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철학> 11주차. 2025. 11. 14.
쇼펜하우어는 사상적으로 대단히 자족적인 행복관을 보여준다. 그는 『소품과 부록Parerga und Paralipomena』에서 “내면의 부가 충분한 자만이 행복하다” 했고 “혼자 있을 때 인간은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다” 했다. 또한 이 책에는 “위대한 정신일수록 비사교적일 수밖에 없다”는 말도 적혀 있는데, 이런 문장들은 모두 외부 의존성에 대한 경계와 내적 자족을 지향하는 그의 정신성을 보여준다.
그런데 나는 그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그토록 고독을 예찬하고 자족 사상을 일관되게 설파했던 철학자가 ‘개’를 키웠다는 사실이다. 고독을 사랑하는 인간이 개를 기르는가? 정신이 진정 자족적이라면 개는 필요 없다. 그는 “사교를 절제하면 정신이 건강해진다” 했지만 인간과의 사교를 절제했을 뿐, 개와 사교하고 개에게 의존한 것이다. 인간과의 교제는 괴롭기 때문에 자신의 정신적 벽을 건드리지 않는 개를 데리고 산 것이다.
이는 사상과 삶의 불일치이며 이러한 모순은 그의 철학 자체에서도 드러난다. 그는 삶을 비관적으로 바라본 염세주의자로 알려져 있는데, 이는 그의 사상의 토대인 ‘의지 부정’에서 비롯한다. 그리고 의지 부정은 곧 생의 부정이다. “삶은 맹목적인 의지이고 인생은 고통일 뿐”이라고 그는 말했다. 생은 곧 의지이기에 의지를 완전히 부정해야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다. 쇼펜하우어는 이를 ‘윤리적 해탈’이라 했는데 불교적 세계관과도 연관되는 이 입장은 그러나 부처의 정신과는 근본적 차이가 있다. 부처는 의지를 없애려 하지 않았다. 의지에 매인 집착을 벗겼을 뿐이다.
진정으로 자족적인 인간은 생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럴 수가 없다. 진정한 자족성은 근원적 생명 에너지 흐름에서 비롯하기 때문이다. 생을 부정하는 자는 자족적일 수도, 자유로울 수도, 깨달은 자일 수도 없다. 이러한 사유의 흐름 속에서, 내가 실제로 조우했던 한 인간이 떠올랐다. 스스로 무아(無我)라 하며 깨달았다고 착각했던 매우 의존적인 정신. 그는 자아 없음, 의미 없음, 차이 없음을 일관되게 주장하며 경계와 변화를 부정했고, 관계 속에서 스스로 감정을 느끼지 못했다.
모든 것을 무화시키는 이러한 ‘삭제 기반 정신’이 언뜻 초탈한 것처럼 보였지만, 그는 실제로 타인에게 매우 의존적인 인간이었다. 의존성은 무아나 깨달음과는 거리가 멀다. 그는 과거의 연애 상대를 ‘고양이’처럼 여겨, 그 사람이 자신에게 함부로 행동해도 아무렇지 않았다고 했다. 애완동물이 집을 더럽혀도 인간이 동물에게 화내지 않는 것처럼 연애 상대에게도 그랬다는 것이다. 감정 교류를 위해 관계했다고 했지만 실질적으로는 교류가 일어나지 않은 것이고 관계는 에너지적 의존이었던 것이다.
저 무아인의 ‘고양이’는 쇼펜하우어의 ‘개’에 대응한다. 그들은 자신의 사상적 벽, 존재의 벽을 침투하지 못하는 ‘동물’에게만 편안함을 느끼고 그런 ‘안전한’ 생명체에 달라붙어 의존한다. 이는 타자의 생명 에너지를 빨아먹는 뱀파이어 성향이기도 하며, 저 ‘개’와 ‘고양이’의 주인이자 뱀파이어인 인간의 정신에는 공통적으로 ‘생에 대한 부정(죽음 매몰 의식)’이 자리한다.
무아인이 주장한 무아는 에고 초월이 아니라 죽음 의식에서 비롯된 자기 부정이다. 그것은 위협적 환경에서 생존하기 위해 형성된 ‘축소된 자아(ego)’인 동시에 무(無)를 아이덴티티로 삼는 ‘강고한 에고성’이다. 이러한 자기 부정은 존재의 감각을 최소화해 고통을 피하려 하는 심리적 방어기제이자 회피적 생존 전략이다. 그는 자기를 느끼는 순간 고통과 죽음의 공포가 솟아났기에 자기감 자체를 끄는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그것은 셀프의 깨달음이 아니라 에고의 초경직화이다. 이는 매우 극단적인 사례이긴 하나 이와 비슷한 면이 쇼펜하우어에게서도 나타난다.
생에의 의지를 부정하는 것은 존재의 진동을 정지시키는 방어적 생존 전략이다. 쇼펜하우어 역시 생을 향한 열림이 아니라 생에 대한 퇴각 속에서 자신의 사상 체계를 구축했다. 의지를 부정하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그의 사유는 언뜻 초연하고 강해 보이지만, 실상은 삶의 압력과 진동을 견디지 못해 내부로 움츠러드는 방어와 퇴행에 가깝다.
