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의성을 지휘하라>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 긴 겨울방학을 보내던 조카들이 지난 2주 동안 부모님 댁에 다녀갔다.
외할미 집에서 갖고 놀 장난감이 충분하지 않은 조카들은 층간 소음을 걱정하는 할미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뛰다 혼나기를 반복하며 (부모님 집은 아파트다) 무료한 칩거 생활에 동참하고 있었다.
이제 7살, 4살인 두 비글 형제들이 유일하게 조용한 시간은 각자 핸드폰을 하는 시간. 7살 형아는 자기 핸드폰으로, 4살 귀요미는 아이패드를 하나씩 끼고 게임도 하고 유튜브도 보며 각자에게 허락된 평화로운 행복을 즐기곤 했다.
항상 업텐션인 둘째는 영상을 틀어놓고 노래를 따라 부르는 것을 좋아하는데 그중에서도 특히 즐겨보는 영상은 '겨울 왕국'이었다. 엘사의 움직임이나 손짓 제스처까지 디테일하게 흉내 내며 "레리 꼬우~ 레리 꼬우~."를 흥얼거리거나 "다 이져~ 다 이져~."를 부르며 온 집안을 활보하며 돌아다녔다. ('Let it go'의 한국어 버전이 '다 잊어'이다.) 예상했듯이 귀요미 둘째 조카가 가장 좋아하는 애니메이션 영화는 바로 디즈니의 '겨울 왕국'이다.
이제 겨우 4살이 된 꼬맹이가 컴컴한 영화관에서 '겨울 왕국 2'를 감상하며 엉덩이 한 번 떼지 않고 눈에서 레이저를 쏘며 봤다고 하니 겨울 왕국이 얼마나 대단한 영화인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겠다.
집중력이 15분을 넘기기 힘든 아이들을 사로잡는 영화라니. 이 세상에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일처럼 놀랍고 창의적인 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새로운 세계관을 만들어내고 캐릭터 하나하나 살아 숨 쉬는 인격체로 만들어내기까지 애니메이션을 제작하는 험난한 여정은 종종 '산고(labor pains)'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리고 이런 산고를 기꺼이 감내하며 창작에 앞장서는 대표적인 곳을 꼽으라면 누구나 주저 없이 디즈니(Disney)와 픽사(Pixar)를 이야기할 것이다.
디즈니와 픽사는 '세상에서 가장 창의적인 인재들이 모여있는 곳'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이 회사들이 갖는 상징성은 어마어마하다. 자율적인 근무환경, 창의성이 존중받는 회사, 꿈같은 기업 문화. 나도 이렇게 '창의성'이 마음껏 발현될 것만 같은 회사에 다니고 싶다.
<창의성을 지휘하라>는 픽사 창업자인 에드윈 캣멀이 픽사의 탄생부터 디즈니와 픽사의 합병, 그리고 그 이후의 과정까지 세계에서 가장 창의적인 조직을 일궈 온 서사를 담은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책이다. 창의적이고 자율적인 조직 경영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거나 어려움을 겪고 있는 CEO 또는 이제 막 창업한 스타트업을 운영하는 새내기 사장님이라면 꼭 읽어봐야 할 필독서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고 싶다.
책을 읽어보기 전에는 알지 못했다. 디즈니도, 픽사도 이런 창의적인 조직으로 탄생하기까지 엄청난 '산고의 시간'을 겪어왔다는 것을. 디즈니도 여느 회사처럼 경직된 조직문화로 침체된 분위기 속에 난항을 겪은 시기가 있었다. 픽사도 처음부터 창의적인 조직으로 순조롭게 출발한 것은 아니었다. (픽사가 디즈니에 인수합병되었으니 이제부터는 '디즈니'라고 언급하겠다.)
본격적으로 이야기하기에 앞서, 모든 기업이 창의적인 기업 모델을 추구해야 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해두고 싶다. 책에서도 언급하지만 창의적인 조직 문화가 적합한 분야가 있는 반면, 직원의 안전이 수시로 위협받는 작업 현장이나 생산 공장 같은 회사에서는 창의적인 문화보다 엄격하고 통제된 조직 문화가 도움이 될 수도 있으니 말이다.
에드 캣멀은 '사람에게 초점을 맞추는 것이 모든 창조적 사업의 핵심 성공 비결'이라고 말한다. 창의성은 사람에게서 나온다는 믿음을 갖고 직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직원들이 창의성을 발현하기 위한 기업문화를 만들기 위해 노력해 온 과정을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창의성이 '타고난 재능'이라거나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아이디어'라고 믿는 이들에게는 안됐지만 창의성은 우연히, 운 좋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자율적이라고 상징되는 기업문화 이면에 머리를 쥐어뜯으며 치열하게 고민하고, 마감기한에 맞춰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전력투구하는 강도 높은 일도 수반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런 과정이 '창의성을 높이는 환경'을 만났을 때 좋은 결과로 이어진다는 것이다.
디즈니의 기업 분위기는 책 <뉴파워>에서 말하는 신권력 모델과 많이 닮아있다. 기존의 수직적인 기업문화에서 벗어나 수평적이고 신권력 가치를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영 철학을 보면 더욱 그렇다.
신권력 가치의 요소를 살펴보면 사람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에드 캣멀의 경영 철학이 어떻게 디즈니를 창의적인 조직으로 이끌 수 있었는지 많은 부분 이해가 된다.
내가 책을 읽으며 디즈니가 창의적인 조직이 되는데 중요하게 작용했다고 느낀 특징은 다음과 같다.
