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 해군들도 배멀미를 하나요?

[군함 타고 세계일주]

by 탱이사는이야기

“오늘의 점호는 이걸로 마친다. 아, 마지막 공지사항. 러시아 블라디보스톡 일정은 2박 3일에서 1박 2일로 단축되었다. 혹시 질문 있나?”


“아!” 훈육담당님이 침실에서 나가시자마자 우리들은 모두 아쉬움의 탄식을 외쳤다. 다들 하루가 왜 줄어들었는지 궁금해하는 눈치였지만 점호가 길어질까 봐 물어보는 친구들은 없었다. 참 아쉬웠다. 그도 그럴 것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톡은 우리 순항훈련의 첫 번째 기항지였기 때문이다. 첫 단추를 잘 끼워야 한다고 했던가? 기항지에 대해 PPT로 브리핑까지 하며 관광을 철저하게 하겠노라 다짐했었는데 하루가 줄어버려 김이 새어버렸다.


하루를 뺏아간 범인은 태풍 산바였다. 필리핀 동남쪽 해상에서 생겨난 태풍 산바는 한반도를 통과하여 블라디보스톡이 위치한 러시아 극동 지방까지 도달할 것으로 예측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순항훈련전단에서는 하루빨리 출항하여 산바로부터의 영향을 최소화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태풍 산바의 이동경로


우리는 아쉬움을 한가득 남긴 채 블라디보스톡을 떠나 다음 기항지인 미국으로의 방향타를 잡았다. 바다도 우리의 마음에 진하게 남아 있는 아쉬움을 보았는지 성난 파도로 슬픔의 마음을 공감해 주기 시작했다. 잔잔하게 호수 같을 때에도 나 홀로 속이 울렁거려 해병대를 가야겠다던 K는 진작에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날 K는 우리들에게 해병대 대신 해군을 고르면 장을 지지겠다는 각서를 썼는데, 막상 땅을 밟고 진로를 정할 때에는 해군을 선택하고 말았다. 해병대 지원을 희망하던 후배 생도들은 아쉬운 마음을 담아 그에게 영원한 해병상(주로 변절자에게 주어지는 상)을 헌정했고, 그렇게 영원한 해병대인 현역 해군 소령 K는 해군-해병대의 화합의 상징이 되었다.


영광스런 영원한해병대상(K소령 제공)


무튼 배멀미를 하고 있는 K 주위에 몰려들어 놀리던 동기들도 파도가 점점 높아짐에 따라 말이 없어지고 하나둘씩 사라지기 시작했는데, 한두 명씩 침대와 한 몸이 되는 것을 보고 있자니 태풍이 오고 있는 게 몸소 느껴졌다. 파고가 4m가 넘어가고 거의 모든 동기들이 침대에 눕게 되었을 때 새로운 사실을 하나 알게 되었는데, 그건 바로 내가 배멀미가 없는 편이라는 사실이었다.


파고가 6m가 넘어가자 군함 전체가 생존모드로 전환했다. 일체의 과업을 취소하고 순수 항해만을 위해 당직근무에만 집중하여 이 위기를 넘기기 위함이었다. 음식을 조리할 수도 없는 환경이어서 나처럼 일부 배멀미가 없는 사람들이 조리실에서 식빵과 바나나를 들고 각 방으로 배식을 나갔다. 침대 위에 누워 신음하고 있는 동기들에게 새모이 나눠주듯이 식빵과 바나나를 나누어주는데 훈육담당님이 "다들 다시 게워내더라도 먹어야 속이 편하다. 얼른들 먹어"라고 말씀하셨지만 컨디션이 안 좋은 동기들은 훈육담당님의 말을 듣지 못했다. 상관의 말에 무조건 복종하는 군인정신을 가진 동기들이 음식을 먹고 침대에서 일어나길래 컨디션이 좋아졌나 싶었지만 먹은 것을 게워내고 다시 눕는 것을 보며 내가 배멀미가 없는 게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아, 이 자식 멀미 안 한다더니 누워있는 거보소?

- 그러는 지도 누워있으면서ㅋㅋ, 해군 가는 놈이 해병대 가는 나처럼 누워있으면 어쩌냐?

(TMI : 물론 K는 결국 해군을 갔다)


배멀미에 힘들어하는 가운데에도 힘들어하는 서로를 보며 웃고 놀리는 동기들을 보고 모두가 다 같이 웃을 수밖에 없었다. 남자 5~60명이 각자 침대에 누워 웃고 있는 모습. 배멀미를 하면서도 웃고 있는 우리들 스스로가 너무 웃기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평생 철들지 않는다'는 말이 딱 맞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들 신기했다. 이렇게 멀미로 인해 침대에 누워있다가 속을 비우고 다시 침대로 눕는 것을 반복했던 사람들이 어떻게 본인 당직근무시간만 되면 멀쩡하게 일어나 당직근무를 설 수 있는지. 4시간씩 하루 2번, 8시간 동안은 멀미를 안 할 수 있게 되는 건지 신기할 따름이었다. 책임감이 사람의 육체에도 영향을 줄 수 있는가 감탄스러울 정도였다.


태풍과 싸운 지 이틀쯤 되었을 무렵 군함은 일본 열도를 지나 태평양의 한복판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태풍의 영향에서 거의 벗어나게 됐을 때 언제 그랬냐는 듯이 바다는 평온하고 고요해졌다. 성난 태풍이 물러난 자리에는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었는데, 그 어느 때보다 맑은 날씨와 아무 땅도 없는 태평양 한가운데에 어디서 왔는지 궁금한 새들 그리고 멀미와의 전투를 이겨낸 우리들의 밝은 얼굴까지. 너무나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어 이게 정말 같은 바다라고 할 수 있는지 싶을 정도였다.


‘대체 태풍 같은 건 왜 생기는 거야!’ 싶다가도 태풍이 선물해 주는 맑은 공기와 깨끗한 바닷물을 보면 자연이 괜히 만드는 것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 생도들 역시도 자연이 선물한 태풍이라는 강한 경험을 통해 배멀미에 점차 적응하는 뱃놈이 되어가니까 말이다.


현재 위치(블라디보스톡-샌프란시스코 항해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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