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치 Mar 19. 2020

밥순이의 배달음식 적응기

그녀의 배민 생활

나는 순도 99.9퍼센트 밥순이다.


과자는 거의 입에 대지 않고 라면을 끓여 먹는 일도 한 달에 한두 번을 넘기지 않는, 배가 고플 때는 주전부리를 아무리 해도 허기가 가시지 않아 결국 '식사'를 해야 해결이 되는 명실상부 밥순이.


엄마가 외식을 좋아하지 않으셔서 집에서 거의 대부분의 음식을 해주셨던 탓에 내 입은 엄마 손맛에 길들여져 담백하고 삼삼한 가정식만 있으면 (특히 국물만 있다면) 끼니를 잘 때우는 편이었다. 그리고 엄마는 음식을 꽤 맛있게 하셨다.


수십 년을 집밥에 길들여진 밥순이가 혼자 밥을 챙겨 먹으며 산다는 건 사실상 생존이 달린 중요한 문제였다.


독립 초기에는 시간 여유가 많고 혼자 사는 일에 도취해서 소꿉놀이하는 아이처럼, 예쁜 식기에 그럴싸하게 완성된 음식을 담아 먹으며 집밥 욕구를 해결했다.

입맛 당기는 음식이 있는데 내 손으로 만들어낼 수 없을 때는 엄마 찬스를 사용해 집에 갔을 때 먹거나 엄마가 이미 만들어 놓은 국과 반찬을 그득하게 싸들고 의기양양하게 돌아오곤 했다.

엄마는 바쁜 직장인 코스프레를 하는 딸이 밥을 잘 챙겨 먹을 수 있도록 살뜰히 챙겨주셨다.


그 덕분에 독립한 지 반년이 다 되도록 밥순이의 집밥 사수에는 큰 문제가 없었다.

하지만 6개월을 넘어서자 상황이 점점 달라지기 시작했다.


점점 일이 바빠지면서 집에서 요리를 해 먹는 시간이 아깝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음식을 하고 먹는 즐거움보다 뒷정리하고 설거지해야 하는 피곤함이 더 크게 다가왔다.

식욕도 종종 떨어져 가끔은 배가 고픈데도 먹고 싶은 음식이 없었고 엄마한테 부탁하는 음식의 가짓수도 눈에 띄게 줄어들기 시작했다.

뻔한 집밥 메뉴에도 조금씩 질려가는 건가 싶을 때쯤 간편한 배달음식의 세계에 발을 들여놓기 시작했다.




한 달에 한두 번 시켜먹던 치킨의 배달 횟수가 점점 늘어났다.

혼자서는 식당에서 먹기 어려운 막창도 배달시켜 먹어보고, 고기가 당기는 날엔 보들보들한 계란찜에 냉면까지 제공되는 삼겹살 1인 세트를 주문해 세상 참 좋아졌다며 물개 박수를 치며 먹기도 했다.

찌개를 배달시켜 소분해봤더니 2인분이 4인분으로 복제되는 기적을 경험하고 나서는 '비싸지만 네 끼'라고 합리화하며 배달을 누르고, 식당에서도 두세 명이 먹을 수 있는 세숫대야만 한 크기의 아귀찜도 통 크게 주문해 혼자 일주일 가까이 먹었던 기억도 난다. (그땐 아귀찜이 정말 미치도록 먹고 싶었다.)


요즘은 주문을 안 해 본 음식을 찾는 게 어려울 정도니 배달음식이 이젠 나의 영양 수액(SWAG)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이런 배달음식 초보 시절에는 잊을만하면 한 번씩 터지는 시행착오가 있었다.

별점을 보고 리뷰를 꼼꼼히 읽으며 도전해도 실패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

수많은 에피소드 중 내 입에 가장 치명적인 상처를 남긴 시행착오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한다.




도대체 원산지가 어디냐?

치킨은 워낙 종류가 다양해서 '오늘은 치킨이 땡긴다'는 생각이 들어도 메뉴를 고르는데만 세월아 네월아 할 때가 많다. 후라이드를 먹을지, 양념을 먹을지. 양념을 먹는다면 무슨 맛으로 할 건지, 튀긴 건지 숯불인지, 치밥은 할 건지 말 건지. 나와의 치열한 정신 싸움에서 승리를 하고 나서야 주문 단계로 넘어갈 수 있다.


나는 크리스피 치킨과 숯불 치킨을 5:5로 좋아한다.

특히 숯불 치킨은 오늘 먹다 내일 먹어도 변함없이 맛있어서 남는 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문제는 맛과 가격이었다.

