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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중 기식법 01화

철학과 문학을 통한 수행과 기식(氣食)

by 김태라

위대한 인간은 도를 들으면 그것을 행한다.

평범한 인간은 도를 들으면 긴가민가한다.

어리석은 인간은 도를 들으면 크게 웃는다.

만약 그가 웃지 않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노자, 『도덕경』


본인은 등단 13년차 작가이며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있다. 철학과 문학은 사유와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둘의 차이는 ‘형상화’ 정도에서 나온다. 일반적으로 철학의 언어는 추상, 문학의 언어는 구상의 영역에 속한다고 본다. 철학적 사유를 형상화한 것이 나의 문학이라 할 수 있는데, 문학 또한 ‘언어’라는 사실을 두고 보면 여전히 ‘추상’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철학과 문학의 경계가 모호해지며 실제로 두 영역에 걸쳐 있는 글들도 많다. 카뮈의 이방인이나 니체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등이 그렇고,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과 버트런드 러셀은 철학서로 노벨문학상을 받은 바 있다. SF 작가 로버트 하인라인은 자신의 소설을 “사변물(Speculative Fiction)”이라 했으며, 한국 작가 박상륭의 작품들은 소설의 옷을 입은 철학이라 해도 틀리지 않는다.


나는 기식(氣食)에 대한 글에서 왜 철학과 문학을 얘기하는가? 지금까지 내가 사유와 언어를 통해 해온 일이 하나의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하고자 함이다. 나는 글 쓰는 일을 ‘천직’이라 일컬어 왔는데,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이유는 글 쓰는 과정에서 존재가 깨어나 변용(變容, transfiguration)되기 때문이다. 여기서 변용이란 말은 ‘변화’보다는 ‘생성/구현’에 가깝다. 이 생성적 구현은 거듭남이며 언어(Logos)를 통한 강탄(降誕, 위로부터의 탄생)이기에 결국 ‘로고스의 화현’이 된다.


이렇게 존재의 본래성(신성)이 언어를 통해 육화되는 과정에서 정기신(精氣神)의 생명력이 강화된다. 고로 나에게 있어 철학과 문학의 궁극 목적은 생명 에너지 상승에 있고, 에너지는 곧 의식이기에 철학함과 문학함은 의식 상승 및 그 육화를 위한 수행이 된다. 수행의 본질 역시 생명력 상승에 있다. 정기신의 에너지를 파괴하는 죽음의 루트를 생명의 길(道)로 전환하는 것이 수행이다. 노자 인용구처럼 생명의 도를 아는 자는 그것을 행한다.


이것이 지난 이십 년간 내가 철학-문학-수행을 통해 행한 것의 본체이며, 그 결과 중 하나로 나타난 것이 기식(氣食)이다. 나는 강의 중 “창작의 본질은 유희”라 말하면서 인생을 “찰흙 놀이”에 비유한 바 있는데, 그렇다면 나의 직업과 놀이와 수행이 삼위일체로 이룩한 변용체가 바로 기식의 존재인 것이다. 물론 이 또한 하나의 단계이며 작은 찰흙 모형일 뿐이지만, 철학과 문학을 통해 내가 궁극적으로 ‘형상화’한 것은 바로 나 자신임을 몸으로 실증했다는 데 의의를 둘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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