1. 신뢰를 기반으로 한 집단지성 공유
어려운 시절을 서로 의지하면서 함께 헤쳐 나간 경험 덕분에 직원들 간의 신뢰와 유대가 돈독해진 것이다.
- 창의성을 지휘하라 p.95
사람이 서로 유대관계를 맺고 신뢰를 쌓기 위해서는 함께 고난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경험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것을 함께 극복했을 때 서로를 향한 믿음과 결속력은 더욱 단단하게 뿌리를 내린다. 디즈니 직원들은 함께 어려운 시기를 극복하며 서로 소통하고 문제 해결하는 과정을 통해 서로를 동료로 확실히 인식할 수 있었다.
리더는 끊임없이 공동의 목표가 무엇인지 한목소리로 방향을 제시했고 직원 모두가 한배를 탄 공동체라는 의식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노력했다. 실수나 실패가 발생할 때, 잘못한 사람을 찾는 게 아니라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 감으로써 직원들이 실수나 실패에 대한 두려움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다는 믿음을 갖도록 만들어 직원들의 자신감을 고취시켜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내고 적극적으로 활동하는 분위기를 조성하도록 만들었다.
직원들은 직급에 상관없이, 자신이 어떤 의견을 내놓아도 불이익을 받지 않는다는 안전망을 느꼈기 때문에 '브레인트러스트'라는 집단지성의 회의를 통해 솔직하고 건설적인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아이디어를 끊임없이 발전시키고 성장시켜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이는 창의적이고 탁월한 품질의 디즈니 픽사 애니메이션을 탄생시키는 핵심 역할을 했다.
2. 변화에 대처하는 유연성
나는 변화를 받아들이고 활용하는 것이 창의적 활동의 본질이라고 본다.
- 창의성을 지휘하라 p.235
세상에 변하지 않는 것은 없다. 이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과거의 관성을 고집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지 않으면 도태될 뿐이다.
에드 캣멀은 디즈니에 사장으로 취임한 후, 디즈니가 현재 갖고 있는 수직적인 기업 문화는 직원들의 창의적인 사고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하고 이를 수평적인 문화로 변화시키는 데 힘썼다. 그의 판단은 옳았고, 디즈니도 딱딱하고 경직된 분위기에서 벗어나 유연성을 갖춘 또 다른 기업으로 변모했다.
그는 인력개발 부사장 앤 르캠으로부터 향후 2년간의 계획이 담긴 보고서를 받은 후에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을 완벽하게 설정하고 이를 철저하게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대신, 앞으로 벌어지는 상황에 따라 경로를 수정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하고 유연하게 계획을 짜도록 지시'했다고 하니 그가 유연성을 얼마나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3. 직원들이 경험하는 주인의식
픽사의 경영진은 직원들을 픽사의 소유권을 일부 지닌 동업자라는 마음으로 대우한다. 직급의 고하를 막론하고 좋은 아이디어가 있다면 누구나 언제든지 이야기할 수 있도록 장려하고, '노트 데이 토론회'와 같이 전 직원이 자발적으로 나서서 회사의 발전을 위해 적극적으로 아이디어를 내고 토론을 거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장치도 마련되어 있다.
디즈니에 다니는 직원이라면 자신이 회사에 기여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느끼고, 이를 통해 직원들이 주인의식을 갖고 회사 업무에 더욱 매진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받는다. 직원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다양한 장치들이 마련되어 있기 때문에 직원들은 회사 일에 나서는 것을 자연스럽게 여긴다. 이런 경험이 축적되어 모두가 회사에 대한 애사심과 자부심을 갖고 즐겁게 일하는 곳이 바로 디즈니의 세계이다.
디즈니의 창작 환경은 <생각이 돈이 되는 순간>에서 언급한 창의적 공동체의 이상적인 표본 같다.
멘토링 프로그램을 통해 마스터 티처와 제자를 연결해 주고, 브레인트러스트나 다양한 토론 및 회의를 통해 피드백을 주고받으며 직원들이 상충하는 협업자의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성공적으로 프로젝트를 완성하는 주변의 팀을 보면서 영감과 동기부여를 받는 모던 뮤즈들에게 둘러싸여 있고, 디즈니라는 거대 마케팅 유명 프로모터까지 갖춰 대박 아이디어를 창조해내고 있으니 이보다 더 창의적인 조직을 찾기 어렵다는 생각마저 든다.
책을 읽으며 반문하게 된 우리나라의 대부분의 조직문화는 아쉬움을 남긴다.
회사에서 여는 회의는 대부분 회의가 아니라 통보라 했던가? 과장님이나 부장님의 지시사항을 전달받고 아이디어를 내라고 해서 내 목소리를 내면 개념 없는 직원으로 낙인찍혀 그다음부터는 몸을 사리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종종 들었다.
이렇게 위축된 환경에서는 생산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할 수도 없고 인재를 데려다 놓고도 창의적인 활동을 저해하는 비극을 낳는다.
창의적인 조직까지는 아니더라도 경직되고 도태되는 기업 문화에서는 벗어나, 건강한 기업문화에 대해 고민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기업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회사의 CEO는 물론이고 중간관리자와 실무자들도 머리를 맞대고 이 책을 공부해 회사에 직접 적용해봤으면 좋겠다.
우리나라도 수평적이고 건설적인 기업문화를 가진 기업들이 늘어나 '나도 이 회사에서 일해보고 싶다'라고 생각하게 만드는 곳이 많이 늘어나 즐거운 고민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