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환(4): 비움의 채움, 코나투스와 케노시스의 화신

<삶과 철학> 13주차. 2025. 5. 29.

by 김태라

귀환하는 영웅이 당면하는 문제는, 지고의 영적 충만을 경험한 뒤에 삶의 기쁨과 슬픔, 일상의 시시함과 소란함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왜 그런 세상으로 돌아와야 할까? ... 세상은 악마에게 넘겨버리고, 자신은 천상의 동굴에서 문을 닫고 은거하는 편이 쉽다. ... 그러나 시간 속에서 영원을 지각하고 표상하는 작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다.


귀환하는 영웅은 모험을 완성하기 위해 세상의 충격을 견뎌내야 한다.

The returning hero, to complete his adventure, must survive the impact of the world.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부 3장 4절 <귀환 관문의 통과>


<귀환 관문의 통과> 챕터에서는 ‘귀환하는 영웅’의 세 가지 사례가 나온다. 동굴 밖의 빛을 경험한 뒤에 다시 동굴의 어둠 속으로 하강할 때 일어나는 난관에 대한 이야기다. 캠벨은 립 반 윙클, 오이신, 카마르 알 자만이라는 세 인물의 사례를 들고 있다.


지복의 세계를 체험하고 왔지만 그 경험에 대한 자각이 없어 에너지가 증발해 버렸거나(립 반 윙클), 무의식의 에너지를 인격에 통합했으면서도 무(無)에 동화되어 세상의 “형식과 형상의 충격에 좌절”하게 되는(오이신) 경우가 있다. 이 두 가지 사례와 다르게, 자신의 상승된 의식을 세상의 낮은 주파수로부터 보호하는 ‘절연체(絶緣體)’를 지니고 하강한 경우에만 자기 확신과 함께 귀환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카마르 알 자만).


카마르 알 자만이 지닌 ‘절연체’에 대해 캠벨은 “자기 영혼의 다른 부분과 만났음을 상기시키는 반지”라고 적고 있다. 여기서 ‘반지’는 무엇을 상징하는가? 단순히 물질적인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러나 반지의 형태적 측면을 힌트 삼아 그 의미를 추측해 볼 수 있다.


영웅의 여정을 이미지화하면 반지와 같은 원형이 된다. 이 여정은 인간의 의식 진화 과정, 즉 참된 자기를 실현하는 길이라 했다. 그런데 의식(Self) 깨어남과 함께 프로그래밍된 타자성이 쓸려나가면서 과거의 자아(ego)와 기존 세계가 붕괴된다. 이것이 점진적으로 일어나든, 폭발적으로 일어나든 타자의식으로 구성된 나는 무(無)가 된다. 참된 나는 거짓된 것, 나(실재) 아닌 것을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 거짓, 비실재가 바로 ‘타자성(마)’이다. 그래서 완전히 깨어난 의식에는 타자성이 없다. 부처가 마(魔)를 깨부쉈다는 것은 이런 뜻이다. 그런데 인간은 오랜 시간, 과거 전 생애 동안, 의식에 프로그래밍된 ‘타자’를 ‘자기’로 알고 살아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영혼 없음’ 상태이다. 언제부턴가 ‘영혼이 없다’는 말이 유행처럼 나돌기 시작했다. 어떤 사람의 진심이 느껴지지 않을 때 쓰는 말이다. 실제로 그의 내면은 ‘영혼이 없는’ 것과 같은 상태일 수 있다. 자기로 존재하지 않으면 영혼이 없는 상태와 별반 다르지 않다. 그리고 영혼 없는 상태는 비존재와 같다. 이는 타자의식으로 구축된 에고에 함몰된 상태일 수도 있고, 에고 의식에서는 벗어났으나 새로운 자아가 온전히 구축되지 않은 경우일 수도 있다.


