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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치 Mar 27. 2020

사장 한 번 해봐라 고생 시작이지

사람의 품격


"사장 한 번 해봐라, 고생 시작이지. 누구 밑에서 일할 때가 좋은 거야."


내가 공부방을 준비한다고 했을 때 프리랜서로 일했던 회사 사장님이 면전에서 하신 말이다.

다른 직원들과 함께 있는 자리에서 '사장'이라는 위치에 있는 분이 날 것 그대로의 속내를 드러내는 모습이 무척 당황스러워 눈을 데구루루 굴렸던 기억이 난다.


말을 곱씹을수록 슬슬 부아가 치밀었다.

그분의 말에는 본인의 업이나 위치에 대한 자부심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 뒤로도 한동안 본인의 신세한탄이 이어졌다.)

이는 사장님을 따르며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이 듣기에도 무척 모욕적인 언사가 아닌가!


간장 종지에나 담길만한 옹졸한 말들.

사장이 원래 힘든 줄 몰랐나? 남 밑에서 일하는 게 낫다고? 나는 지금 그런 당신을 바라보며 일하는 건가?!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스스로의 가치를 끝없이 깎아내리는데도 쉬이 멈출 줄 몰랐다.


순간, 진심으로 따져 묻고 싶었다.

"아니 사장님, 그 힘든 고생을 왜 아직도 하고 계세요?"라고.




사장님으로 말할 것 같으면 이제 막 50대에 접어든 분으로 유치원 특별활동 영어강사로 시작해 지금의 사업체를 일군 분이었다.

기성복 붐이 일던 90년대에 국내 유명 패션회사에서 일하며 세계적인 패션 도시를 누비는 멋진 신여성의 삶을 살다가 건강과 육아 문제로 일을 그만두셨다고 들었다.

그러다 우연한 계기에 한참 호황을 맞이하던 유아 영어세계에 입성하셨고 주변의 인연과 도움으로 지금은 십 수 명의 직원을 둔 사장님이 되셨다고.


지천명의 나이에 이미 건물주이고 한 사업체의 오너인 그분이 그때는 참 멋져 보였다.

3년 가까이 곁에서 지켜보니 쉼 없이 열정적으로 일하는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고 성격에 기복은 좀 있으셨지만 그저 인간적인 면이 있는 사수라 생각하며 나도 잘 따랐다.


하지만, 사람은 뒷모습이 아름다워야 한다고 했거늘.

헤어짐을 준비하는 기간 동안 마주한 사장님의 모습은 실망을 넘어 인생의 교훈 덩어리였다.




1. 능숙한 거짓말

새로운 유치원과 수업 계약이 이루어지거나 기존 원에서 하던 수업을 연장하는 경우 때때로 선생님들의 순환이 수반되었다. 배정된 원이 변경되는 경우는 오리엔테이션이나 면접 결과에 따른 이동일 때도 있었지만 수업을 다니는 선생님들의 동선이나 개인적인 사정으로 인한 이동이 대부분이었고 이는 사장님의 주 권한이었다.


그러다 우연하게, 이 순환 시즌에는 사장님이 유치원 원장님들께 거짓말을 둘러댄다는 걸 알게 됐다.

선생님들의 이동이 있을 때마다 기존에 수업하던 원에는 그 선생님이 타지로 이사를 가게 되었다거나 심지어 임신을 해서 더 이상 수업을 못하게 되었다는 레퍼토리로 거짓말을 했다. 나중에는 임신 때문에 수업을 못한다고 했던 선생님이 회사의 급박한 사정으로 기존 유치원 행사장에 동원되는 바람에 없던 아이를 유산했다는 거짓말도 하게 됐으니 사람들이 모두 경악을 금치 못했다.


2. 이상한 절약 정신

프리랜서로 일하는 선생님들은 매달 회의 날짜를 정해서 사무실에 모였다.

선생님들은 회비 명목으로 한 달에 만원 정도를 월급에서 제하고 받았고 회의에 지각하거나 불참하면 지각비와 결석비가 추가되었다. (사장님이 유리할 때만 프리랜서였던 우리는 갑을로 고용된 을이었다.) 이 돈은 주로 선생님들의 교구 재료비나 사장님의 명절 선물 값으로 들어갔다.


사장님도 매년 명절에 선생님들 모두에게 명절 선물세트를 선물했다. 대략 1만 원이 넘지 않는 인사치레용 선물로 선생님들과 서로 주고받는 형식이었다. (이마저도 명절 때마다 선물값이 얼마나 들어가는지 아냐고 생색을 내셔서 손이 부끄러웠다.)

사직을 알린 그 해, 나에게는 그 형식적인 명절 선물조차 돌아오지 않았다. 혹시나 예년처럼 사무실 개인 서랍에 넣어두셨나 싶어 몇 번을 열어봤지만 그때마다 휑한 서랍을 마주할 뿐이었다. 이것이 정녕 사실이냐 물어보고 싶었지만 치사한 처사에 마음이 삐뚜룸해져 입과 마음을 닫았다.

곧 회사를 떠나는 직원에게 선물을 한다는 건 사치였으리라. (이외에도 수많은 에피소드가 가을날 낙엽처럼 수북하지만 인상적인 일 하나만 펼쳐 적는다.)




찜찜한 기억이 비엔나소시지처럼 많은데 그만큼 따뜻했던 기억도 많은 것 같아 이쯤에서 줄인다.

받은 사람은 기억을 덜 하는 편이니까.


사장님은 타산지석을 몸소 보여주시는 모범사례로 배울 점이 많은 분이었다.

인간적으로 가까워질 때마다 나.이.말(나는 이러지 말자) 사례를 적절히 선사해주셔서 훗날 '나는 어떤 리더가 될 것인가' 고민할 때 좋은 참고가 되었고 안 좋은 면은 경계할 수 있었다.


여전히 그 힘든 사장님 놀이는 잘하고 계신지 궁금하다.

덕분에 말과 행동에서 사람의 품격이 드러난다는 법을 배워 글을 쓰는 오늘도 다시 한번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겠다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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