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3): 무아無我와 유아唯我, 자족과 자아초월

<삶과 철학> 12주차. 2025. 5. 22.

by 김태라

자아(ego)가 죽은 뒤, 영웅은 자기(Self) 안에서 확립되어 다시 일어난다.


그는 자아(ego)를 잃어버린다. 그러나 은총(grace)에 의해 자아를 되찾는다.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부 3장 3절 <외부로부터의 구조>



캠벨은 <귀환> 단계의 첫 부분을 세 가지 양상(챕터)으로 구분하고 있다. 영웅 스스로 귀환을 거부하는 경우, 귀환하려 하는데 외부에서 저지하는 경우, 그리고 외적인 힘에 의해 영웅이 불려 나가는 경우(외부로부터의 구조). 그런데 이는 세 가지 유형의 영웅 심리 또는 그가 처한 상황에 대한 것이라기보다는 ‘하나의 현상’을 구성하고 빚어내는 요소들로 이해할 수 있다.


영웅의 귀환은 <외부로부터의 구조>에서 시작된다. 여기서 그를 세상으로 불러내는 ‘외부의 ’은, 발사되기 전 화살에 작용하는 장(張力)의 현현이다. 화살은 달리기 선수처럼 ‘제 발로’ 뛰어나가지 않는다. 그것은 활로부터 발사되어 날아가진다. 이 전적인 수동성을 지난 시간에 ‘무위(無爲)’라는 용어로 정리했는데, <외부로부터의 구조> 이전에 나오는 귀환의 거부 및 장애 현상은 바로 이 ‘행위 없음(無爲)’의 표상이라 하겠다.


화살이 발사되기 전, 도(道)의 차오름을 대기하는 상태가 인간 내면에서 귀환 거부 심리로, 외부에서는 장애물의 등장으로 나타난 것이다. 영웅의 길(道)을 가는 자는 도(道) 아닌 것은 하지 않는다. 더 정확히는, 하지 않게 된다. 따라서, 하고 싶거나(욕망) 해야 하거나(의무) 할 수 있는(능력) 일을 하지 않는 것은 자기를 억압하거나 의지를 발휘하거나 마음을 통제하여 특정 결과를 인위적으로 만드는 과정이 아니다. 인위는 무위가 아니다. 무위는 그렇게 되는 ‘존재 자체’이다.


존재 자체로 존재함. 이것이 무위의 본질이다. 존재(being)는 신(Being)이다. 이는 외적 관계와 그 관계 속에서 형성되는 에고(타자의식)가 사라진 완전 자족의 존재성이다. 이렇게 “본래 모습으로 돌아가는 홀로 있음의 상태”(쇼펜하우어)에서 ‘나’는 전체가 되고 전체인 나는 에고가 아닌 우주, 만유, 신이다. 이것이 ‘I am God’의 현존이자 자아초월, 즉 무아적 의식이다. 이러한 존재 상태에서 자기의 본질과 있는 그대로의 실상이 관조된다. 고로 무위는 무아(無我) 의식과 상통하며, 이 무(無)의 절대자족에서 나온 자아초월자가 니체가 말하는 ‘초인(Übermensch)’, 위로부터 태어난 자, 모노게네스(Monogenēs), 독생의 유아(唯我)이다.


그렇다면 자족의 무위(화살의 정지) 상태에서 나타나는 비행(飛行)에 대한 ‘욕망’이나 ‘의무감’은 무엇인가? 날아가고 싶다, 날아가야 한다는 식으로 나타나는 생각은 무위의 존재를 지배하는 욕망이나 의무가 아니라,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미리보기’라 할 수 있다. 즉, 현재에 드리워진 미래 현실의 ‘그림자’ 같은 것이다. 그 자취가 욕망이나 의무의 문장으로 파악되는 것이지, 그 ‘욕망/의무’를 극복하여 무위가 작용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예수는 돌을 빵으로 바꿀 수 있었고, 절벽에서 날아오를 수 있었고, 세상의 지배자가 될 수 있었으나 그것을 하지 않았다. 이 ‘하지 않음’은 본질적으로 자기 통제나 금욕의 산물이 아니라 그 전체 과정이 무위적으로 그렇게 ‘된’ 것이다. 그런데 빵, 기적, 권세에 대한 생각이 ‘유혹’의 형태로 예수의 의식에 나타난 것은 그가 장차 행하게 되는 일에 대한 일종의 ‘섬네일’이라 할 수 있다. ‘화살이 발사된’ 뒤 예수는 도(신성)의 통로가 되어 그 힘을 세상에 펼치는데, ‘돌-빵’은 오병이어, ‘절벽’은 기적 행사, ‘권세’는 그리스도의 영향력에 대한 섬네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무(無) 속에 압축돼 있던 견본이 실물로 펼쳐지는 과정이 화살의 비행이고, 그 발사된 화살이 “자기(Self) 안에서 확립된 자아”, 즉 유아(唯我)이다. 신성과 일체된 영웅은 상위 차원의 에너지를 받아 그 힘에 의해 저절로 움직인다. 힘들이지 않고도 만사가 완벽하게 펼쳐지고 조율된다. 큰 힘의 통로로서 그 <자신>의 욕망이 <전체>를 위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이 유아를 낳는 자, 화살을 발사시키는 자,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는’ 자는 누구인가?


캠벨이 ‘그레이스(grace)’로 표현한 <또 다른 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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