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태리치 Mar 23. 2020

과거 있는 남자를 만나면

결혼을 꿈꾸던 연애가 끝났다

그날은 12월을 맞아 테니스 동호회 형제들과 떠들썩하게 회식을 하던 날이었다.

육즙이 터지는 고기와 톡 쏘는 맥주 한 잔으로 행복을 한창 배 불리고 있던 중 그에게서 카톡이 왔다.


그는 늘 부르던 호칭 대신 내 이름을 또박또박 부르며 밤이 늦더라도 통화를 하고 싶다고 했다.

평소답지 않은 그의 모습에서 나의 예민한 신경세포들이 무언가 불안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게 나를 향한 것인지, 그의 신변에 관한 것인지 걷잡을 수 없어 마냥 불안하기만 했다.


눈 앞에 진진하게 놓인 진미도 뒤로 하고 쫓기듯 집으로 향했다.

방문을 꾹 닫고 전화를 걸자 통화 연결음이 두 번이 채 울리기도 전에 그가 전화를 받는다.


"나 이제 막 집에 들어왔어. 무슨 일 있어?"

걱정스럽게 묻는 나의 말에 그는 켜켜이 숨겨놓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너한테 말하지 못한 게 있어. 사실... 내가 문제가 좀 있어."


뭐? 이게 갑자기 무슨 소리야?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그의 말에 심장이 바닥으로 내려앉았다.

머리가 새하얗게 번져간다. 마른하늘의 날벼락이 따로 없다.


내가 그동안 만난 사람이 혹시 유부남인가? 아니면 이혼남? 내가 그동안 쓰레기 짓을 한 거야? 나 어떡해. 잘못했어요. 앞으로 어떻게 고개를 들고 다니지? 내가 까맣게 몰랐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용서해 줄까?

찰나의 순간, 수백 가지의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조용한 나의 반응에 그는 잠시 머뭇거리다 말을 이었다.


"헤어진 지 얼마 안 된 여자 친구가 있어. 아직 감정이 정리가 안됐는데 날 다시 만나고 싶대."


다행이다. 최악의 상황은 아니었다. 

젠장. 그런데 여자 친구라니? 그는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을 여자 친구라 부르고 있었다.

그 뒤로 덧붙인 말은 나를 더 기함하게 만들었다.


"너를 만나다 보면 네가 좋아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어. 미안해." 


자기감정도 스스로 주워 담지 못하고 주변에 폐 끼치는 머저리.

그동안의 좋은 시간들이 모두 부정당한 기분이었다. 불쾌하고 더러웠다.


그는 헤어졌던 그녀에게 다시 돌아가고 싶다고 했다.

그래. 이렇게 된 거 내가 헤어져줄게.

잠시 불이 나갔던 이성이 빠르게 켜지며 냉정을 되찾았다.


"그래... 헤어졌다 다시 만나본 적 있어?"

"아니, 없어."


대답을 듣는 순간 입가에 냉소가 걸렸다.


나는 지난 경험을 통해 얻은 믿음이 있었다. 깨진 유리컵은 다시 붙일 수 없다는 믿음.

내가 겪은 재회의 끝은 행복이 아니었다. 감정이 바닥을 드러내고 나서야 끝나는 파장이었다.

끝이 보이는 관계는 추억으로도 미련으로도 붙일 수 없다.

나와 그의 관계도 그 끝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그래. 그럼 만나 봐."

"응? 뭐라고?"

"만나보라고."


역사는 반복된다.

선조들에게 배운 지혜 중 지금 이 상황에 가장 쓸모 있는 지혜가 아니었을까.


그의 재회는 똑같은 전철을 밟고 새드 엔딩으로 끝날 확률이 높았다.

나는 그에게 헤어진 연인들의 재회가 드라마처럼 아름답지만은 않다는 경험을 선물해주고 싶었다.

그가 그녀와 다시 만나 잘 될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1%의 가능성이라고 할지라도 그를 밀어주기로 했다. 어차피 나와 잘 될 가능성은 제로였으니.


선뜻 나온 쿨한 대답에 그는 무척 당황한 듯했다.

아마도 욕을 왕창 얻어먹으리라 기대하고 있었겠지.


그렇다고 그의 마음을 이대로 편하게 덮어주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대가 나의 인연인 줄 알았는데 일이 이렇게 되어 무척 아쉽다. 너는 괜찮은 사람이니 그녀와 다시 잘 만나길 바란다고 했다.

그는 나에게 왜 이렇게 끝까지 착한 거냐며 이러면 자기가 더 미안하다는 둥 개 짖는 소리를 해대다 한결 가벼워진 목소리로 잘 지내라며 전화를 끊었다.


그를 위한 배려가 아니었다.

이별 후에 혹시라도 추접했던 내 모습을 떠올리며 극심한 이불킥을 할지도 모를 나를 위한 배려였다.


그가 꼭 느껴봤으면 좋겠다. 반복되는 역사의 힘을.

불안 불안하던 나의 연애도 이제 안녕.


전화를 끊고도 한참을 얼떨떨한 채로 앉아 있었다.

내가 지금 이별을 한 건가? 이렇게 허무하게? 갑자기?

엄마가 나보다 더 좋아하셨는데 엄마한테 먼저 말씀을 드려야겠지.


그 순간, 뺨으로 눈물이 방울방울 굴러 떨어졌다.


가족들이 모두 잠든 고요한 시간.

나는 소리 죽여 흐느끼며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이전글


다음글

매거진의 이전글 그의 열정이 식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