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베개가 불편한 이유
나는 ‘숙면’에 진심이다. 깨지 않을 정도의 기분 좋은 꿈이 곁들여지는 것을 좋아한다. 자는 동안 어깨부터 목까지 뻐근한 곳이 없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이 바로 베개다. 그런데 마음에 쏙 드는 것을 찾기는 쉽지 않다. 유려한 굴곡의 경추 베개, 재잘거리는 메밀 베개, 뒤통수를 잡아먹는 메모리폼 베개까지. 안 써본 것이 없다. 그렇게 쌓인 것들이 자기들끼리도 좁은지 어깨를 바짝 붙여 2열 종대를 유지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럽다.
내가 편하게 잤던 베개는 뭐지? 문득 떠오른 발상의 전환이었다. 더듬더듬 기억을 꺼내 봤다. 강화도 펜션에서 모닥불 피웠던 날의 베개, 친구가 툭 던져준 색 바랜 베개, 혼자 갔던 구좌읍 게스트하우스 베개. 크기도, 소재도, 높낮이도 다 다르다. 돌이켜보니 행복한 날의 베개는 대체로 편했다. 그렇다고 집에서 편히 잔 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운동을 엄청 열심히 했다거나 종일 바빴던 날엔 조금 뒤척이더라도 바로 꿈나라행이다. 아, 베개보다 중요한 건 따로 있구나.
요즘 무언가에 열중해 본 적이 없다. 작업실을 꾸민다는 둥, 회사 다닐 때보다 바쁘게 살 거라는 둥 호기롭게 퇴사했다. 그런데, 쉬고 싶어서 퇴사한 터라 너무 최선을 다해 쉬고 있다. 언젠가 찾아올 무력감과 불안함을 미리 걱정하고 싶진 않았다. 감정에도 감정이 있을 텐데, 외면받아 서운한 감정들이 자기 좀 봐달라며 나도 모르는 사이 베개에 스며들었나 보다. 부쩍 베개가 불편해진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편한 베개를 만들기 위해서 아침에 조깅하고, 공부하고, 갓생사는 전개가 자연스럽긴 한데 사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그저 내 감정을 알아챘다는 것만으로 만족한다. 불안이 베개를 잡아먹지 않도록 먼저 안부를 묻는 사이가 되어야겠다. 탁한 감정이 묻어 조금 얼룩진 베개이지만 괜찮다. 이제부터라도 소박하고 따뜻한 충전재로 꽈악 채워야겠다.
구름처럼 부풀어 오른 밤, 깨지 않을 정도의 기분 좋은 꿈을 꾸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