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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케터TK Feb 23. 2022

자족하는 삶을 위한 가이드

이어령의 마지막 수업 서평

이여령 교수님.


책 이름에 '이어령'이라는 실명이 들어있을 만큼 이어령이라는 이름이 곧 브랜드다. 항상 왕성한 활동을 하고 계셔서 늘 청년 같은 이미지를 갖고 있는 그가 암으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병원 암 치료를 거부하고 본인의 병을 있는 그대로 받아 드리기로 했다는 소식을 접했다. 아마도 많이 힘든 상황일 텐데도 불구하고 삶과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들려준다고 하니 이 책을 안 읽어볼 수가 없다.


김지수 기자님.


인터뷰 기자라는 독특한 포지셔닝이 있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가 브랜딩 되어 있고 주말마다 SNS 계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주고 있다. 흡입력 있는 글솜씨는 퍼블리 같은 New Media에서도 기자님의 콘텐츠를 만나볼 수 있을 정도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다.


이 책을 보기 전에 두 사람의 인터뷰 내용을 인터스텔라에서 만난 적이 있다. 그 내용도 좋았는데, 그중에서 기억나는 건 "젊은이들에게 전하고픈 말이 있는지요?"라는 기자님의 질문에 하셨던 대답이자 당부였다.


'진실의 반대는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니 망각하지 말라'는 당부였다.


"딱 한가지야.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그리스 사람들은 진실의 반대가 허위가 아니라 망각이라고 했어요. 요즘 거짓말하는 사람들은 과거를 잊어서 그래요. 자기가 한 일을 망각의 포장으로 엎으니 어리석어요. 부디 덮어놓고 살지 마세요."






책을 일주일 만에 다 읽고 깊은 여운이 일주일 이상 내 일상을 감싸고 있다.

특히 삶과 죽음을 깊이 생각해 보았다.


'나는 잘 살고 있는가?'

다행히 잘 살고 있다. 지난 3년간 매년 가족 중에 한 명씩 내 곁을 떠났고 다행히 작년에는 이런 큰일이 생기지 않았다. 그들의 죽음이 내게 끼친 영향이 적지 않았다. 지금 내 곁에 있는 가족, 지인들에 대해서도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고 특히 언젠가는 나도 죽는다는 명제 하에 앞으로 나는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에 대한 많은 생각에 빠지게 했다.


내가 고민한 생각들이 정답이 없는, 해답을 알 수 없는, 살아봐야 겨우 조금의 힌트밖에 얻을 수 없는 질문이라서 일까? 처음엔 두 분이 자연스럽게 문답하면서 나오는 명문장을 통째로 외울 수 있는 기억력, 지능을 갖고 싶었다. 그러다가 며칠 책을 점점 꼽씹으면서 생각해보니 지능보다 이런 지혜를 갖고 싶다. 살면서 저런 생각과 인사이트를 간절히 가지고 싶다.


뭘 해야 할까? 다양한 경험과 공부? 실천? 운?

그저 하루하루를 최선을 다해 살아야겠다는 것 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이 기분과 느낌을 조금이라도 더 지니고 살고 싶어 키워드를 쭉 나열해 보았다. 두분의 문답으로 구성된 책이라서인지 와닿지 않아서, 키워드를 뽑았던 부분을 필사로 남겨본다.


죽음 - 죽음은 철창을 나온 호랑이가 내게 덤벼드는 일


"고통 없는 죽음이 콜링인 줄 알았나? 아니야. 고통의 극에서 만나는 거라네. 그래서 내가 누누이 이야기했지. 니체가 신을 제일 잘 알았다고 말일세. 신이 없다고 한 놈이 신을 보는 거라네. 신이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정작 신을 못 봐."


질문 - 큰 질문을 경계하라


"묻는 자로서 저는 어떤 질문을 경계해야 합니까?"

"내가 제일 무서웠던 사람이 있네. 내 글을 일고 강원도에서 벌을 치던 사람이 꿀 항아리를 가지고 찾아왔어. 내가 물었지.

'왜 왔나?'

'저는 강원도에서 꿀벌을 기릅니다.(중략) 글 쓰는 것에 대해 물어보고 싶습니다.'

'물어보게'

다짜고짜 그러더군.

'선생님,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큰 질문이로군요!"

