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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넘어서

<행복의 철학> 10주차. 2025. 11. 7.

by 김태라

“배부른 돼지보다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낫다.” 공리주의자 밀이 남긴 말이다. 이는 인간의 행복을 쾌락의 양이 아닌 질의 문제로 본 것이다(라고 전형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철학과 재학 시절부터 나는 저 말이 참 이상하게 들렸다.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였기 때문이다. 무슨 소리인가?


선생들은 설명하지 못했지만 나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저 돼지와 소크라테스의 동일성이 어디서 비롯되는지 말이다. 이에 따라 본인은 본인의 사상에 입각하여, 공리주의 및 양적/질적 쾌락에 대한 전형적 관점을 넘어선 래디컬한 사유를 전개하고자 한다. 밀의 공리주의는 쾌락의 질적 차이를 구분했지만, 이 글의 목적은 그 구분의 바탕이 되는 ‘쾌락 중심 사고틀’ 자체를 직시/해체하는 데 있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행복을 경험의 합산, 즉 행위의 결과로 산출되는 쾌락의 총량으로 이해한다. 공리주의 주창자 벤담이 말한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은 쾌락과 고통의 양적 계산을 통해 옳고 그름을 판단하려는 시도였다. 그런데 이 원리는 행복을 존재의 깊이나 인식의 질이 아닌 감각적 결과의 총합으로 환원한다. 이에 따라 인간은 쾌락의 측정 단위로 전락하고, 행복은 경험의 강도에 따라 변하는 일시적 상태가 된다.


밀은 이러한 ‘양적 공리주의’를 비판하며, 질 높은 쾌락은 어떤 양적 쾌락으로도 대체될 수 없다는 ‘질적 공리주의’를 제시했다. 그러나 그에게서도 행복은 여전히 쾌락의 성질과 우열을 저울질하는 문제로 남아 있다. 그는 정신적 차원과 의식의 수준을 논했으나 존재론적 통찰로 나아가지는 못했다. 결국 대표적인 쾌락주의 행복관인 공리주의는 쾌락의 메커니즘을 넘어서지 못하고, 행복을 결핍의 보충으로 파악하는 근본적인 한계를 지닌다.


쾌락은 결핍을 잠시 가리는 감정일 뿐, 충족 그 자체가 아니다. 인간은 더 많은 경험과 자극을 쌓아야 충족되고 행복해진다고 믿지만, 이러한 믿음은 행복의 원인을 외부에 두는 의존적 의식 상태에 머물게 한다. 스피노자가 말하는 통찰적 이성이 사라진 자리에 남는 것은 쾌락의 계산에 매인 무지의 장막뿐이다.


공리주의의 내적 긴장은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로 나타난다. 벤담은 쾌락의 양을, 밀은 쾌락의 질을 중시했지만 둘 모두 행복을 쾌락의 성질과 강도로 평가한다는 점에서 동일한 한계에 갇혀 있다. 감각적 쾌락을 추구하면 만족은 잦지만 의식은 흐려지고, 지적 쾌락을 좇으면 생각은 깊어지지만 결핍의식 또한 깊어진다.


이 결핍의 회로 속에서 인간은 ‘쾌락의 노예(돼지)’ 아니면 ‘결핍의 철학자(소크라테스)’가 된다. 전자는 욕망의 굴레 속에서 무지에 머물고, 후자는 결핍을 인식하면서도 초월하지 못한다. 결국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는 서로 다른 얼굴을 하고 있지만, 결핍과 결핍 가리기(쾌락)라는 동일한 폐쇄 회로에 갇혀 있는 것이다.


그들은 쾌락을 중심으로 사고하기에 행복은 언제나 결핍의 패러다임 속에서만 성립한다. 행복을 결핍 충족(은폐)에서 오는 쾌감으로 파악할 때, 그 쾌락이 지속되려면 결핍이 반복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 분열적 구조는 인간을 외적인 것에 종속된(중독된) “쾌락 기계”로 만든다. 앞서 다룬 스피노자의 행복, 즉 지복(beatitudo)은 이러한 쾌락의 구조를 완전히 탈피하는 데서 비롯한다. 그는 『에티카』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은 쾌락을 억제하기 때문에 지복을 누리는 것이 아니라, 지복을 누리기 때문에 쾌락에서 벗어날 수 있다.”