쇼펜하우어는 세계를 근원적 악이라 규정하고 의지를 끊어내는 방식으로 평정을 얻고자 했다. 이것은 초월이 아니라 축소이고 통합이 아니라 차단이다. 내부의 자족적 진동을 확장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진동을 일으키는 생의 현장을 거부함으로써 고요(고립)를 확보하는 것이다. 앞서 말한 ‘축소된 에고’인 동시에 ‘강고한 자아’로서의 무아성과 그 구조가 일치한다.
그래서 그의 고독은 생의 중심에서 솟는 고요가 아니라 폐쇄적인 독방에서 얻은 고립에 가깝다. 자아의 벽을 침투하는 타자를 견딜 수 없기에 인간관계를 피했고 자신을 ‘흔들지’ 못하는 개하고만 함께 있었다. 자신보다 약한 생명에게 의존함으로써 생의 압력으로부터 도망친 것이다. 이것은 홀로 설 수 있는 자의 자존이 아니라 타자(세계)를 감당할 수 없는 자의 도피다. 무아인이 자신을 깨우는 자가 아닌 ‘고양이’들을 찾아다니며 ‘부정의 세계’를 고수하려 했듯, 쇼펜하우어도 자아(세계관)가 깨질까 두려워 가장 안전한 존재에게 숨어든 것이다.
둘에게는 공통적으로, 말하는 세계와 사는 세계 사이에 괴리가 있다. 쇼펜하우어는 자족을 말하며 개에게 의존했고 무아인은 무아를 말하며 타자를 찾아다녔다. 이 표리부동성은 그들의 사상 또는 생각이 존재에 체화되지 못했다는 증거인 동시에, 그 사상 자체가 생(life)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적나라한 징후이다. 그래서 둘은 매우 유사한 정신 구조를 보인다. 생의 에너지를 견디지 못해 스스로를 차단하고, 진정으로 생명력이 강한 자를 피하며, ‘개’ 또는 ‘고양이’에게 의존하면서 삶을 부정하는 정신.
이러한 죽음 매몰 의식은 어떻게 생명으로 나아갈 수 있는가. 나는 저 무아인을 ‘흔들어’ 보려 했으나 그는 변화를 거부하면서 모든 생명의 약동을 자기 부정으로 오해했다. 그 자신이 자기 부정(죽음)에 함몰돼 있기에, 자기 충족과 생명력에서 비롯된 성장과 변용 또한 (현재의 자기를 받아들이지 못해) 자기를 바꾸려 하는 부정성(결핍성)으로 본 것이다. 이러한 그의 자기 부정성은 다섯 가지 층위에서 매우 일관되고 체계적으로 나타났다.
1) 자아를 부정해 “나는 없다”는 영성의 옷으로 존재를 소거하고 2) 의미를 부정해 “모든 것, 모든 행동에 아무 의미가 없다” 말하고 3) 차이를 부정해 “세상 어떤 것에도 차이가 없다” 주장하며 4) 변화를 부정해 “아무것도 바뀔 필요가 없다”며 변화에 대한 공포를 감춘다. 이에 따라 5) 감정을 느끼고 싶어도(사람들과 교류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는 감정(교류) 불능 상태에 빠진다. 그리고 더 큰 문제는, 영성책을 읽고서 ‘무경계’나 ‘무아’ 개념을 끌어와 자신의 상태를 깨달음이라 여긴다. 이 5중의 폐쇄성과 무아의 성벽은 존재를 정지시키는 심리적 멈춤, 즉 죽음에 함몰된 의식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쇼펜하우어와 무아인은 모두 생 자체를 멈추는 방향으로 끌려갔다. 쇼펜하우어는 의지를 정지시켜 의식의 진동을 끊었고, 무아인은 존재를 정지시켜 심리를 봉쇄했다. 둘은 살아남기 위해 스스로 방어벽을 만들었으나 그 벽에 갇혀 움직이지 못했다. 결국 고통을 피하려 만든 그 벽이 삶 전체를 고정시키는 감옥이 되었다. 이는 생을 부정한 의식에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멈춤의 구조이다.
그러나 존재는 정지된 채로 남아 있을 수 없다. 생명은 멈춤 없는 흐름이다. 죽음의 중력에 고착된 정신도 일정한 임계점을 지나면 그 구조를 더 이상 유지할 수 없다. 그때 생명은 미세한 틈을 열어 솟아나기 시작한다. 그 틈을 ‘철학적 합리화’나 ‘무아적 에고’로 다시 틀어막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그러면 어떻게 이 생명의 ‘틈’을 ‘문’으로 열어젖힐 수 있을까. 다음 주에는, 쇼펜하우어가 부정으로 닫았던 생의 문을 니체가 ‘힘’으로 여는 과정을 보게 될 것이다.
<오늘의 논제>
최다은: 삶이 고통이라면 모든 인간은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죽음으로 가야 하는 것일까? 만일 그렇다고 하더라도 그런 이야기를 남에게 전달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