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석만큼 빛나는 것
어떤 일이나 감정을 기억하는 방법은 저마다 다르다. 누군가는 셔터를 누르기도 하고, 누군가는 연필을 잡는다. 또 누군가는 오로지 자신의 감각에만 의존하기도 한다. 필통 속 세계에는 형광펜이 그 역할을 맡고 있다. 대충 알록달록하기만 한 것은 손이 잘 안 간다. “내가 바로 형광펜이오!” 하는 것처럼 노골적으로 쨍한 색을 뽐내는 것들이 있는데 심히 부담스럽다. 문자를 잡아먹는 느낌이 든달까. 또 어떤 형광펜은 발림성이 꼭 닭가슴살처럼 뻑뻑하다. 조금 과장해서 칠판에 손톱을 긁는 느낌과 유사하다. 내가 쓰는 형광펜은 파스텔톤의 차분한 색상이 단아하게 문자를 품어준다. 조각칼로 무심하게 툭 잘라낸 모양새의 비스듬한 펜촉은 시크하고 유용하다. 게다가 Anti-Dry-Out 기술이 적용되어 뚜껑 없이도 4시간 동안이나 잉크가 마르지 않는다고 한다. 뚜껑 닫을 정신도 없이 몰두해 본 적은 없어서 모르겠지만 대단한 기술이다.
형광펜은 편견이 없다. 정답 이거나 오답이거나 상관없다. 내가 기억하고 싶고,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그걸로 뚜껑을 열 충분한 이유가 된다. 그러니 형광펜은 쓰는 사람의 내면과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된 셈이다. 남들에겐 와닿지 않고 사소해 보여도 내가 중요하다고 생각하면 온갖 색을 입혀 주인공으로 만들 수 있다. 형광펜의 흔적을 따라가다 보면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대충은 알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형광펜이 이토록 매력적인 필기구였다니. 필통 안에만 갇혀있기엔 너무 아깝다. 그러니 좋아하는 색상 몇 개를 머릿속 한쪽에 두어야겠다. 기억하고 싶은 순간, 감정이 와르르 넘치는 순간에 칠해야겠다. 그 순간이 필요할 때, 쉽게 꺼내 볼 수 있도록. 오랜 시간 은은하게 빛날 수 있도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