"나는 이런 큰 질문을 하는 사람들이 제일 무서워. 빅 퀘스쳔 big guestion이지. 문인에게 다짜고짜 '문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묻는 사람은 문학을 못하네. 그런 추상적인 큰 질문은 무모해. 철학자에게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아인슈타인에게 '과학이란 무엇입니까?'라고 물어보면 대답할 수 없어."

(중략)

"한국 사람들은 대체로 질문이 너무 커. 책 한 권으로도 담을 수 없는 큰 것을 내게 물어본다네. 평생 공부하고 써야 할 것을, 나한테 물어본다고."

"그렇 땐 어떻게 하세요?"

"할 수 없이 그것을 작은 이야기로 쪼개어 알기 쉽게 이야기하지. 안타까운 것은 듣는 자들이 그 디테일은 다 빼버리고 결론만 떼어서 전해버린다는 거네. 그러면 이렇게 되겠나? 하나 마나 한 일반론이 돼버려. 가령 '문학이란 무엇입니까? 물었더니 '자기 인생을 살라고 하더라'. 뻔한 얘기가 넘치는 세상에 내가 일반론을 보탤 이유가 없네."

"꿀벌 장수는 어떤 대답을 듣고 갔나요?"

"내가 그 사람에게 물었지.

'당신이 가장 잘 아는 게 뭔가?'

'꿀벌입니다.'

'그래? 그렇다면 꿀벌을 잘 봐. 꿀벌처럼만 하면 좋은 문학이 돼.'

 영국 철학자 프랜시스 베이컨이 그랬지. 인간은 세 가지 부류가 있다네. 개미처럼 땅만 보고 달리는 부류. 거미처럼 시스템을 만들어 놓고 사는 부류. 개미 부류는 땅만 보고 가면서 눈앞의 먹이를 주워 먹는 현실적인 사람들이야. 거미 부류는 허공에 거미줄을 치고 재수 없는 놈이 걸려들기를 기다리지. 뜬구름 잡고 추상적인 이야기를 하는 학자들이 대표적이야.

 마지막이 꿀벌이네. 개미는 있는 것 먹고, 거미는 얻어걸린 것 먹지만, 꿀벌은 화분으로 꽃가루를 옮기고 스스로의 힘으로 꿀을 만들어. 개미와 거미는 있는 걸 gathering 하지만, 벌은 화분을 transfer 하는 거야. 그게 창조야. 

 여기저기 비정형으로 날아다니며 매일매일 꿀을 따는 벌! 꿀벌에 문학의 메타포가 있어. 작가는 벌처럼 현실의 먹이를 찾아다니는 사람이야. 발 뻗는 순간 그게 꽃가루인 줄 아는 게 꿀벌이고 곧 작가라네."


용기- 인간은 차마 맨 정신으로는 자기의 몸뚱이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다


"실토하지 않을 수 없군. 글이 안 써지는 거야. 내가 암에 걸리고 마지막이 되고, 그러면 '메멘토 모리'를 감각화하는 기가 막힌 글이 나올 것이다..... 절실한 애기가 나올 것이다..... 그런데 안돼. 당황스럽더군. 그래서 기도했지.

'오 주여, 나에게 용기를 주 옵서 서.

끝없이 내 몸뚱이를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죽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주 옵서 서.'

신에게 빌어도 그런 용기는 안 주시더라고. 보들레르도 똑같은 말을 했어. 보들레르가 했던 기도가 그거라네. '오 주여. 내 몸뚱어리와 내 마음을 들여다볼 수 있는 용기를 주옵소서.'

"왜 용기가 필요한 줄 아나? 인간은 차마 맨 정신으로는 자기의 몸뚱이와 마음을 들여다볼 수 없는 거야."

"(탄식하며) 이해할 수 있나? 글이 안 써져. 읽을 수도 없고. 어떤 글을 써도 평범해. 중학교 학생 작문 같은 것밖에 못써. 그게 죽음이야. 내 모든 지식, 모든 생각을 가루로 만들어버리더군. 다 지워버렸어. 암세포는 내 몸의 지우개였어. 내 머릿속에 들어가 있는 모든 것의 지우개였어. 지우개로 지워놓으면 내가 뭘 쓰나? 공백이야."


언어 - 우리는 언어를 기반으로 생각한다


"우리는 언어를 기반으로 생각을 하는 거야. 정리하자면 물질이 그 자체가 언어가 아니라 차이의 의미가 언어라는 말일세."

"최근에는 가장 물질적인 건축조차 장식이나 공간을 넘어서 정보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만."

