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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호롥호롞 Mar 15. 2020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이용하면 자존감을 높이기 쉽다.

사람들은 대체적으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리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다. 여러 종교, 철학에서는 천국과 지옥, 해탈, 해방, 복과 저주 등을 말하면서 자기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가질 것을 말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그렇게까지 관심이 많지 않다.  


생각해보자. ‘네가 네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너는 복을 받을 거야’, ‘네가 네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천국에 가게 될 거야’, ‘네가 네 마음을 소홀하게 여긴다면 지옥에 가게 될 거야’, ‘사람은 본질은 자기 자신을 아는 것에 있어. 그러니까 너에게 관심을 가져’, ‘네가 네 마음을 중요하게 여기고 사랑한다면 다시 태어나지 않게 될 거야’ 등등.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어떤가? 막 ‘와. 내가 나를 알고 사랑하는 것이 이렇게 중요하구나. 나를 너무 알고 싶다. 나를 너무 사랑하고 싶다’라고 느껴지는가? 그보다는 ‘음……좋은 얘기네’라는 생각은 들지만 별로 와 닿게 느껴지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얘기를 ‘네가 너를 사랑하면 이상형과 만나기 쉬워’, ‘네가 너를 알면 밀당을 잘하게 돼’, ‘네가 네 마음을 중요하게 여긴다면 조건이 좋은 사람을 만날 가능성이 올라가’, ‘여우 같은 사람처럼 매력을 갖고 싶다고? 그럼 네가 네 마음에 좀 더 관심을 갖고 중요하게 여기면 돼’, ‘털털해지고 싶다고? 그럼 너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너 다운 사람으로 살아가면 돼’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왠지 나를 더 알고 싶고, 나에게 관심이 가고, 좀 더 자신을 사랑하는 사람이 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가? 괜찮은 사람을 만나고 싶고 또 사랑받고 싶으니 말이다. 그런 이유로 사람이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고, 자신을 사랑하게 만드는 데 있어서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이용하면 훨씬 효과적으로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밀당’이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있지만 내가 말하는 밀당은 그저 자기 마음에 관심을 갖고 내 마음의 움직임, 내 마음이 지금 어떤 상태인지에 관심을 갖고, 지금 내 마음을 소중하게 여겨서 그것을 표현하는 것과 같으며, 이처럼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자신의 마음을 중요하게 여겨서 표현하는 것은 곧 자존감이 높은 상태와 다르지 않다. 밀당을 잘하려다 보니 자존감이 높아져 있는 상태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자신의 마음에 관심을 갖고 그것을 표현해야 해’라고 말하면 ‘자존감을 높이기 위해서 지금부터 마음에 관심을 갖고 표현해야겠어’라는 생각이 들까?


많은 사람들이 자존감이 높지 않은 상태에 있는 이유는 자신이 자존감이 낮다는 것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자존감의 높낮이는 그렇게까지 체감이 되지 않으니 말이다.  


달리 말해서 자존감이 낮은 것이 직접적으로 체감되지는 않기 때문에 자존감을 높이는데 그렇게까지 관심을 갖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이야기를 ‘밀당을 잘하려면 네 마음에 관심을 갖고, 네 마음을 중요하게 여겨서 표현할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자존감이 낮은 것은 체감되지 않아도, 사랑받지 못하는 것, 밀당을 잘하지 못하는 것은 쉽게 체감할 수 있기 때문에, 똑같은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사랑받게 위해서 너 자신을 사랑할 수 있어야 해’라고 말하면 사랑받고 싶으니까, 나도 밀당을 잘하고 싶으니까 내 마음에 관심을 갖게 되고, 내 마음을 소중하게 여기고 싶어 지고, 좀 더 표현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사실 지금 내가 말하는 내용들은 여러 종교에서 한 사람을 성숙하게 만드는 효과적인 방법 중에 하나이며, 기독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여겨진다.


