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의 철학> 9주차. 2025. 10. 31.
욕망은 오랫동안 결핍의 징후로 정의되어 왔다. 욕망은 결핍을 채우려는 운동으로서 언제나 무언가의 부재를 전제로 성립한다. 이 관점에서 인간은 결핍을 채우기 위해 끊임없이 외적인 것을 좇는 존재이다. 욕망의 주체는 자신이 욕망을 ‘갖는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욕망에 ‘붙들려’ 있다. 그는 욕망하는 대상을 통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믿지만 그 믿음은 자신의 불완전함을 전제한다.
이로써 욕망은 결코 충족될 수 없는 악순환의 구조에 빠진다. 결핍의 욕망은 끝없이 뭔가를 ‘찾게’ 하지만 그 끝에는 언제나 ‘없음’이 기다린다. 채워지지 않는 결여는 타자를 향한 집착과 자기 에너지 소모로 이어진다. 이렇게 타자를 통해 자신을 메우려는 시도는 의식에 결핍감을 각인시키는 행위이며, 이에 따라 존재는 더욱 심화된 타자 의존성과 자기소외로 치닫게 된다.
이렇게 볼 때 결핍욕의 본질은 ‘존재의 본래적 힘을 외부로 이탈시키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피노자의 표현을 빌리면 자기보존욕이 외적 원인에 예속되어 자신의 능동적 본성을 상실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자기 결핍의 체험이야말로 의식 전환의 계기가 될 수 있다. 자기소외로 인한 고통은 인간을 각성시킨다. 이에 따라 외적 의존성을 탈피해 스스로 충족되고자 하는 존재의 욕망이 솟아난다.
여기서 스피노자의 ‘코나투스(conatus)’ 개념을 존재의 자족적 운동 원리로 읽어낼 수 있다. 스피노자는 말했다. “모든 존재는 자기 존재를 지속하려는 힘 안에서 자신의 본질을 표현한다.” 자족의 상태는 바로 이 코나투스의 순수한 작동이다. 코나투스의 본성은 단순한 생존 본능이 아닌 자기 존재를 자각하려는 힘에 있다.
이렇게 볼 때 코나투스적 존재욕은 결핍이 아니라 넘치는 생명 에너지, 즉 내부의 풍요로움이 밖으로 흘러나온 것이라 할 수 있다. 진정한 사유, 철학, 예술, 창조성은 이 ‘흘러넘침’에서 나온다. 이때 욕망은 결핍의 구조를 벗어나 충만의 구조로 변형된다. 결핍의 욕망이 “나는 그것이 필요하다”라고 말한다면, 존재의 욕망은 “나는 나로 존재한다”라고 말한다. 존재의 욕망은 욕망의 순수 형태, 즉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삼는 욕망이다.
이러한 코나투스적 존재욕이 깨어난 의식은 외부로부터의 자극이 아니라 내부의 충만으로부터 행한다. 존재로부터의 행위는 목적을 향한 수단이 아니라 존재의 표현 그 자체다. 그 행위는 무언가를 ‘하기 위해서(doing for)’가 아니라 ‘존재로서(doing as being)’ 일어난다.
존재로부터 흘러나오는 욕망은 충만에서 비롯된 사랑의 에너지이다. 사랑은 존재가 자신을 인식하고 확장하려는 운동으로, 그 움직임은 세계를 채움의 대상이 아닌 자기 표현의 장으로 변환시킨다. 스피노자가 말한 기쁨(laetitia), 즉 존재의 완전성이 증대되는 감정은 바로 이러한 흐름 속에서 발생한다.
이렇게 존재의 욕망은 곧 사랑의 욕망이 된다. 가득 찬 그릇이 흘러넘치듯 자족의 상태에서 존재는 자기를 넘어 바깥으로 흘러간다. 자족에 근거한 사랑은 ‘소유하려는 사랑’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결핍에서 비롯된 사랑이 타자를 끌어와 자기를 채우는 것이라면, 존재에서 비롯된 사랑은 내면의 완전성이 외화되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은 존재 자체(Being itself)가 자신을 현현시키는 과정이다. 이때의 사랑은 “나는 당신이 있어야 충만해진다”가 아니라 “나는 충만하기에 당신에게 흘러간다”가 된다.
