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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태평 Aug 15. 2022

조금은 느려도 괜찮아

24. 유묘 이야기


우리 집에 사는 식물의 시간은
저마다 다른 속도로 흘러간다.


필로덴드론 미칸, 알로카시아 프라이덱은 꽤 빠른 속도로 곧 잘 새 잎을 내어준다. 하나의 이파리가 나오면 조금 영글었다 싶을 때쯤, 그 줄기에서 새로운 연두 잎이 빼꼼하고 고개를 내민다. 봄 여름 시즌이라면 달에 새이파리 두세 개 이상은 거뜬히 뽑아내는 에너지 넘치는 친구들이다.


두 달 사이 많이 자란 미칸



반면 몇 달이 지나도 새잎을 잘 보여주지 않는 느긋-한 아이들도 있다.

우리 집 거실 한켠에 자리 잡고 있는 겐차 야자는 집에 온 지 두어 달이 넘었지만 키만 조금 자랐을 뿐 아직까지 새 잎은 틔울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수경재배 중인 행운목도 마찬가지. 지금까지 꽤 오래 물을 줬건만 뿌리는 내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중 우리 집에서 느리기로 으뜸가는 식물로는 단연 어린 식물, '유묘'를 꼽을 수 있다.

알로카시아 프라이덱을 분갈이했을 때, 뿌리에 달린 자구를 털어 작은 화분에 심었더랬다. 그 후 몇 달간 어린 프라이덱의 변화를 지켜보고 있건만,

이 녀석. 순순히 큰 이파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자네는 언제까지 느긋할텐가…?


엄지손가락만큼 자그마한 초록색 이파리는 어른이 될 생각이 없는지 그 크기를 몇 달째 유지하며 버티고 있다.  이쯤 되면 나의 유묘는 조화가 아닐까 의심스러울 정도.


그의 성장을 지켜보는 K-식집사는 그 느긋한 모습에 애가 탄다. 놔두면 알아서 잘 크겠지 싶다가도, 천천히 성장하는 그들의 모습이 답답한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느려도 꾸준한 유묘처럼

생각해보면 나 또한 유묘처럼  조금 느린 편에 속하는 사람이다. 무엇을 배우는 속도도 남들보다 더디다. 나의 주변 사람들 또한 그런 내 모습을 지켜보며 답답함을 느끼진 않았을까? 마치 유묘를 애태우며 지켜보는 나처럼 말이다.


나는 나의 더딘 성장에 곧잘 지치곤 했다.

새해 결심으로 흔히들 도전하는 영어공부나 운동도 마찬가지였다. 초반엔 전의를 불태우며 열심히 임하다가도, 시간을 들인 만큼 실력이 향상되지 않는다 싶으면 쉽게 싫증을 내고, 포기하기 일쑤였다.

나는 내 자신이 남들보다 조금 느린 사람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지만, 스스로 그렇게 인정하기가 싫었다.

꾸준히 하지도 않았으면서 말이다.


반면에 유묘는 조금 느려도, 제 템포에 맞게 꾸준히 성장해나가며 서서히 키를 키우고 점점 큰 이파리를 만들어낸다. 연한 이파리를 달고 있는 아기 시절엔 아주 조금씩 성장하지만, 순화 시기를 거쳐 조금 성숙 해질 때쯤이면 어느 순간 성장에 가속도가 붙어 하루가 다르게 쑥쑥 자라난다고.

조금 느려도 꾸준하게 성장하는 것 또한 가치 있는 삶일진대… 나는 뭐가 그렇게 급했던 걸까.


나는 더 이상 유묘를 재촉하지 않기로 했다.

내 주변인이 나의 성장을 묵묵히 지켜봐 준 것처럼, 나도 유묘의 성장을 조용히 지켜보려 한다.

유묘처럼 조금 느려도, 그의 꾸준한 모습을 닮아간다면 어느 순간 쑥쑥 자라난 멋진 어른이 되어있지 않을까?



이 세상의 조금 느린 존재들이여, 화이팅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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