성경에서 ‘사랑의 노래’ 곧 ‘아가서’는 남녀 간의 사랑을 바탕으로 인간이 자기 자신을 어떻게 사랑해야 하는지를 묘사하고 있는데, 곧 한 사람이 성숙해지는데 이성을 사랑하고 싶고,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이용하면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여우 같음’이란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어린아이’ 같은 상태와 꽤나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 여러 종교에서 말하는 어린아이처럼 겸손하고 틀이 없는 상태가 되면 남들이 보기에는 ‘여우’ 같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러나 똑같은 말을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 좀 더 행복해질 수 있습니다.’, ‘마음에 틀이 없어야 진정한 평화가 옵니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아, 행복해지기 위해서 겸손한 사람이 되어야겠다. 진정한 평화가 마음에 찾아오게 만들기 위해서 마음의 틀을 없애야겠다’라는 생각이 드는가? 사실 별 관심이 없지 않은가?


그러나 ‘마음에 틀이 없어지면 여우 같아진다’. ‘겸손해지면 여우 같아진다.’, ‘어린아이 같아질 때, 더 이성에게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된다’라고 말하면 어떨까? 와 닿지 않는 행복이니 평화 같은 것보다 훨씬 마음에 와 닿지 않는가?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어서 마음에 있는 틀을 없애고 싶어 지고, 이성에게 더 매력적인 사람이 되기 위해서 어린아이 같아지고 싶고, 여우 같아지고 싶어서 겸손해지고 싶지 않은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고 해탈이나 구원, 신과의 합일처럼 거창한 이유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던, 연애를 잘하고 싶어서, 이성에게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어서, 사랑받고 싶어서 자신을 사랑하던 동일한 결과를 얻게 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굳이 알아듣기 힘들고 별 관심도 없는 구원이니 해탈이니, 이웃 사랑이니, 마음의 평화 같은 이유를 들지 않고 여우나 밀당이나 나쁜 남자나 털털함, 매력 같은 이유로 자신을 사랑하고 행복해지고, 마음이 평화로워지게 만드는 쪽이 훨씬 낫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과거 왕이나 관료들은 역사책을 읽는 것을 중요하게 여겼다. 그것은 다른 사람의 일생, 다른 사람들의 잘하고 못한 것을 통해서 거울처럼 자신을 비춰볼 수 있기 때문이었다.


달리 말하면 자신의 단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내가 가진 단점으로 실패한 사람을 보면 단점을 고치고자 하고, 자신의 장점에 별로 관심이 없는 사람도 내가 가진 장점과 동일한 장점을 가진 사람의 성공을 보면 힘을 얻게 되기도 하는 것처럼 우리는 다른 사람을 알아감으로써 좀 더 효과적으로 자신에 대해서 관심을 갖게 되고, 자신을 알아가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생각해보자. 내가 가진 장점으로 인기가 있는 다른 누군가를 본다면 나도 내가 가진 장점을 활용하고 싶어 지지 않는가? 자신에게 관심이 가지 않는가? 또한 어떤 사람이 별로인지를 듣게 된다면 ‘내게도 그런 것이 있지는 않을까?’라는 생각이 들어서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지 않는가?


즉 어떤 남자, 어떤 여자가 괜찮은 사람이고 별로인 사람인지, 그런 사람은 어떻게 만날 수 있고 또 어떻게 사랑하고 사랑받아야 하는지를 듣게 된다면 자연히 남의 이야기지만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별로다’, ‘이런 사람은 괜찮은 사람이다’라는 얘기를 들으면 나도 별로인 사람의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 나도 괜찮은 사람의 특징을 갖고 있지는 않을까?를 생각하기 쉽다는 것이다. 즉 이성에 대한 이야기를 통해서 좀 더 효과적으로 자기 자신을 알고 싶어 지고 사랑하고 싶어 지게 될 수 있다는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것의 의도는 내가 쓴 글을 읽는 사람들이 별생각 없이 사랑 이야기를 읽는데, 이상하게 자기 자신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자신을 알고 싶어 지게 되며, 그러다 보니 어느덧 자존감이 높아져 있는 상태가 되는 것을 기대하면서 글을 쓴다.


목적 없이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힘들지만,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기 위해서 자신을 사랑하는 것은 훨씬 쉽고 효과적이니 말이다. 그런 관점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을 잘 활용할 수 있다면 남녀 간의 사랑 이야기가 자신을 사랑하게 만들고 자존감을 높이며, 좀 더 나은 사람이 되게 만들기 쉽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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