이 말은 행복이 감정(쾌감)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이해에서 비롯된 자유의 상태임을 뜻한다. 스피노자의 행복은 욕망의 근원을 인식함으로써 외적 의존에서 벗어나는 인식의 전환이다. 이는 불교의 통찰과도 맞닿아 있다. 부처 역시 고통의 원인을 이루는 갈애(渴愛)의 구조를 통찰함으로써 해탈에 이른다고 보았다. 두 입장 모두 행복을 욕망의 메커니즘을 자각/탈피함으로써 얻는 내적 평정으로 본다. 그리고 이는 쾌락과 고통의 진자 운동을 작동시키는 결핍의 회로를 끊는 데서 비롯된다.


불교의 인드라망 개념을 도입할 때, 공리주의의 근본적 한계는 더욱 선명해진다. 공리주의적 사유는 존재(우주)의 전체적 질서, 즉 상호연결된 생명망의 보이지 않는 구조를 이해하지 못한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라는 명제는 분리된 자아(ego)의 계산적 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다. 공리주의의 ‘전체(최대 다수)’는 개별적 욕망체의 합계를 뜻하며 ‘최대 행복’은 그 개체들의 쾌락을 더한 총합에 지나지 않는다. 이는 에고의 계산적 이성이 만들어낸 수학적 윤리에 불과하며, ‘다수를 위한다’는 명분 아래 전체주의나 집단적 동일화로 흐를 위험을 내포한다.


이처럼 행복을 쾌락의 계산으로 환원한 순간, 이성은 사물의 근원적 질서를 통찰하는 힘이 아니라 단편적 결과를 조정하는 도구로 전락한다. 벤담에게 이성은 쾌락의 양을 계산하는 기계적 장치였고, 밀에게는 질적 비교를 수행하는 판단 능력이었다. 이렇게 이성의 목적이 ‘이해’가 아닌 ‘효용’이 될 때 인간의 정신은 외적 조건에 종속될 수밖에 없다.


스피노자의 관점에서 이는 이성이 자신의 본질을 잃은 상태이며, 불교적 관점에서는 무명(無明)의 연쇄 속에 갇힌 의식이 된다. 공리주의는 인간의 내적 변용을 촉발하지 못한 채 행위의 결과만을 윤리의 기준으로 삼는다. 그 결과 행복은 내적 충족이 아닌 외적 계산으로 대체되고, 도덕은 존재의 각성이 아닌 효율의 논리로 변질된다. 직관적 이성이나 명상적 지혜는 사라지고 그 자리에 남는 것은 자각 없는 합리성, 통찰 없는 도덕이다. 이는 쾌락주의 행복관의 근본적 한계이자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낸 결핍의 시스템이다.


공리주의가 인간을 감각의 계산 속에 가둔 반면, 스피노자와 부처는 그 계산적 구조 자체를 넘어서는 인식의 전환을 제시한다. 두 사상은 행복을 내적 충족과 자각의 깊이에서 찾는다는 점에서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그들에게 행복은 어떤 대상이나 경험에서 얻어지는 결과가 아니라 존재의 근원적 법칙을 이해함으로써 얻는 자족적 평정이다.


두 입장에서 행복은 더 많이 느끼는 것이 아니라 더 깊이 이해하는 것이다. 감정의 총량이 아니라 감정의 구조를 자각하는 데서 평정이 생긴다. 평정은 무감정이 아니다. 무감정은 심리적 방어나 회피에서 비롯되는 반면 평정은 현실을 직시하는 통찰에서 나온다. 평정은 감정을 느끼는 동시에 이에서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여기에 진정한 행복의 길이 있다.


결론적으로, 행복은 쾌락의 합산이 아니라 존재의 통합이다. 공리주의의 인간이 계산 속에서 이득을 구한다면 통찰의 인간은 이해 속에서 자유를 얻는다. 『법구경』이 말하는 두 갈래 인생길, 즉 ‘이익의 길’과 ‘대자유의 길’은 이렇게 갈린다. 결국 진정한 행복은 결핍을 메우기 위해 이익을 좇는 마음이 아니라, 결핍의 구조를 통찰하고 이를 초월하는 정신의 능력에서 비롯한다.


이것이 또한 철학의 존재 이유이자 철학함의 본래적 힘이다. 쾌락주의에 입각한 공리주의 사상은 결핍의 패러다임에 머물지만, 스피노자와 부처가 제시한 존재의 통찰과 필연성의 자각, 연기(緣起)의 지혜와 정신적 해탈은 그 한계를 벗어나게 한다. 이것이 배부른 돼지와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넘어, 쾌락과 지복이 하나 된 행복에 이르는 유일한 길이다.


<오늘의 논제>

이원희: 공리를 추구하며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을 기반으로 한 공리주의적 관점에서 윤리적/도덕적으로 어긋난 행위가 다수의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면 이 행위는 선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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