장히 엄격했기에 회사 밖으로 일을 가지고 나갈 수 없었다. 이에 대한 장점으로는 퇴근 후 일에 대한 생각을 크게 할 일이 없었는데 단점으로는 정말 중요한 일이 생긴다면 밤늦게 혹은 주말에도 출근하여 대응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고 업무를 처리해야 하는 일들이 많았기에 필자에게 "일은 당연히 회사에서" 하는 것이었다. (이는 필자의 경험이다. 삼성 내 다른 직군 혹은 다른 사업부들 중에 원격 근무를 하는 사람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래도 필자는 사무실로 가는 길을 꽤나 좋아하는 편이었다. 봄이 되면 사무실로 가는 길에 파란 잎들이 조금씩 피어나는 게 참 이뻤고, 가을이 되면 노랗게 물들어 가는 단풍들을 보는 걸 참 좋아했다 (물론 여름에는 항상 비가 왔고 겨울에는 추웠지만 말이다). 그렇게 사무실에 들어와 긴 복도를 따라 걷다 보면 필자의 자리가 나왔다. 큐비클 중간 즈음 자리 잡은 자리엔 책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었고 나름 열심히 청소했지만 다양한 소품들이 어지럽혀 있었다. 필자는 아침마다 컴퓨터를 켜고 전날 받은 이메일을 읽으며 회사 아침밥과 함께 하루를 시작했다. 옆 자리에 앉는 선배는 조금 늦게 출근하는 편이었고 그 옆에선 일찍 출근하신 부장님이 메일을 읽으며 바쁜 하루를 준비하고 계셨다. "내" 자리엔 지난 몇 년간 함께한 수많은 추억들이 녹아져 있었는데, 휴가를 다녀온 동료들의 선물들과 평소에 좋아하는 간식 등 익숙한 물건들이 필자의 자리를 편안하게 만들어줬다. 이렇게 필자는 5년 동안 같은 건물 같은 층에서 근무를 했는데 잦은 책상 이동은 있었지만 필자의 사무실은 그렇게 항상 그곳에 있었다.
그러나 아마존에서 사무실에 대한 제약이 사라졌다.
입사 첫날 우리는 작은 토큰 하나를 받았다. 이 토큰을 노트북에 연결한다면 장소에 대한 제약 없이 회사 서버에 연결하여 근무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소프트웨어 제품을 처음 담당해본 필자에게 원격 근무라는 것은 새로운 세상과 마주하는 느낌이었다. 노트북을 들고 출퇴근을 하고 필요에 따라서 일찍 퇴근한 뒤 집에서 일을 마무리하는 것이다. 시차로 인하여 늦은 시각에 회의가 잡힌다면 굳이 회사에 남아서 기다릴 필요 없이 집으로 돌아가 저녁을 먹고 쉬다가 회의에 참석하면 된다. 몸이 좋지 않은 날에는 병가를 내기보다 조금 더 잠을 청한 뒤 근무할 수 있는 컨디션이 된다면 재택근무를 한다. 혹시라도 고향에 돌아가 가족들과 더 오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해당 국가에서 업무를 진행해도 큰 무리가 없다.
네가 어디서 근무하던지 관심 없어.
결과만 가져온다면 어디서 어떻게 근무하는지는 네가 정하는 거야.
입사한 지 얼마 되지 않아 필자의 매니저는 위와 같은 말을 했다. 물론 매일 같이 재택근무를 하거나 하와이에 가서 반년 동안 살면서 근무를 하는게 가능하다는 것은 아니다. 원격 근무를 할 경우 매니저와 사전에 대화가 하는 것이 중요하고 또한 그전에 매니저의 신뢰를 얻는 것 역시 중요하다. 아마존에서는 원격 근무를 할 수 있는 환경을 구축했지만, 이를 잘 사용할 건지는 해당 직원과 매니저의 관계에서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원격 근무를 싫어하는 매니저들도 꽤나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 정말 특수한 상황이 아니라면 회사에 출근하는 직원들도 많다. 필자의 동기 같은 경우 매니저가 실제로 상관하지 않아 자주 재택근무를 한다고 했고, 또 다른 친구의 경우 최근 임신을 하여 주 2회는 출근을 하지 않는다고 말해줬다. 필자의 매니저 같은 경우 그 사람의 신뢰도를 상당히 많이 보는데 매니저의 관섭 없이도 알아서 잘 일할 수 있는 직원이라고 생각하고 성과가 있다면 조금 풀어주는 스타일이다.
필자 같은 경우에는 재택근무는 최대한 지양하고 있다.
