혹시 그때의 사용자가 기억나나요?
“일단 테스트 돌려보죠.”
한동안 우리 팀의 회의는 늘 같은 문장으로 시작했다.
그 말은 합리적이었고, 나도 처음엔 그게 올바른 태도라고 믿었다. 누구의 취향도 아니고, 감정도 개입하지 않고, 데이터가 말하게 하자는 뜻이었으니까.
버튼 색을 바꾸거나, 문구를 다듬거나, 레이아웃을 미세하게 조정할 때마다 우리는 두 가지 버전을 만들어 사용자에게 동시에 노출했다. 그리고 며칠 후, 숫자가 승자를 알려줬다. 초록 버튼이 4.7% 더 눌렸고, “시작하기”보다 “지금 시작하기”가 전환율이 높았다. 그 결과를 보고 있으면, 마치 디자인이라는 복잡한 감정의 영역이 수학처럼 명료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절의 화면을 다시 보면 어떤 온기도 남아 있지 않다. 다들 ‘잘’ 작동했지만, 아무것도 기억나지 않는다. 숫자가 시켰던 디자인은 늘 효율적이었지만, 효율이 곧 의미는 아니었다.
어느새 나는 ‘좋다’와 ‘잘 된다’를 구분하지 못한 채, 후자만을 선택하곤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회의에서 ‘좋다’는 말은 위험한 단어가 됐다. 근거가 없으니까. 대신 ‘지표상 유의미하다’라는 문장이 자리를 차지했다. 그건 훨씬 안전했고, 아무도 반박할 수 없었다.
문제는 테스트가 많아질수록 디자인의 이유가 줄어든다는 거였다. 왜 이 문장을 이렇게 썼냐고 물으면, 예전에는 브랜드의 결이나 서비스의 톤을 이야기했지만, “테스트에서 이겼어요”가 전부였다.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세상은 편리하지만, 설명할 이유를 잃은 세상은 지루하다.
나는 점점 화면이 아니라 숫자를 디자인하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숫자가 오른 날은 뿌듯했지만, 정작 그 화면을 쓰는 사람이 느낄 감정에는 관심이 줄었다. “이 버튼 덕분에 마음이 놓였다” 같은 피드백은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데이터 대시보드와 성과 지표 분석에 그 문장은 들어가지 않으니까.
물론 테스트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우리는 늘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하고, 검증은 필요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검증이 목적이 되고 설득이 사라졌다. 디자이너가 ‘왜 이렇게 만들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되는 구조. 그게 편해서 우리는 그 안으로 더 깊이 들어갔다. 결과가 나쁘면 “데이터가 그렇게 나왔어요”라고 말하면 됐다. 책임이 사라지는 대신, 자존감도 같이 줄어들었다.
나는 가끔 테스트를 거치지 않은 화면이 보고 싶다. 누군가의 직감이 담긴 색상, 수치로 증명되지 않은 문장, 논리보다는 감정으로 배치된 여백. 실패할 수도 있지만, 그 실패에는 사람의 온도가 있다. 숫자는 아무리 많아도 온도가 없다.
그래서 가끔 일부러 A/B 테스트를 하지 않는 건 어떨까 싶다. 대신 팀원들과 오래 이야기하는 것으로. “이 문장이 정말 우리다운가?”, “이 전환이 사람들에게 어떤 기분을 줄까?” 같은 느린 대화들. 효율은 떨어지지만, 그 시간 속에서 다시 ‘디자인을 한다’는 감각이 돌아올 것만 같다.
아마 우리를 진짜 멀리 데려간 건 테스트 자체가 아니라, 변명 없는 테스트였다. ‘데이터가 맞으니까’라는 한 문장이 모든 의심을 지워버렸을 때, 우리는 스스로 생각할 권리를 포기했다.
나는 여전히 숫자를 본다. 지금도 숫자와 싸우고 있다. 하지만 그 숫자 뒤에 있는 사람의 망설임과 기분을 잊지 않으려 한다. 디자인은 결국 사람이 만든 가정과 감정의 조합이니까. 테스트는 방향을 보여줄 수 있지만, 이유를 대신해줄 순 없다.
그리고 디자인은 그 이유를 만드는 일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