"그걸 잘 분별해야 하네. 그래야 이 세계를 정확히 판단하고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 있어. 가령 도로 가운데 노랗게 그은 선 있잖아? 중앙 분리선. 자동차 타고 그거 넘어갈 수 있나, 없나?"

"넘어갈 순 있지만 안 넘어가죠."

"맞아. 안 넘기로 약속했으니 넘지 않는 거야. 그런데 고속도로 중앙분리대는 어때?"

"못 넘어가죠."

"맞아. 중앙분리대는 기호가 아니라 물질이거든. 반면 중앙분리대선은 물질이 아니라 기호이고. 똑같은 분리의 역할을 해도 콘크리트로 중앙분리대를 만들어 못 가게 하는 것은 자연계로 규제하는 것이야. 반면 선이라는 기호를 긋는 건 법으로 금지하는 거지. 기호를 뒷받침하기 위해서는 법이 필요하거든. 이 세상은 자연계, 기호계, 법계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져 있다네. 이 세 가지는 전혀 다른 세계야. 이걸 이해해야 우리는 혼돈 없이 세계를 보고 분쟁 없이 대화할 수 있어."


생명의 주권 - 항상 개인의 관점을, 제도의 맹점을 함께 봐야 한다


"선생님은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믿음이 있으신 거죠?"

"자율성이 아니라 생명의 주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거라네. 개인의 생명에 국가나 제도가 관여하기 시작하면 그게 전체를 위한 합리적인 결정 같아도 위험해. 미친 사람 가두는 건 당연해 보이지만, 미쳤다는 걸 누가 결정하느냐 말이지. 겉으로 보면 감옥이나 정신병원은 당연해 보여도 그 안에 억울하게 갇힌 사람이 얼마나 많겠나. 정상이 아니라는 건 누구의 결정이야? 내 말은..... 환자든 죄인이든 격리하고 처벌을 내릴 때, 무조건 '전체를 위한 결정'이라는 일반론에서 시작하면 안 된다는 거야. 항상 개인의 관점을 제도의 맹점을 함께 봐야 해. 그런 것들을 보완하기 위해서 재판도 법도 그물을 촘촘히 하고 정밀해지는 거지만, 특정 상황에서,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고 가정해보라고."

"경계해야죠"

(중략)

"이보게! 한 마리가 길을 잃었다면 다른 아흔아홉 마리도 길을 잃을 수 있어. 왜 그 생각을 못 하나? 길 잃은 한 마리가 아흔아홉 마리와 다른 게 아니야. 똑같아. 똑같다네. 어려운 이야기가 아니야. 한 생명의 죽음은 모두의 죽음을 예표하는 거야."

(중략)

"'백만 명이 죽었다'라고 하면 그건 통계야. 백만 명이 죽어도 그건 다 한 사람의 사적 죽음이거든. 그걸 잊으면 안 돼. 이 세상에 백만 명이라는 건 없어. 국가에서, 사회에서 볼 때 백만 명인 거야. 서부 전선도 독일 병사의 시각에서 보니까 '서부 전선'인 거잖나. 그게 인식론의 문제야. 철학자들이 말하는 타자성의 철학이 거기서 나오지. '타자를 나의 것으로 만들지 말고 그가 있는 그대로 있게 하라.'

 타자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게 사랑이고, 그 자리가 윤리의 출발점이라네. 타자를 나의 일부로 받아들이기 위해 왜곡해선 안 돼. 일례로 우리는 내가 아플 때 남이 그걸 아는 줄 알아. '아프냐? 나도 아프다!' 그런데 그 아픔은 자기 아픔을 거기다 투영한 것뿐이네."

생각 - 인지론, 행위론, 판단론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한다


"사람들은 남의 부탁을 잘 안 들어줄 것 같지만, 실험해보면 돕는 자들이 훨씬 만다.....' 이게 윤리적 발상이라는 거죠?"

"그렇다네. 인간이 선하냐, 악하냐, 성선설이냐, 성악설이냐..... 논의가 이렇게 흐르게 되면 그건 윤리적 판단이지. 진眞의 세계에 들어가면 선악과는 다른 차원으로 그게 진짜냐, 가짜냐로 갈라져. '인간이 참인가, 거짓인가'라는 질문은 '인간이 착한가, 착하지 않은가'의 물음 하고는 다르다네. '참인가 거짓인가'는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이고 '착한가 악한가'는 행위를 다루는 행위론이야. 선악善惡은 행위를 통해서만 드러나거든.

