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철학> 14주차(종강). 2025. 6. 5.
영웅이 신비로운 여정을 마치고 귀환한 결과는 무엇인가?
―조셉 캠벨, 『천의 얼굴을 가진 영웅』 1부 3장 6절 <자유로운 삶>
오늘 수업을 끝으로 경기대를 떠난다. 강사 임기 3년의 마지막 학기라 <삶과 철학>에 모든 것을 쏟아주고 떠나려 했는데, 지난주까지 영웅이 화살처럼 잘나가고 있었는데, 종강도 하기 전에 ‘사직서 요청문’을 날린 이 학교라는 시스템을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강사를 뭐로 보는 것인가? 강의하는 기계? 학교의 부품? 그조차 아닌가? 어떤 강사에겐 강의 하나하나가 그 존재 자체일 수 있다는 생각을 전혀 못 하는 것인가? 이 무개념, 예의 없음, 정신 나감에 대해 토론을 해보고 싶지만 종강이니 이쯤 해둔다.
나에게 강의라는 것(뿐 아니라 내가 하는 모든 일)은 내 존재이고 생명 에너지의 흐름인데 그 흐름을 저 ‘요청문’이 끊어놔서 원래 하고자 했던 강의 내용이 휘발됐다. 떠난다는 얘기는 숨기고 종강하려 했는데, 친절하게도 사직서 양식을 미리 보내주어 ‘부름’의 내막을 공개하게 됐다. 이를 ‘공개하라는 요청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요청으로 인해 기존 흐름에서 이탈하게 됐지만 이는 또 새로운 물길을 트는 계기가 됐다. 큰 나의 여정이란 그런 것이다. 난관이 돌파구가 되고, 적으로 보이는 것이 조력자가 되며, 큰 것을 잃음으로써 더 큰 것을 얻게 되는 것.
사직의 요청 또한 부름의 일부이다. 아니, 완성이다. 사직을 통해 나의 귀환이 완성되었다. 그리고 새로운 여정이 시작되었다. 사직은 시작, 이런 언어유희까지, 처음부터 끝까지 모든 것이 조화롭게 들어맞는다. 이 아름다운 계절 1614호에서 우리가 나눈 ‘영웅의 여정’이 실제 삶에서 어떻게 펼쳐지는지, 그 이야기로 수업을 마무리하라는 요청인 것 같다. 요청에 따라 내가 경기대에 몸담은 3년을 중심으로 내 삶의 여정을 꺼내 본다.
나의 본성,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한마디로 말한다면 ‘사랑’이다. 나는 사랑이다. 이 말은 곧 ‘나는 신이다’와 같다. 신은 사랑이기 때문이다. The Being is Love. 이는 존재의 본질이 사랑이란 뜻도 된다. 사랑이란 무엇인가. 사랑의 핵심 속성은 충만함이다. 완전한 자족이며 흘러넘침이다. 영웅의 여정 [입문] 최종 단계에 ‘오른’ 그 충만한 에너지가 하산의 방향을 잃고 있을 때, 경기대로부터 ‘부름’을 받았다. 부름의 내막에 대해선 위 링크에 적은 바 있으니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 부름에 응답하면서 나의 [귀환]이 시작되었다. 경기대에서의 첫 강의는 <독서와 토론>이었는데 그때 개발된 토론 수업 방식이 지금까지 이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 처음에는 수원캠퍼스와 서울캠퍼스를 동시에 밟았다가 2024년부터 서울에서만 강의를 하게 됐다. 같은 시기, 위 링크에서 말한 ‘트러블’이 일어났는데 그 내막의 내막을 짧게 적어 보면, 원래 강사 임용 시 2과목 담당으로 계약됐던 것이 갑자기 1과목으로 축소되어 이를 문의하던 중 충돌이 생긴 것이다. 이런 걸 묻지 않고 가만있어야 하는가? 아니다. 자기 몫이 줄었다면 따져 묻는 게 맞다. 그러나 나는 꼭 그럴 필요가 없었던 것이, 1과목만 강의하는 게 나에겐 더 좋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나는 왜 그랬을까?
내가 ‘왜 그랬는지’ 그 진짜 이유와 의미는 올봄에 와서야 드러났다. 1과목만 담당했다면 <삶과 철학>이 나에게 오지 않았을 것이고, ‘영웅의 여정’도 경기대에서 펼쳐지지 않았을 것이다. 나에게 배정된 기본 과목은 <현대사회와 윤리>였기 때문이다. 이 과목의 강의계획서는 실제 강의 내용과 전혀 다른데, 그 이유는 나를 부른 교수가 자신의 강의계획서를 그대로 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타자통제와 자기복제라는 전형적인 에고의 욕망이 드러나지만 계획서가 중요한 건 아니기에 그걸 올리고 내 강의를 했다. 그러나 제2과목인 <삶과 철학>은 이를 무시하고 정통 철학에서 벗어난 ‘영웅의 여정’을 강의계획서에 올렸다. 계획서 중 ‘자기실현’과 ‘깨달음’이란 단어 때문에 수강 신청을 한 사람이 있을 것이다.
