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태평 May 20. 2022

아빠와 플라타너스 나무

- 플라타너스 이야기


어린 시절, 우리 집과 가락시장 사이에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길이 길게 이어져있었다. 버스로 한 두정거장, 도보로는 약 15분-20분 정도의 거리였는데, 아빠는 가락시장을 갈 때면 대중교통을 이용하기보다 늘 나를 데리고 플라타너스 길을 따라서 오래 걷기를 좋아했다.

아빠의 손을 잡고 작은 키로 우러러 바라보는 플라타너스 나무는 산처럼 키가 컸고, 숲처럼 굉장히 빽빽하게 늘어져있던 기억이다. 길 위에 떨어진 플라타너스 낙엽을 주워 맡아본 냄새는 나무답지 않게 매캐하고 불편한 냄새가 코를 찌르곤 했다.


아빠는 멋진 자연풍경을 보러 가거나 집 근처에 새로운 이벤트가 생기면 그렇게 나를 데리고 가고 싶어 했다. (지하철 8호선의 개통, 분당 이마트 개점 때도 나를 데려갔다.)

내가 첫째 딸이고 동생들이 아직 초등학교도 들어가기 전이라 그나마 자식들 중에서는 나와 소통이 원활해 데리고 다니기 편했을 터였다. 하지만 우리 아빠는 자식과의 부드러운 대화가 어려운, 무뚝뚝하고 가부장적인 전형적인 옛날 사람이라, 함께 어디를 놀러 가도 아빠랑 재밌게 수다를 떠는 알콩달콩한 부녀지간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아빠는 늘 말없이 항상 나를 대동했다.

솔직히 아빠와 단 둘이 어딘가를 놀러 갈 때면 나는 마냥 기쁘지만은 않았다.(사실 좀 귀찮은 적도 많았다.) 아빠를 따라나서면 나는 아빠랑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보다, 말없이 그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일쑤였던지라 그 길에 뿌리내린 플라타너스 나무와 은행나무를 구경했고, 또 애꿎은 낙엽을 주워 바삭 소리가 날 정도로 으스러뜨리기도 했다. 그러다 아빠한테 잔소리도 듣고.


아빠의 생은 짧았지만,
플라타너스의 생은 길었다.

아빠의 죽음 이후, 그 가락동 플라타너스 길은 아빠가 아닌 남은 가족들, 그리고 학교 친구들과, 더 커서는 당시의 남자 친구와 데이트를 하며 가끔 걷는 길이 되었다.

경기도로 이사를 온 후 그곳을 찾을 일이 잘 없었던 나는 얼마 전 그 길을 다시 지나갈 일이 있었다. 그때의 가로수길을 자세히 보니 플라타너스 나무를 대신해 느티나무가 늘어서 있고, 그때와는 다르게 건물들이 빽빽하게 나있어 보도블록도 그때보다 상대적으로 많이 좁아진 느낌이지만. 그래도 길을 지나가는 내내 아빠가 생각났다.


생각해보면 그때의 우리 아빠 세대는 주 6일 근무가 너무 당연했고, 일주일의 하루를 쉴 수 있었으며, 즉 주말에 주어지는 단 하루의 휴식이 대단히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는 소중한 일요일만큼은 일터에서 벗어나 좋은 곳을 가고 싶어 했으며, 사람들과 늘 부대꼈을 터라 그날만큼은 조용하게 걷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마냥 어렸던 나는 그런 아빠의 속도 모르고, 무뚝뚝하고 재미없다고 단정 지어버린 건 아닌지.

철없던 어린 딸은 어느덧 서른여섯이 되었고, 사회생활 10년 차가 다 되어서야 그때 아빠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할 것 같다.


코로나가 길어져 지방으로 내려가기가 눈치도 보여 아빠를 찾아뵌 지가 어느새 2년이 다되어간다. 조만간 아빠를 찾아뵙고 코로나라 그동안 찾아오지 못해 미안하다고 얘기하고, 25년 전 그때 가락동 플라타너스 길이 얼마나 많이 바뀌었는지 알려드려야겠다.

매거진의 이전글 엄마의 행운목에 꽃이 피면 (下)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