그런데 아름다움의 영역으로 들어가면 또 달라져. 살인자여도 잘생긴 사람 있잖아. 살인자라고 해서 다 험악하게 생긴 것은 아니거든. 그건 윤리 하고도 관계없고 진리 하고도 관계없어. 아름다움과 추함은 또 다른 거라네. 참을 다루는 진眞도, 행위를 다루는 선善도 아니야. 제 각자 미美를 느끼고 판단하는 것은 표현의 영역이라네.

생각을 다루는 인지론, 실천을 다루는 행위론, 표현을 다루는 판단론. 인간으로 풍부하게 누리고 살아가려면 이 세 가지 영역을 구문 할 줄 알아야 하네."


interest - 관심, 관찰, 관계


"선생님의 평생의 interest는 글쓰기, 스토리텔링이었고요."

"그렇지. 글을 쓸 때 나는 관심, 관찰, 관계..... 평생 이 세 가지 순서를 반복하며 스토리를 만들어왔다네. 관심을 가지면 관찰하게 되고 관찰을 하면 나와의 관계가 생겨"


신념 - 오늘이 제일 아름답다


"정의냐, 불의냐도 진영에 따라 답을 내죠."

"(혀를 차며) 참으로 안타까운 일일세. 지금 내가 자네와 이 정도 대화를 하는 것도 내가 자판기가 아니기 때문이라네. 답이 정해져 있으면 대화해서 뭘 하겠나? 자네가 만약 내일 같은 질문을 한다면 내 대답은 달려져 있을지도 몰라. 그래서 오늘의 대화가 중요한 거야. 우리가 내일 이 대화를 나눴더라면 오늘 같지 않았을 걸세. 그래서 오늘이 제일 아름다워. 지금 여기. 나는 오늘도 내일도 절대로 변하지 않는 신념을 가진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 신념 가진 사람을 주의하게나. 큰일 나. 목숨 내건 사람들이거든."

"신념이 위험한가요?"

"위험해. 신념처럼 위험한 게 어디 있나?"

"왜 위험하죠?"

"육탄 테러하는 자들이 다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네. 나치 신념을 가진 사람들이 8백만 명 유대인을 죽였어. 관점에 따라, 시간에 따라 변하는 게 인간사인데 '예스'와 '노우'만으로 세상을 판단하거든. 메이비 maybe를 허용해야 하네. 메이비 maybe가 가장 아름답다고 포크너가 그랬잖아. '메이비 maybe' 덕분에 우리는 오늘을 살고 내일을 기다리는 거야.

 오늘도 내일도 똑같으면 뭐하러 살 텐가. 진리를 다 깨우치고 신념을 가진 사람들은 더 이상 살 필요가 없네. 이제 다 끝났잖아. 서울이 목표인 사람은 서울 오면 끝난 거야. '인생은 나그넷길'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경유지, 반환지가 있을지언정 목표는 없네. 평생을 모험하고 방황하는 거지. 길 위에서 계속 새 인생이 일어나는 거야. 원래 길의 본질이 그래. 끝이 없어. 이어지고 펼쳐질 뿐."


상처와 활 - 동시에 가져야 사회가 이루어진다


"악, 퇴폐, 질병..... 이런 것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사회가 진짜 건강한 사회야. 술주정뱅이, 거지 이런 낙오자들을 싹쓸이해서 가둬버린 무균 사회는 희망이 없어. 그게 푸코의 '감옥의 역사'라고. 유럽과 미국의 역사를 보게. '마농 레스코'라는 소설에도 나오지만 유럽에서 창녀, 깡패, 죄수들을 전부 배에 태워 미국으로 쓸어 보내잖아. 그렇게 해서 남은 사람들로 살아가면 그게 건전한 사회인가? 아니라네. 반면 미국은 그런 쓰레기 취급받던 인간들이 함께 모여 성장해간 거야. 상처와 활을 동시에 가졌기 때문에 구대륙이 아닌 신대륙에서 새로운 종교, 정치, 문화가 끓어오를 수 있었던 거야."

(중략)

"가족도 마찬가지야. 집안에 깡패 같은 놈이 하나 있고 탕자 같은 놈이 하나 있어야 정이 두터워지지. 전부 모범생만 있으면 효자도 안 나와. 전부 효자인데 무슨 효자야. 불효자가 있으니 효자도 있는 거지"

영혼의 생명력 - 나를 바라보고 나를 장악하고 내게 명령하는 나


"그런데 선생님, 필록테테스는 어떻게 무인도에서 죽지 않고 계속 살아 있을 수 있었을까요?"

