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관점에서는 자존감과 밀당이라는 두 단어는 그리 큰 연관성이 없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다. 밀당이라는 것은 단순히 상대방에게 더 사랑받기 위한 관계의 기술이고 자존감은 자신을 사랑하는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즉 많은 이들에게 밀당은 자존감이 낮아서 상대방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하는 행동이며, 자존감이 높다면 밀당을 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밀당과 자존감은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대립하는 관계처럼 여겨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별로 상관이 없다고 느끼는 밀당과 자존감은 실제로는 꽤나 밀접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데, 자존감이 높으면 자연스럽게 밀당을 하게 되고, 밀당을 잘하려면 자존감이 높아야 하기 때문이다.
밀당을 하는 데 있어서 핵심은 자연스러움이다. 밀당을 당하는 상대방의 입장에서 내가 하는 말이나 행동이 상황에 맞아야만 밀리고 당겨지기 때문에, 밀당은 기본적으로 나다울 수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즉 내가 소심한 사람인데 겉으로 대범한 척을 한다면 내가 하는 대범한 척이 그리 효과를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내가 누군가를 너무 사랑하고 있는데, 일부러 더 사랑받기 위해서 상대방을 밀어낸다면 이와 같은 밀어냄은 효과를 발휘하기 어렵다. 너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어 하면서 상대방을 밀어내는 행동은 마음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인위적인 꾸며냄과 같기 때문에, 내 마음과 상반된 말이나 행동으로 인해 도리어 상대방이 나를 덜 사랑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내가 상대방을 효과적으로 밀어내기 위해서는 반드시 상대방보다 나를 더 사랑하는 사람이어야만 하는 것이다. 달리 말해서 자존감이 높아야만 효과적으로 밀어내는 것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당기는 것도, 내가 당기면 상대방이 내게 가까이 오게 될 거라는 것을 아는 상태에서 당기는 것과 내가 스스로 별로라고 여기고 있으며 당겨도 잘 당겨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기는 것은 효과가 확연히 다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자는 자신이 충분히 사랑받을 만한 사람이라고 인식하는 상태에서 당기기에 내가 하는 당김이 상대방이 나를 더 사랑하게 만들 수 있게 만들지만, 내가 사랑받을 수 없는 사람이라고 인식하고 있는 상태에서 당기는 것은 '이 사람이 별로이기 때문에 밀당을 하는구나'라고 느껴져서 상대방이 나를 더 별로라고 인식하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유교 경전 중 하나인 중용에 따르면 희로애락이 절도에 맞게 일어나고 또 절도에 맞게 그것을 표현하는 것이 중용이라고 언급하고 있는데, 이처럼 감정이 절도에 맞게 일어나고 절도에 맞게 표현하는 것이 곧 밀당이라고 말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밀당을 한다는 것은 전화를 늦게 받거나 약속 시간이 약간 늦는 것처럼 몇 가지의 관계의 기술을 알아서 자신의 마음과 상관없이 밀고 당기는 것이 아니라, 적절하게 일어나는 마음의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곧 밀당을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내 감정과 상관없이 밀고 당기는 것도 밀당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다. 1+1=2라는 것을 아는 어린아이와 위대한 수학자를 동일하게 수학을 하는 사람이라는 카테고리에 넣을 수 있는 것처럼 상황에 맞지 않게 일어나는 감정을 상황에 맞지 않게 표현해서 역효과를 낼 수 있게 밀고 당기는 사람이나 적절하게 일어나는 감정을 적절하게 표현해서 효과적으로 밀고 당기는 사람 모두 밀당을 하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이 밀당에 관심을 갖는 이유는 단순히 밀당을 하는 사람이 되기 위함이 아니라 밀고 당김으로 인해서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더 많이 사랑을 받게 위함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한다면 몇 가지의 규칙을 알아서 효과적이지 않게 밀당을 하는 것보다는 자기 자신을 알고 표현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 효과적으로 밀당을 하는 사람이 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즉 밀당을 잘하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 가장 우선적으로 해야 하는 것은 여러 상황에 맞는 밀고 당기는 기술을 습득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알고,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는 것이 우선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