영웅의 귀환에서 나타나는 난관은 물론 후자의 경우에 속한다. 그는 빛의 세계를 깨닫고 낡은 에고 상태에서 벗어났으나 아직 새로운 자아가 확립되지 않았다. 캠벨은 이를 “셀프 안에서 정립된” 자아라고 말한다. 큰 나의 바다 에너지와 통합되어 자아의 경계가 흐려진 상태이다. 이는 태아가 양수에 잠겨 있는 상태와 같다. 자궁 속 태아는 개체로서 태어난 상태가 아니다. 그것은 비존재다. 영적으로 존재가 무화된, ‘나(영혼) 없음’ 상태이다. 영혼은 셀프와 에고를 통합하여 고유한 자기, 즉 유아(唯我)를 만든다. 그런데 영혼, 즉 ‘나’가 비어 있으면 그 자리에 ‘새로운 타자’가 들어선다. ‘마(魔)’에 들리는(obsessed) 것이다. 빛을 본 의식이 그 빛의 크기만큼 거대한 어둠에 삼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깨어남 이후 자아가 반드시 재건되어야 한다. 그래야만 자기를 상실하지 않고 지상으로 내려올 수 있다. 하강(귀환)이 ‘추락’ 아닌 ‘구현’으로 완성되는 데 필요한 것이 바로 <조력자>이다. 캠벨은 이를 ‘은총(grace)’이라 표현했다. 나를 뛰어넘는 큰 힘의 작용이다. 화살이 발사되어 과녁에 명중하려면 기구의 성능 외에 기후도 좋아야 한다. 태풍이 불거나 우박이 떨어져서는 곤란하다. 그런데 그가 진짜 영웅이라면 그를 돕는 존재가 나타난다. 앞서 살핀 내용처럼 “대자연은 위대한 임무를 지원”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가 진짜 영웅이라면, 조력자를 알아보고 그 존재의 힘(조언)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그 말에 각성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한다. 그가 해야 하는 일이란 무엇인가? 이를 에너지적으로 표현한다면 ‘비움을 통한 채움’이다. 귀환 관문의 통과, 즉 새로운 자기를 구축하려면 이 작업이 필요하다. ‘비움을 통한 채움’이란 무엇인가? 본인이 개념화한 이 말을 설명하기 위해 기존의 개념을 도입할 수 있다.


‘코나투스(conatus)’와 ‘케노시스(kenosis)’라는 단어가 있다. 코나투스는 ‘존재를 유지하려는 힘’을 뜻하는 철학 용어이고, 케노시스는 ‘신의 자기 비움(하강)’을 뜻하는 신학 용어이다. 그런데 이 둘은 상승과 하강처럼 의미상 반대되는 것으로 보인다. 자기 존재를 유지하는 것과 자기를 비우는 것은 양립 불가능해 보인다. 그러나 ‘위에서 아래로’ 태어나는 일(降誕), 위(天)와 아래(地)를 통합하는 일에는 저 양립 불가능한 것의 양립이 요구된다. 이를 자기의식을 통해 해내는 자가 영웅이다.


신은 자기를 비워 인간으로 육화했는데(kenosis), 영웅은 빛의 세계로 올라가 신격화(apotheosis)된 존재이기에 신과 같이 자기의 신성을 비워야 한다. 추상이 아닌 구체적 형태 속에 자기를 투입해 몸을 입어야 한다. 나에게 있어 이 ‘케노시스’는 창작 활동을 통해 일어난다. 그래서 철학(추상)에서 문학(형상)으로 ‘하강’했는데 이 또한 ‘내가’ 한 일은 아니다. 무심코 쓴 작품이 신춘문예에 당선되는 ‘그레이스’의 작용이 있었다. 추상성이 구체화되는 작업을 통해 영웅 안의 신은 자신의 한성을 잃고 한성에 갇힌다. 무가 유로 변하는 것이다.


이것이 신의 입장에서는 ‘죽음’에 해당한다. 그러나 그 죽음을 통해 새 생명이 태어난다. 신성 비움의 행위를 통해 비존재(무)는 존재(유)가 된다. 물질계에 자기를 정립하게 된다. 비운(버린) 만큼 채워지는 것이다. 내가 실천 중인 ‘하루에 하나씩 버리기’ 행위도 같은 맥락에서 이루어지는데, 실제로 창작의 ‘케노시스’를 통해 작품이 생겨나면서 존재가 유지되고 확장된다. 이를 ‘코나투스’의 발현으로 볼 수 있다. 이러한 케노시스-코나투스의 창조 활동은 원을 그리며 끝없이 반복된다. 이렇게 ‘비움의 채움’을 통해 상반되는 코나투스와 케노시스의 힘이 융합되면서 자기(Self)에 기반한 자아(ego), ego-Self 의식을 체현한 개체화된 신성(화신)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다.


불멸의 지혜를 깨친 자는 항상 그 불멸의 경지 안에 거한다.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부 3장 5절 <두 세계의 마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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