"영혼의 생명력 덕분이네. 필록테테스는 영혼이 죽지 않았어. 오히려 더 강렬해졌지. '나 아파. 나 상처 입었어. 나 외로워'라고 외치는 자기 모습을 객관화해서 바라보았지. 끝없이 아파하는 자기와 그것을 바라보는 자기, 그 자기와의 싸움 속에서 맑은 영혼을 갖게 된 거야. 활을 잡게 되는 거지. '바라보는 나' 그게 자의식이고 자아라는 거야.

 우리가 서양에 지는 게 이 자아라는 거네. 동양인들은 그냥 있어. 내 육체와 내 정신을 바라보는 나, '난 바보야' '나는 죽어가' '나는 아파'라고 말하는 나가 없기 때문에 집단주의에 쉽게 매몰되는 거라네. 일렬로 죽 서는 거야."

"나를 바라보고 나를 장악하고 내게 명령하는 나....."

"그래. 내가 나의 의지가 있으면 그건 70억 명하고 대립하는 거야. 나는 절대로 타자가 될 수 없기에."

(중략)

"인간이 함께 사는 게 그렇게 힘든 거라네. 개인이 혼자 있는 것도 그렇게 힘든 거라네. 그래서 나는 글을 쓴다네. 현실에서는 끝낼 수 없는 전쟁이지만 글 속에서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여..... 현실의 무대에는 필록테테스가 없지만, 연극 무대에는 있으니까."


자신 -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


"나를 만족시킬 만한 스승이 없다는 것과 같아. 인간이라는 존재는 바깥에서 나를 바꾸도록 용납하지 않는다네. 남이 나를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하나?"

"..... 어렵지요."

"어려운 일이야. 성인군자의 아들도 나쁜 짓을 해. 아버지의 선한 피를 받았는데도 교화가 안 되지. 공자님은 아들을 가르치치 않았어. 가르칠 수 없는 거지. 가장 가까운 피붙이조차 가르칠 수 없어. 결국 남을 가르친다는 것은 엉터리라네.

 남을 가르칠 수도 없고 남에게 배울 수도 없어. 인간이 그런 존재야. 거기로부터 시작해야 하네. 그게 실존이야. '나는 혼자다'라는 걸 모르는 사람과는 얘기가 통하지 않아. 군중은 남이 이 말하면 이리로 가고, 남이 저 말하면 저리로 가지. 휩쓸려 다녀. 자기가 없으니까 자꾸 변하는 거라네."

"자기라는 게 뭔가요?"

"자기는 남에게 배울 것도 없고 남을 가르칠 것도 없다는 걸 알고 있는 '나'라고 할 수 있지."

"그런데 우리는 배움은 끝이 없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 배움은 결국 '나는 남에게 배울 수도 남을 가르칠 수도 없다'는 걸 아는 경지에 도달하는 배움인가요?"

"허허. 궁극적으로 인간은 타인에 의해 바뀔 수 없다네. 스스로 깨닫고 스스로 만족할 수밖에 없어. 그게 자족이지. 자족에 이르는 길이 자기다움이야. 남이 이랬다고 화내고 남이 저랬다고 감동해서 그 사람의 제자가 되는 게 아니란 말일세. 남하고 관계없이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경지를 동양에서는 군자라고 해. 군자가 되는 것이 동양인들의 꿈이었지. 스스로 배우고 가르치고, 스스로 알고 깨닫는 자. 홀로 자족할 수밖에 없는 자..... 그래서 군자는 필연적으로 외롭지."

"남을 좇지 않으니 외롭겠지요."

"외로워보지 못한 사람, 내가 혼자라는 걸 느껴보지 못한 사람과는 대화해도 소용이 없다네. 외로움 속에서 자족을 배운 군자가 있기에, 세상의 가르침과 배움이 있는 거지. 한편으로 군자가 되지 못한 사람이 예술가가 되는 거라네. 자족을 이룬 사람이 군자, 못 이룬 사람이 예술가라고나 할까.(중략)"

시야 - 네 개의 눈


"그런데 선생님! 눈앞의 시야만 보고 살아가는 우리는 '공백'의 세계까지 나아가지 못합니다.(중략) 선생님은 무한한 우주의 맥락에서 어떻게 '지금의 나'라는 좌표를 파악합니까? 선생님이 보는 '시계 視界'는 어디부터 어디까지 입니까?"

