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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리치 Apr 02. 2020

은행을 다녀오면 어른이 된다

대출 상담을 받았다


코로나로 인해 휴원을 하느라 한 달 수입이 통째로 증발했다.

지난 2년간 씀씀이는 불어나 지출은 많은데 혼자 벌어서 혼자 먹고사는 처지라 부수입도 없고 어디 손 벌릴 데도 없다.

불씨처럼 남아있는 통장 잔고를 붙잡고 존버 정신을 되새기며 버티고 있는데 얼마 전 또 하나의 위기가 터졌다.


지금 살고 있는 집 임대인이 계약이 종료되는 대로 나가 달라고 연락을 준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계약기간이 다가올 때마다 재계약이 될지 나가달라 할지 불안불안했는데 걱정했던 최후통첩을 받아 드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2년 새 집값은 어찌나 올랐는지 매매는 고사하고 자리보전도 쉽지 않을 것 같다.

내 월급만 빼고 다 오른다더니 저 혼자만 팝콘처럼 튀겨진 의리 없는 집값을 보며 심한 배신감을 느낀다. 


나에게 집은 먹고 자는 단순한 거주공간 이상이다.

홈오피스이기 때문에 거주공간을 잃으면 일자리도 잃는다.

바닥부터 시작해서 터를 닦는 작업을 한 번은 해봐서 새로운 도전에 대한 저항은 많이 약해졌지만 그래도 두렵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이곳에서 나와 함께 수업하는 귀여운 아이들을 두고 어디로 갈 수 있을까. 안정적인 일터를 다져놓고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것도 참 어려운 일이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몸을 움직여 해결책을 알아보기로 했다.

어려움도 이제는 혼자 해결할 몫이다.


무거운 발걸음으로 은행을 향해 나선다.

번호표를 뽑고 두 손을 맞잡은 채 이름 불리길 초조하게 기다렸다.


"703번 고객님~"


경쾌한 목소리로 내 번호가 불렸다. 애써 웃어 보이며 상담창구 앞에 앉는다.


"저 대출상담 받으러 왔는데요..."


대출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자 마음이 무겁다. 여유자금이 아니라 생계를 담보로 하는 것이라 그렇다.

은행 직원의 설명을 한참 듣고 나니 눈 앞에 꽉 막혀있는 현실이 삶의 무게로 다가온다. 준비해 오라는 서류 목록이 걱정의 무게만큼 쌓인다.


이제와 후회하면 뭐하겠냐마는 올해부터 열심히 저축해야겠다고 결심한 스스로가 밉다. 으이그, 작년부터 진작 계획 세워서 했어야지!

'집 없어 서러운 세입자의 고통'을 만나자 느슨하던 신경들이 한층 팽팽해진다.


'그래, 이렇게 호되게 당해봐야 정신 차리지.'


집에 돌아오는 길 서점에 들르니 눈에 들어오는 건 부자 되는 방법을 알려준다는 책들 뿐이다.

작년에 읽으면서 공부하겠다고 다짐했는데 아직 친해지지 못한 수북한 경제서들.

오늘은 집에 가자마자 한 권 꼭 빼어 읽겠다고 다짐한다.


정신 바짝 깨워서 내 미래를 책임질 준비를 해야 한다.

은행을 다녀오고 나니 나는 어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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