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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치 Mar 24. 2020

나는 왜 그와의 이별에 아파했을까

이별 후에 보이는 것들

다음날 무슨 정신으로 일을 마무리하고 왔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퇴근하는 차 안에서 목 놓아 운 탓에 벌게진 눈을 하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방으로 직행해 휴지를 뽑아 든 기억만이 선명하다.

언제 울었는지 가물가물한 기억 때문에 혹여나 감정이 고장 난 건 아닐까 걱정했던 지난 시간들이 무색할 만큼, 눈물은 터진 둑처럼 세차게 쏟아졌다.


엄마에게 전해 들었을 언니의 이별 소식에 여동생이 부리나케 전화를 걸었다.

동생은 잘 헤어졌다고 위로하면서 본인이 결혼하고 나서야 느낀 뼈 때리는 조언들로 다친 마음 여기저기에 반창고를 붙여줬다. 동생과의 전화통화가 응급처치였던 듯 그제야 눈물도 멈추고 마음이 많이 안정된다.

하지만, 나의 태도에도 역시 문제가 있음을 짚고 넘어갔다.


"언니, 결혼이 행복을 보장하는 건 아니야. 왜 결혼만 하면 행복할 거라고 생각해?"


동생의 그 한 마디가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

부모님의 결혼 압박에 무비판적으로 수용하고 휩쓸려 다녔던 지난 시간들. 

결혼만 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믿었던 나의 착각. 허를 찔린 느낌이었다.




그때부터 다시 나의 연애와 이별 그리고 나의 마음까지 찬찬히 들여다보기 시작했다.


나는 왜 이렇게 그와의 이별이 처절하게 아프고 고통스러울까.

분명 이전의 이별들과는 다른 무언가가 있었다.

그 이유를 파헤치기 시작한 뒤 줄줄이 딸려 나오는 기막힌 사실에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나를 고통스럽게 하는 건 사랑했던 그에 대한 그리움이 아니었다.


그것은 열패감이었고 상실감이었다.

그의 전 여자 친구보다 부족해서 그를 놓쳤다는 열패감, 내 것이라 믿었던 그를 빼앗긴 상실감, 그리고 결혼에 성공하지 못했다는 좌절감까지. 이 감정들이 얼룩져 나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그러다 알아버렸다.


나의 속마음 한편에는 그와 결혼하면 그의 모든 것을 소유할 수 있다는 욕망이 도사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의 집, 안정적인 직장, 경제적 여유 이 모든 게 내가 힘들이지 않아도 결혼이라는 수단을 통해 쟁취할 수 있는 나의 전리품 같은 것이었다.

나는 그와의 결혼을 통해 그가 대신 이루어 줄 나의 자유와 경제적 안정을 꿈꾸고 있었다. 그리고 이 야망을 그에게 느끼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매개로 그럴 수 있다 합리화하고 모른 척 외면했다.


발가벗겨져 드러난 진실 앞에 순순히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를 만나는 동안 그를 둘러싼 환경에 더 매력을 느꼈음을.

나의 소중한 걸 빼앗긴 게 아니라 원래 그의 것을 취하고자 탐내던 도둑이었음을.

그 묵직한 진실이 이제와 나의 뒤통수를 무자비하게 후려갈긴다.


조건만 보고 결혼할 거라고 말하는 사람들보다 더 비열한 사람이었구나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 어느새 나는 인생의 밑바닥에 서 있었다.


온몸이 떨리는 수치심에 얼굴이 화끈거려 고개를 똑바로 들 수가 없다.

끔찍하게 변해버린 내 모습이 너무나도 비참했다.

어쩌다 내가 이렇게까지 변했을까.


지금까지 흘렸던 눈물과는 다른 의미의 눈물을 흘리며 나는 통렬하게 참회하고 반성했다.

이 모든 것이 내 부족한 능력을 다른 사람을 빌어 메우려고 했던 나의 비겁함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다시 살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해 신께서 보내준 사람인지도 모른다.


남은 인생을 더 이상 이런 식으로 졸렬하게 살고 싶지 않다.

앞으로는 지금과 다르게 당당한 모습으로 살아갈 것이다.

나는 분명 이보다 나은 존재임을 살아가면서 스스로에게 증명해 보이자.


나의 무능력을 핑계로 비굴하게 다른 사람에게 기대어 내 꿈을 실현하지 않을 것이다.

이제 더는 나의 미래를 다른 사람에게 내맡기는 멍청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다.

내 인생이 다른 사람에 의해 휘둘리게 내버려 두지도 않을 것이다.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내 인생의 주체로 우뚝 서서 살아갈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나는 변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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