"(그윽하게 바라보며) 시계라고 했나? 좀 뚱딴지같은 소리로 들릴지 모르겠지만, 정신병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네. 정신 분열증과 편집증이야. 흩어지는 게 정신분열이고, 집중하는 게 편집증이라네. 모든 인간은 다 정신분열과 편집증적인 증세가 있어. 심각하냐 그렇지 않으나먄 다르지. 자네가 지금 이야기하는 시야, 시계는 그것과 관련이 있네.

 편집증적인 면이 강하면 시야가 좁아. 하나의 점을 향하지. 눈이 앞에 달린 사람들 있지? 그런 사람들이 점을 보는 사람들이야. 동물은 늑대, 호랑이, 사자야. 앞쪽에 눈이 달려 있지. 예를 들면 사자는 먹이를 쫗아갈 때 전부를 쫓지 않아. 한 마리만 쫓아가지. 눈이 앞에 헤드라이트처럼 달려 있는 거야. 반면 사슴, 소, 말은 옆에 달려 있어. 쫓는 놈은 목표물을 향해 달리지만 도망가는 놈은 이리저리 봐야 해. 시야가 넓어야 하지. 어느 놈이 습격하나, 어느 길이 열려 있나, 두루두루 봐야지. 그래서 초식동물은 아무리 큰 동물이라도 눈이 백미러처럼 붙어 있는 거야. 도망가는 놈은 좌우, 전방, 후방 360도로 보지.

 독재자는 전부 편집증이야. 먹이, 국가, 목표..... 이런 단일한 목표를 획일적으로 좇아. 보통 사람들은 무리 지어 살고 도망가는 초식동물에 가까우니 눈이 흩어져 있어. 양미간 벌어진 사람들은 초식동물 비슷해. 착한 게 아니라 약한 사람들이지. 반면 눈이 모인 사람들은 늑대처럼 공격성이 있어. 인생을 흩어진 눈으로 사는 사람은 언제나 인생이 산책이야. 360도로 다 열려 있어서 여기저기 다니는 사람이라. 블라뇌르라고 하지. 벤야민이 얘기한 아무 목적 없이 도시를 건들건들 다니는 사람들. 한가로운 구경꾼들. 그런데 하나의 목적으로 직장에서 점찍고 집으로 오는 사람은 편집증적 사람들이야. 한 점밖에 몰라."


돈 - 돈의 길, 피의 길, 언어의 길


"돈은 인생에서 무엇입니까?"

"인간이 발견한 것 가운데 가장 기가 막힌 것이 돈이라네. 인간은 절대 혼자 살 수 없기 때문에 반드시 교환을 하며 살아가지. 우리가 숨 쉬는 것도 식물과의 교환이야. 우리는 탄소를 내뱉고 식물은 산소를 내뱉지. 모든 생명 가치는 교환인데, 핵심 교환은 세가 지야.

 첫 번째는 피의 교환이라네. 그게 사랑이고 섹스지. 사랑은 생식이라는 목적을 벗어나지 않아. 교환가치가 없다면 인종은 멸종되겠지. 그다음은 언어 교환. 그리고 돈의 교환이라네. 돈의 교환을 통해 생간과 소비와 시장이 만들어지는 거지. 세상이 복잡해 보여도 피, 언어, 돈 이 세 가지가 교환 기축을 이루며 돌아가고 있어. 돈이 없으면 시장이 성립이 안되고, 피가 없으면 더 이상 어린아이가 생길 수 없고, 언어가 없으면 사상이나 정의 , 선, 가치는 다룰 수 없겠지. 내 말이 아니라네. 레비스트로스가 문화인류학에서 설명한 인류사의 3대 교환 구조지.

 피, 언어, 돈을 기억하게. 그렇다면 돈이란 무엇인가? 아주 간단해. 내가 돈의 주인이 되면 돈은 나의 최고의 협력자고, 하인이 되면 나는 최악의 인간이 되는 걸세."

(중략)

"여러 번 말했지만, 돈 때문에 하기 싫은 일을 억지로 한 적은 없었어. 오히려 올림픽 행사처럼 돈 안 받고 할 때 가장 신이 나서 했지. 돈에 무관심하란 말은 아니야. 돈이 무엇인지는 확실히 알아야 하네. 애들한테 가르칠 때 황금은 황금으로 보고, 돈은 돈으로 보도록 가르쳐야 하네. 경계를 구분하지 못하면 비극이 생겨. 사실 생명과 돈처럼 먼 게 없다네."