이는 필자의 업무 스타일인데 재택근무를 해봤더니 회사에서 일하는 것만큼 효율적이지 않았다 (유튜브를 조금 많이 보는 본인을 발견했다). 또한 급하게 대화가 필요할 경우 매번 메신저로 연락하여 화상 통화를 하는 것도 번거롭다고 생각하여 필자는 아침마다 출근길에 오른다. 물론 다른 국가에 여행을 가거나 국내에 잠시 귀국할 일이 있다면 원격 근무 환경을 자주 그리고 잘 활용하고 있다. 예를 들어 작년 11월 지인들 결혼식 참석을 위해서 한국에 귀국한 적 있었다. 휴가를 2주간 내고 조금 편안하게 쉬려고 했는데 한국에 귀국하기 전 긴급하게 프로젝트를 진행할 일이 생긴 것이다. 허나 비행기표를 벌써 사놨고 워낙 친했던 지인들의 결혼식이었기 때문에 일정을 변경할 수 없었다. 그래서 매니저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는 전혀 상관 안 했다) 2주의 휴가를 사용하는 대신 한국에서 근무하기로 결정했다. 한국과 유럽 간 시차 때문에 어려움은 있었지만 2주 동안 휴가를 쓰지 않고 한국에서 근무할 수 있었다는 것은 참 좋았다 (2019년 2월 경 비슷한 게 한국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덕분에 사용하지 않은 휴가는 연말에 스페인에 가서 푹 쉬다 올 수 있었다. 이와 같이 원격 근무는 우리가 조금 더 유연한 환경에서 근무할 수 있게 해줬다.
아마존은 이것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가 사무실을 개조했다.
최근 필자의 부서는 신규 건물로 이사했다. 새로운 건물에는 아마존의 Our place라는 시스템이 도입됐는데 이는 "내 자리 네 자리"가 아닌 누구나 아무 자리를 사용하는 것이다. 덕분에 아침마다 출근한 후 본인이 근무하고 싶은 자리를 찾아 근무를 한다. 물론 부서원들끼리 너무 멀어지면 안 되니 회사에선 정해진 공간 내 자리를 앉기를 권장하고 있다. 이를 통해서 다른 부서원 중 같이 자주 근무해야 하는 날에는 굳이 그 사람의 자리를 매번 찾아가기보다는 바로 옆에 앉아서 효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다. 혹은 잘 모르는 직원 옆에 앉아 그 사람이 하는 업무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고 이를 통해서 조금 더 새로운 영감을 받을 것이라고 한다. 예전부터 미국 IT 기업들이 사무실 자리를 더 이상 정해놓지 않는다는 영상을 본 적이 있는데 실제로 그런 환경에서 근무하게 되니 이는 참 색다르게 다가왔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우선 매일 같이 짐을 싸서 본인들의 락커에 보관해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다. 특히 노트나 키보드 등 보관 물품이 많은 사람들에게 매일 같이 짐을 싸야 한다는 점은 꽤나 큰 단점으로 작용하고 있다. 또한 누군가를 찾기 힘들어진다는 점도 있다. 정해진 자리가 아니기에 타부서 사람을 찾아가면 길을 잃기 쉽상이고 그렇기에 메신저를 통해서 우선 그 사람이 출근했는지 그리고 어디에 앉아 있는지를 확인해야 한다. 결국 해당 시스템이 도입된 후 대부분의 사람들은 본인들이 정해놓은 자리에 앉아 근무하게 되었고, 이는 Our place라는 취지에 조금 어긋날 수도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런데 최근 이 시스템을 도입한 이유에 대한 생각을 한 적 있다. 과연 회사는 직원들이 매일같이 다른 자리에 앉고 다른 사람과 대화를 하는 것이 회사의 생산성 혹은 효율성에 좋다고 생각되기 때문에 이러한 시스템을 적용한 것일까? 꼭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사람들이 출장을 워낙 많이 다니기 때문에 기존 인력 대비 조금 적은 숫자의 책상/의자를 가져다 놔도 사무실을 형성할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때론 모든 사람들이 출근하기 때문에 자리가 부족한 현상이 있겠지만 이는 생각보다 잘 일어나지 않는다. 이를 통해서 회사 역시 어느 정도의 원가 절감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직원들에게 사무실에 대한 자율성을 줌으로써 각자에게 잘 맞는 업무 스타일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필자의 동료 같은 경우는 집에서 근무할 경우 생산성이 더 늘어난다고 한다. 출퇴근 시간을 낭비하지 않아도 되고 본인이 가장 편하다고 느끼는 장소에서 더 집중력 있게 일을 할 수 있다고 한다. 필자 같은 경우 사무실 햇살이 잘 드는 창가 자리를 좋아한다. 그나마 사람들이 덜 오는 이 곳에 앉아 있으면 본인의 업무에만 집중할 수 있다는 점이 참 좋다. 이렇게 유연함을 제공함으로써 무조건 직원들의 창의력을 키우기보다 개성에 맞는 업무 공간을 찾게 해주는 것이다. 그리하여 개인이 가장 생산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 공간이 그 사람의 사무실이 되게 도와주는 것. 그게 진정한 이유가 아닐까라는 생각을 한다.
시간과 함께 우리는 원격 근무 혹은 디지털 노마드라는 단어를 더 쉽게 접할 것이다.
먼 미래에 입사하는 세대 중 "왜 일을 회사에서 해야 하는 거예요?"라는 질문이 당연한 시기가 올 것이다. 덕분에 많은 회사들 역시 (업의 본질에서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 이를 준비를 하고 있다. 다만 "다른 회사가 하니까". "유명 기업이 창의력을 올릴 수 있다고 해서"라는 이유라면 사무실에 대한 고민을 다시 한번 해볼 필요가 있다. 단순한 따라하기 보다는 어떤 환경을 조성해 줄 때 직원들이 가장 효율적으로 근무할 수 있는지를 고민하고 이를 바탕으로 사무실 공간을 재해석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