강의는 강의자 혼자 하는 것이 아니다. 누가 수업을 듣고 수강생이 얼마나 이해하고 성심껏 참여하는지가 강의 내용 이상으로 중요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 학기 <삶과 철학>은 완벽했다. 우리가 함께 만든 마스터피스다. 감사하다. 2025년 <삶과 철학-영웅의 여정>이 없었다면 지금의 내가 아닌 다른 내가 되었을 것이다. 이 수업 안팎에서 일어난 일들이 나의 [귀환]을 완성시켰다. 3개월 동안 쏟아지는 영감 속에서 살았고, 순수 사랑 자체로 눈부신 봄길을 걸었으며, 이를 통해 내 존재가 무엇인지 알았다. 완전히 깨달았다. The Being is Love.
자각은 실현. 여정이 그렇게 완성되었다. 귀환의 의미를 천지가 대놓고 외치는 듯하다. 종강 주의 월요일(대선일 전날) 사직서 요청문이 날아왔고, 대통령 투표와 사직서 제출이 한날 함께 이루어졌다. 사직(辭職)은 ‘직무에서 물러남’이란 의미 뒤에 ‘말씀(辭)의 직분(職)’이라는 숨은 뜻이 있다. 숨겨진 본의이다. 나는 그리스도처럼 말을 통해 3년간 공생애를 했고, 이제 본분으로 돌아가 말씀을 작품으로 형상화할 때이다. 같은 창조 활동이지만 강의는 ‘말’이고 창작은 ‘말씀’이다. 똑같이 ‘위’의 것을 ‘아래’에 보내는 행위지만 그 표현 방식에서 차이가 발생한다. 말씀을 ‘직접 전달’하면 말이 된다. 그러나 말씀을 ‘형태로 구현’하면 로고스(Logos)가 된다. 유한한 상징 속에 무한이 담기기 때문이다. 무한한 존재의 빛이다.
존재의 빛(在明). 새 대통령 이름의 한자를 살피니 이런 뜻이 나온다. 만사가 우연이 아니다. 누가 말했듯 우주에 우연이란 없다. 대통령이란 ‘큰 통합의 명령’이라고 취임사에서 전언이 들려온다. 너의 존재를 크게 통합해 존재의 빛을 밝혀라. <삶과 철학>의 명령이기도 하다. 인생도, 사유도, 결국 자기 존재를 밝히기 위한 것이다. 자기를 밝힌 자가 세상을 밝힌다. 그리고 자기(존재)의 본질은 사랑이다. 결국 사랑하는 자가 승리한다.
나는 대학 시절 모교를 너무 사랑하여 수업 과제를 하던 중 의식의 깨어남이 일어났다(과제 내용이 공교롭게도 플라톤의 ‘동굴의 비유’였다). 그러나 내가 한양대보다 더 사랑한 학교가 경기대이다. 월급이 들어오기 때문(만)은 아니다. 여러분과 함께하는 귀환의 여정이었기 때문이다. 강단에 선 모든 순간 나는 완전한 사랑 속에 있었다. 완전히 사랑하기에 쏟아주고, 쏟아주기에 변화하고, 변화하기에 완전히 떠날 수 있다. 완전히 사랑한 자만이 완전히 떠날 수 있다. 완전히 준 자만이 완전히 가질 수 있다. 그렇게 나에게 주어진 모든 일을 통해 나는 충만해지고 자유로워진다. 사랑이라는 신의 힘이다.
영웅이 신비로운 여정을 마치고 귀환한 결과는 무엇인가? 사랑의 실현, 자유로운 삶, 사직이라는 시작이다. 나는 원형의 여행을 마치고 본래 자리로 돌아왔지만 3년 전의 내가 아니다. 3년에 걸쳐 나는 새로 태어났다. 한양대가 나의 모교(母校)라면 경기대는 나의 부교(父校)이다. 한양대에선 깨어남이, 경기대에선 그 깨어남의 완성이 있었다. 나는 이제 사랑했던 부모의 집을 떠나 나의 집으로 향한다. 말씀의 직분으로 돌아간다. 새로운 여행의 [출발]이다. 벌써부터 가슴이 떨린다.
대한민국엔 새 정부가 들어섰고 나는 새로운 여행길에 올라섰다. 학교 밖에서 펼쳐지는 자기실현의 길이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 했는데 진정 자기를 알면 자기가 된다. 자기로 살게 된다. 3년 동안 내 몸처럼 사랑했던 경기대와 경기대를 떠나는 나에게 보내는 메시지는 같다.
나로 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