따라서 사랑은 단순한 감정이 아니라 창조의 근본 원리이다. 존재는 사랑을 통해 자기 안의 신적 무한성을 인식한다. 이는 코나투스의 궁극적 형태이다. 존재가 자신을 유지하는 동시에 표현하려는 힘인 코나투스가 무한한 자기인식으로 확장된 것이 아가페(agape)이다. 고로 사랑은 코나투스의 궁극적 표현이며 존재가 자신을 잃지 않으면서 세계에 화현되는 운동이다.
결국 사랑은 존재가 자신을 나투려는 신성한 욕망이다. 사랑 속에서 인간은 우주가 자신을 통해 스스로를 표현하고 있음을 자각한다. 결국 사랑의 욕망은 존재의 자기표현이자 자기초월이 된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 욕망의 여정이 신적 창조로 귀결되는 알파이자 오메가이다. 그것은 인간 안의 신성을 깨우는 일이며 우주가 자기를 말하는 방식이다.
결핍의 욕망은 타자의 형태를 빌려 자신을 확장하려 하지만, 사랑의 욕망은 자기 존재의 흘러넘침을 통해 형태를 생성한다. 이처럼 결핍의 욕망에서 시작된 인간 의식의 여정은 존재의 욕망을 거쳐 사랑의 욕망으로 이어진다. 이는 욕망의 성질 자체를 변형시키는 의식 변용 과정이며 그 중심에는 코나투스가 있다. 코나투스는 존재가 자신을 유지하고자 하는 근원적 충동이지만, 결핍의 의식에서는 밖으로 이탈한 욕망으로, 자족의 의식에서는 신성한 창조력으로 작동한다.
요컨대 사랑은 코나투스가 외향화된 힘이며, 그 힘 속에서 존재는 태양처럼 자신의 빛을 발현한다. 이때 인간은 결핍의 피조물에서 창조의 통로로 변모한다. 그는 세계를 통해 자신을 완성하지 않고 자신을 통해 세계를 완성한다. 코나투스적 변용은 인간을 외적 원인에 종속된 존재에서 스스로의 원인이자 창조의 근원으로 변화시킨다.
“신은 자신 외에 아무것도 원하지 않는다” 했던 스피노자의 말은 무관심이나 부정성이 아니라 신성의 절대적 충만함과 완전한 긍정성을 표현한 것이다. 그리고 ‘신즉자연(神卽自然, Deus sive Natura)’의 원리에 따라 자연의 일부인 인간도 신과 같은 본성을 지닌다. 인간 또한 근본적으로 자기 안에 머물며 자족한다.
신은 욕망하지 않기에 무한히 창조하며 인간 또한 신성과 합일될 때 무욕적 창조의 통로가 된다. 욕망이 사라질 때 진정한 창조가 시작되는 이유는, 창조의 본질이 결핍의 ‘보충’이 아니라 존재의 ‘넘침’이기 때문이다. 무욕의 상태는 욕망이 존재의 힘으로 전환된 것이며, 이러한 상태에서 인간은 ‘하려 함’이 아닌 ‘존재함’으로써 모든 것을 실현한다.
결국 코나투스의 정점은 욕망과 창조의 역설에 있다. 인간은 코나투스 속에서 자기 자신을 원인으로 삼아 세계를 낳는 창조자가 된다. 이 ‘욕망 없는 욕망’ 속에서 결핍은 부정되지 않고 자각을 위한 단계로서 포용된다. 인간은 결핍을 통해 무한을 깨닫고 그 무한함 속에서 사랑을 느끼며 사랑 속에서 자신을 드러낸다. 이렇게 존재는 욕망하지 않음으로써 완전히 욕망한다. 그 초욕(超欲)의 에너지가 만유를 낳고 그 과정에서 존재는 지복을 누린다. 따라서 지복은 존재의 본래 상태이며 존재 자체가 곧 지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