1인 외식으로는 가볍지 않은 금액이니 맛만 보장된다면 얼마가 들어도 기쁜데, 잔뜩 기대한 음식이 그날의 식사를 망쳐버리면 그렇게 속이 쓰릴수가 없었다.


나에게 가장 쓰라린 상처를 남긴 건 작년 겨울에 주문했던 '치즈 불닭'이다.

체인으로 유명해 보이는 한 업체가 우리 지역에도 생겼다고 해서 처음 도전하는 초심자의 불안함에 후기도 검색하고 리뷰도 보면서 나름 깐깐하게 메뉴를 골랐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매운 음식이 먹고 싶었고, 오랜만에 불닭 먹고 땀 좀 흘려보자는 심산으로 호기롭게 주문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띵동' 울리는 경쾌한 벨소리와 함께 불닭이 도착했다.

이 추운 날씨를 뚫고 배달해주셔서 제가 오늘도 끼니를 해결합니다.

감사합니다 라이더님. 안녕히 그리고 조심히 가세요.


식탁에 포장 용기들을 쫙 펼쳐놓고 비닐을 쭉쭉 뜯으며 냄새를 맡고 있자니 어서 먹고 싶어서 정신이 다 혼미했다.

드디어 젓가락을 들고 새빨간 닭고기 한 점에 하얗고 쭉쭉 늘어나는 치즈를 돌돌 감아 한입에 앙!


응? 잠...깐만?

이건 무슨 맛이지? 너무 배가 고파서 혀가 이상해졌나? 다시 한번 먹어보자.

그래, 이번엔 야채도 같이 싸서 먹어보자. 내가 좋아하는 촉촉한 닭다리 살이랑 뜨거운 치즈에 무쌈이랑 양파까지 크게 싸서 앙!

어라? 내가 기대한 건 이 맛이 아닌데. 뭐지, 이 비릿하고 질겅거리는 맛은?


으웩. 나 이거 더 이상 못 먹겠다.


저녁 시간을 넘겨 고픈 배를 부여잡고 한껏 기대에 차서 앙! 하고 먹었는데, 나의 식욕은 그대로 바닥에 패대기 쳐졌다.

고기에서는 신선하지 않은 비린 맛이 났고, 식감은 촉촉한 게 아니라 질겅질겅이었다.

설상가상으로 치즈는 빠르게 식어 단단하게 굳었다.

도대체 뭐가 잘못된 걸까? 다른 사람들은 맛있다며 호평 일색인데. 오늘 닭이 신선하지 않았나?


그 순간 내 눈에 들어온 원산지.

[치즈불닭-브라질산]


그랬다. 이전에도 이와 비슷한 실패 경험이 있었다.

늘 맛있게 먹었던 숯불양념구이 집에서 처음으로 뼈가 아닌 '순살' 버전을 주문했던 날, 평소와 다른 비린 맛과 넘치는 기름에 몇 젓가락 먹고 내려놓은 기억. 그 새 맛이 변한 건가 섭섭했는데 그 집도 순살은 브라질산이었다.


아아- 나는 미식가였구나!

국내산과 브라질산을 한 입 먹고 어렴풋이 잡아낼 줄 아는 '알고 보니' 미식가


나의 입맛을 앗아가 버린 이 시뻘건 무리들을 어찌할까?

내 피땀 눈물과 바꾼건데 아까워서 어쩌나.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살려봐?

주먹을 움켜쥐며 고민하길 수차례.

2만 원에 배달된 음식 쓰레기는 결국 그대로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그날 닭고기에서 느꼈던 맛은 두고두고 잊히지 않는다.

나의 건강을 위협할 것 같은 맛. 몇 입 더 먹으면 배탈이 날 것 같은 맛.

공중에 흩뿌린 나의 돈을 생각하면 아직도 마음 한편이 쓰리다.


그 사건의 앞뒤로 몇 차례나 반복되었던 '수입산(브라질산, 호주산, 태국산 등등)'과의 싸움 끝에 이제는 주문하기 전 재료의 원산지를 확인해보는 습관이 생겼다.

먹고 싶은 메뉴의 재료가 수입산이라면? 아무리 당겨도 믿고 거른다.


배달음식을 시키면서 '건강'을 염려한다는 것 자체가 아이러니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집밥의 은혜로움을 상대적으로 덜 받으며 살 수밖에 없는 처지에 배달음식이라도 좀 더 건강한 음식을 먹고 싶은 현대인의 마음이랄까?

잘 고른 음식은 내가 한 음식보다 훨씬 낫더라.


이제는 여러 시행착오 끝에 배달음식에 꽤 많이 적응했다.

수입산에 민감한 '알고 보니' 미식가의 입맛으로. 


매거진의 이전글 적은 돈으로 행복해지는 방법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