"생명과 자본을 붙여놓은 것이 선생님이 말씀하신 생명자본인데요?"

"그건 물질자본과 대비되는 자본을 얘기한 걸세. 그러나 교환 구조로 보면 피의 자유로운 교환을 막고 있는 게 돈이야. 그래서 이수일과 심순애가 생기는 거지. 나는 예를 좋아하는데 돈 때문에 다른 놈한테 팔려가는 일이 생기는 거야."

"로열패밀리들, 재벌가들은 피와 돈을 섞어 더 큰 부를 만들지 않습니까?"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야. 돈은 돈의 교환을 해야지. 피의 교환을 하면 안 되는 거거든. 자기는 첫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은데, 부모는 부잣집에 시집보내려고 하잖아. 드라마에서 맨날 그런 얘기하더구먼. 하하. 피의 교환과 돈의 교환은 경계가 다른 건데, 돈의 교환으로 피의 교환을 하고 언어의 교환을 하려 들면 비극이 생겨. 3대 교환은 서로 제갈 길이 있는 거야.


한국인 -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강하다


"나는 항상 언어로 시대를 예지해왔네. 언어를 파고들면 다 그 안에 있어. 그런데 아쉽게도 디지털, 아날로그라는 말도 그 계통을 제대로 이해해서 쓰는 사람이 없다네."

"흔히들 온라인 오프라인 개념으로 쓰고 있는데요."

"이번 기회에 정확히 설명해주겠네. 여기 뱀 한 마리가 있다고 치세. 어디서부터가 꼬리인가?"

"글쎄요. 한 10센티 정도 끝부분이 꼬리인가요?"

"아니야. 뱀은 전체가 꼬리야. 연속체지. 그게 아날로그일세."

"아하! 뱀이 아날로그면 디지털은 뭐죠?"

"디지털은 도마뱀이야. 도마뱀은 꼬리를 끊고 도망가. 정확히 꼬리의 경계가 있어. 셀 수 있게 분할이 되어 있으면 그게 디지털이야. 아날로그는 연속된 흐름, 파장이야. 반면 디지털은 계량화된 수치, 입자라네. 이 우주는 디지털과 아날로그, 즉 입자와 파장으로 구성되어 있어.

더 쉽게 얘기해볼까? 산동네 위의 집이라도 올라가는 방법이 다르지. 언덕으로 올라가면 동선이 죽 이어져서 흐르니 그건 아날로그야. 계단으로 올라가면 정확한 계단의 숫자가 나오니 그건 디지털이네. 만약 언덕과 계단이 동시에 있다면 그게 디지로그야."

(중략)

"'누이 좋고 매부 좋고'라는 말이 있지? 뽕도 따고 님도 보고. 이거 제일 잘하는 사람들이 한국인이야. '이거냐? 저거냐?'가 아니라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는 거지.' 외국인들은 디지털이면 디지털, 아날로그면 아날로그, 경계가 뚜렷해. 그런 이원론으로 과학과 합리주의를 만들고 매뉴얼과 원칙을 만들어 세계를 리드했지. 하지만 한국인은 정량적인 것과 정성적인 것, 원칙과 직관을 융합해버려. 그래서 조직도 오거나이즈가 잘 되는 시스템보다 비상시에 만드는 임시 조직이 더 잘 굴러가. 한국 사람이 위기에 강하다고 하는데, 위기에 강한 게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상황에 강한 거라네."

"한국인들은 미리 계산하고 계획하고 자로 잰 듯 원칙에 맞게 행동하지 않고, 흐르듯이 상황에 맞춰 직관으로 반응한다는 거지요?"

"그렇지. 우리말에 버려두라는 말이 있지? 버리는 것과 두는 것의 중간이야. 그런데 버려두면 김치가 묵은지 되고, 누룽지가 숭늉이 되잖아. 버리지 말고 버려두면, 부풀고 발효가 되고, 생명의 흐름대로 순리에 맞게 생명자본으로 가게 된다네. 그게 살아 있는 것들의 힘이야. 버리는 건 쓸모없다고 부정하는 거잖아. 버려두는 건, 그 흐름대로 그냥 두는 거야. 코로나까지도 버려두면 백신이 되는 거야. 재생이 되는 거라고. 그게 생명이 자본이 되는 원리야. 디지털과 아날로그가 공존하는 힘이지."

리더 - 리더는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


"대적이 아니라 '경협(경쟁하면서 협력하는 것)'이 중요하군요."

"그렇지. 에너미enermy는 안 돼. 라이벌rival이어야지. 라이벌의 어원이 리버river야. 강물을 사이에 두고 윗동네 아랫동네가 서로 사이가 나빠. 그런데도 같은 물을 먹잖아. 그 물이 마르고 독이 있으면 동네 사람이 다 죽으니, 미워도 협력을 해. 에너미는 상대가 죽어야 내가 살지만, 라이벌은 상대를 죽이면 나도 죽어. 상대가 있어야 내가 발전하지. 같이 있는 거야. 그게 디지로그 정신이야. 기업도 마찬가지라네. 대기업과 중소기업, 벤처는 에너미가 아니라 라이벌이야. 큰 조직은 작은 조직의 모험 정신을, 작은 조직은 큰 조직의 시스템을 배우며 수시로 모이고 흩어지기를 반복해야 해. 이 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게 뭔 줄 아나? 인터페이스야. 위치로 보면 목!"

"목이요? 머리와 가슴을 이어주는 목?"

"그렇지! 목! 분리하면서도 이어주는 목! 머리와 가슴을 잇는 목, 손과 팔을 잇는 손목, 발과 다리를 잇는 발목, 모든 국가, 모든 기업, 모든 개인은 이 '목'이 가장 중요해. 사람 꼼짝 못 하게 할 때 어떻게 하나? 목에 칼 씌우고, 손목에 수갑 채우고, 발목에 쇠고랑 채우지. 인터체인지를 묶는 거야. 우리 어릴 때 놀 때 어른들이 "사이좋게 놀아라" 그러잖아. 그 사이가 '목'이야. 디지로그와 생명자본은 디지털과 아날로그의 목에 막히지 않고, 사이가 편안한 상태야. 반면 코로나는 문명과 자연의 사이가 나빠서 왔지. 이 나쁜 사이, 뭉친 목을 풀어줘야 세계가 잘 굴러간다는 얘길세.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필요하겠군요?"

"그런 사람이 바로 21세기의 리더고 인재라네. 어느 조직이든 이쪽과 저쪽의 사이를 좋게 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 조직은 망하지 않아. 개발부와 영업부, 두 부서를 오가며 서로의 요구와 불만을 살살 풀어주며 다리 놓는 사람, 그 사람이 인재고 리더야. 리더라면 그런 '사잇꾼'이 되어야 하네. 큰소리치고 이간질하는 '사기꾼'이 아니라 여기저기 오가며 함께 뛰는 '사잇꾼'이 돼야 해."

"한때 선생님은 양치기 리더십을 말씀하셨어요. 목자가 양 떼를 살피듯..."

"그건 리더와 팔로워의 관계를 이야기한 거라네. 목자는 양의 앞도 뒤도 아닌, 양 떼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양을 지켜낸다네. 진정한 목자는 양가죽을 쓰고서라도 스스로 양이되어 그들의 삶에 동참하는 거야. 리더지만 플레이 어지. 한니발이 그랬잖아. 부하와 똑같은 밥 먹고 똑같은 잠자리에 들고 똑같이 싸웠지.

그런 조직에서는 한 마리 양이나 아흔아홉 마리 양이나 똑같아. 경중이 없지. 아흔아홉 마리 양 버려두고 한 마리 찾는다는 이야기는 기업에 적용해도 다르지 않아. 아흔아홉 마리는 이 세상에 없어. 오직 한 마리 양만 있지. 천 명 다니는 대기업도 한 사람이고, 열 명 다니는 벤처기업도 한 사람이야. 스스로 일어설 줄 아는 한 마리 양이 자기 인생, 자기 조직의 리더가 되는 거라네."





'사람은 타인에 의해 바뀌지 않는다', '자족'이 뇌리에서 떠나질 않는다.

우리는 타인의 아픔을 알지 못하며 그저 자신의 아픔을 투영한 것뿐이다. 사랑이라는 건 그런 타인의 절대성을 인정하는 것이라니. 혼자는 외롭고 이런 타인과 같이 가는 게 쉽지 않다는 말이 왜 이렇게 마음에 와닿았을까?


자족하는 오늘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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